[섬에서 보내는 가을] 수필가 서 양 호
조승현 jsh49@nhmirae.com
2024년 07월 12일(금) 10:28

가을이다. 남해에 내려와 지내며 가을을 보내고 있다.

가을이 오면 섬마을은 하늘이 더욱 푸르고 높아지며, 바다는 더욱 맑고 푸르러진다. 맑은 하늘 아래로 햇살은 비단실을 풀어 놓는 듯하다. 바다는 윤슬로 빛나고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옥빛 흰 물결을 쏟아 낸다. 섬마을에 가을이 내리면 사람들도 얼굴이 밝아지고 눈동자도 맑아지며 따뜻한 정이 넘쳐나 보인다.


섬으로 온 지가 한 달 가까이 되어 간다.

계절 중에는 가을이 가장 맑고 푸르며 하늘이 높아지는 계절이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사람의 마음을 맑고 푸르게 가꾼다. 사람이 자연 속에 잠기면 좀 더 순수해지고 성숙해지는 듯하다, 이 가을을 섬에서 지내기에 행복에 젖은 채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안겨 계절을 찬미하고 있다. 해송 아래 마련된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지나온 시간의 길들이 드러나 보인다. 즐거웠던 시간도, 누군가와의 가슴 아픈 기억들도 스멀스멀 되살아나서 미소를 짓기도 하고 가슴 저미며 후회하는 참회의 시간이 얼룩지기도 한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했다. 마음에 스며든 거짓과 위선의 자국들을 지우고 정직한 자기 고백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이 계절에 이루어야 할 결실의 방편이다. 얼룩지고 부끄러운 시간을 고개 숙이게 하고 가슴 깊이 참회의 시간을 채우는 것이 가을에 할 일이다.


가을이 내리면 섬마을은 결실과 풍요를 담아 넉넉함 풍경을 열어 보인다. 가을 들판이 익어가는 곡식들로 출렁이고 있다.

동트는 아침이면 하늘과 바다가 함께 열리며 천지가 붉은빛으로 가득해진다. 하늘과 바다가 새로운 하루를 창조해 내면 온 세상은 깨어난 날을 찬미할 채비를 한다. 세상 만물이 깨어나며 깨끗하고 청명한 대자연의 광휘 앞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기쁨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바래길을 드나들며 가족의 먹거리를 챙겨 온 섬마을 아낙의 끈질긴 생명력은 멈춤 없이 이어지고 있다. 섬 전체의 비탈진 언덕 어디라도 돌을 주워 층계를 쌓고 땅을 일구어낸 다랭이 논밭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이 머문다. 해 질 무렵 바다 건너 먼 산 너머로 석양이 내리면 집으로 향하는 노부부의 발걸음에도 하루가 내린다. 살아낸 하루가 아름다운 노을의 풍경 속에 잠기게 된다.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하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별빛은 달빛처럼 넘치지 않아 다정하다. 별빛은 화려하지 않아서 눈에서 머물다 가슴에 와닿는다. 별을 바라보면 꿈과 사랑을 노래한 시절들이 그리움과 설렘을 반추해 낸다. 오늘따라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밤새도록 유성이 쏟아 내리던 타르사막의 밤하늘도 생각나고 오래된 시간들에 잠겨진 이야기와 먼 곳의 소식들이 고개를 든다. 떠나간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먼 곳과 먼 시간은 아름다운 추억을 일깨운다. 아름다움이 있었던 시절과 불러보고 싶은 이름은 인생살이의 허허로움도 달래주고 풍화되어 가는 마음을 위로도 해준다. 먼 훗날에는 섬에서 홀로 지내는 이 가을도 멀어져간 행복했던 추억의 시간으로 회상될 것이다.

남해가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더 함도 덜 함도 없이 자연 스스로가 만들었고 만들어 가고 있는 풍경이다. 이 위대한 창조 앞에서는 인생의 무상함도 삶의 미학도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신의 내부인지, 외부인지? 머문 것인지, 떠돎인지? 부질없는 질문을 던지다가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또다시 보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가을에는 모든 이웃을 사랑해 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법정 스님의 <가을 이야기>라는 글 속의 글귀다. 스님의 글이 아니어도 가을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 사랑을 나누고 싶고 누구에게라도 편지 한 장을 쓰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은 누구라도 모두 다 나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계절이다.


낙엽이 공중에다 파문을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다.

누구나 고통은 싫어하고 행복을 원하며 영원을 꿈꾸어도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언젠가는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가을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 엄연한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계절이다.

남해 섬마을에 노을이 내린다.

등 굽은 노부부가 진종일 밭에서 일하다 해지는 골목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촌노의 애잔한 모습이 눈시울을 젖게 하고 가슴에 숨어 있던 연민과 사랑의 눈을 뜨게 한다.

가을이란 오랫동안 잊고 살아 온 연민과 자비가 슬며시 살아나는 계절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맑은 눈물 어리게 하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계절이 가을이다. 이 가을을 아름다운 남해 섬에서 지내고 있어 더욱 축복받은 계절이다. 그 가을 속에 잠겨 있다.


서 양 호 (수필가)
(yanghsur@naver,com)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선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해 뜨면 낮 달뜨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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