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래 30년 후를 헤아려보자"
2024년 08월 23일(금) 10:27
강기표(고현면)
이 글은 지난 6월 장윤정 부부가 3년 전 50억에 매입한 아파트를 120억에 팔아 70억을 벌었다는 뉴스를 보고 차-암 하는 마음으로 정리하여 본다. 내 삶의 언저리에 있는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숫자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한 세대인 30년을 기준으로 지난 60년을 돌이켜 미래 30년을 헤아려보려는 것이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인구문제

대한민국의 인구는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2000만, 1967년에 3000만, 1983년에 4000만, 2012년 6월 23일에 5000만 명을 넘었으며 2020년 이후 현재까지는 감소하고 있다. 출산은 대체로 60~70년대 80만, 80년대 70만, 90년대 60만, 2000년대 50만, 2010년대 40만, 2017년 35만 출생으로 30만대, 2021년 28만 출생으로 20만대이다.

현재 출산 20만대의 절반이 여성이니 이들이 출산을 시작하는 30년 후는 0.7명에서 1명으로 높여도 13만 출산, 다시 30년 후는 6만 출산이 된다. 그래서 이대로 30년 후는 6백만이 줄지만 60년 후는 60대 이상이 많은 2,000만 수준으로 돌이킬 수 없는 국가 소멸단계에 진입하여 현재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후손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2010년대 40만 출산 세대들의 출산이 시작되는 20년 내 2명 이상의 출산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 60년 후 3,500만, 최소한 3,000만은 가능해야 나라가 유지될 수 있게 된다. 유일한 수단은 여성이 30대가 아니라 25세 전 첫 출산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즉 모든 정책은 5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두고 이후는 20대 여성을 대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여 20대 여성에게 결혼을 전제로 3억가량을 주택구입(전세) 자금으로 주택 혹은 전세금을 담보로 낮은 금리로 융자하고 자녀출산 1명마다 1억씩 공제 하자. 더하여 자녀 수와 관계없이 월 100만 원가량을 양육수당으로 지급하자. 그리고 35만이 출생한 2017년생부터는 여성 징집도 필연인데 출산 여성은 면제하자. 미혼모도 인정하는 법체제도 급하다.



■1964년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당시 전체인구는 2,500만 남해군은 13만5천 서울은 150만 11배, 서울 종로, 중구와 남해의 중심가 땅값은 70년대 중반까지 같았고 외곽농지는 남해가 5배 이상 높았으며 82년에도 김해보다 3배 높았다. 기타 살림살이도 서울이나 남해나 차이가 없었다.

지역유지(부자)들의 부는 5% 정도의 상층을 제외하면 정주영과 이병철도 쌀 장사를 하는 등 부자들의 직업이 먹고 입는 것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국민소득은 상머슴 1년 세경이 쌀 3-4가마, 10대 남녀의 인건비는 밥 먹여주는 것으로 퉁 하는 정도니 현재를 기준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100년 500년 전과 비교해도 같은 찢어지게 가난한 시기였다.

박정희는 69년 삼선개헌을 하여 71년 7대 대통령 다시 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8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긴급조치통치가 시작됐다. 73년 7월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하고 그 여파로 74년 8월 육영수 여사 사망, 75년 4월 월남이 베트남에 통합되자 정국은 안보문제로 소강상태, 하지만 78년 9대 취임으로 정국은 극한대립, 결과로 79년 10.26으로 귀결됐다.

전두환은 79년 12.12로 군권을 장악하고 이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광주사태 발생했지만 10대 대통령에 취임, 정권을 잡은 후 동결 수준의 예산으로 고질적인 물가를 잡아 경제를 안정시키고 88올림픽을 유치했다. 87년 6.29로 3김과 경쟁한 노태우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북방외교에 성공하고 89년 주택건설촉진법으로 주거의 아파트 시대가 시작됐다.

남해군 단일 선거구로 국회의원 1명을 선출했다. 행정공무원은 군수직급이 국가사무관, 과장은 지방사무관으로 3과장, 6급 계장 12개, 면장은 별정직 6급 전체 수는 100명 수준이었다. 경찰서는 서장은 현재와 같이 총경이었고 과장은 경무과장만 경감(6급) 외는 경위(7급)과장, 파출소장은 8급 경사였다. 소방서는 없었고 교육장도 사무관 직제였다.

필자는 1970년 시설원예로 농업인의 삶을 시작하여 76년부터 축산 그리고 85년 읍 상설시장에서 농축산물 유통업의 성과로 1994년 자산 20억(부동산과 현금) 수준으로 대한민국 3% 대의 부를 이루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열심히 살았고 성과도 있었다. 문제는 자본을 마련했으면 자본으로 수익을 얻어야 하는데 이후에도 남해에서 열심히 살고자했다.



■1994년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소련연방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식되었다. 한편 경제개발(제조업)정책의 성과로 국민소득 1만 불로 중진국에 편입되었으며 특히 87-97년까지는 자본 없이도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었고 개천에서 용이 가능했든 마지막 시기였으며 스스로 중산층이 가장 많은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시기였다.

13대 대통령에 취임(1993년)한 김영삼은 미국이 주도하는 WTO체제에 편입하기 위하여 세계화와 국제화를 외치며 금융과 부동산실명제, 지자제를 단행하고 개방을 서둘게 된다. 문제는 지나친 자본시장개방으로 외환위기를 맞아 외부의 압력에 의한 강제 구조조정이 되었다, 그 바탕 위에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며 IT산업을 키우며 세계화에 안착하였다.

전체인구는 4,300만 남해군은 7만, 서울은 700만으로 100배, 아파트는 가락동 32평 1억3천 남해군의 금산빌라 32평도 1억2천으로 같았고 외곽농지는 서울 20만 남해 10만 정도였다. 한데 남해의 60년대 지역유지(부자)는 전멸했는데 서울은 다수의 재벌이 출현하여 비교 불가가 되었다. 참고로 농지가격은 1974년 즉 1차 석유파동 이전은 평당 500원 이하였다.

95년의 화두가 "미래는 기술과 정보화의 시대." 라 했다. 이 땅에서 부의 수단이 토지에서 자본으로 바뀐지 30년인데, 기술과 정보화의 시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어 99년이 되자 뉴 밀레니엄시대의 화두는 "e 시대", 다시 05년이 되자 "u시대"로 바뀌었다. MS창업자 빌케이츠는 "탑이 모바일에 졌다" 며 폰의 시대를 선언하고 은퇴하며 미래가 두렵다 했다.

필자는 94년 이전의 생업을 정리하고 94년 저온 창고(부지 1,600평 건물 700평)를 매입하고 이후 법인을 설립하여 99년 두 번째 사업장(부지 4,000평 건물 700평), 2010년 세 번째 사업장(부지 3,000평 건물 2,200평)을 마련하여(2010년 장부가격으로 자산 130억, 매출 125억) 규모가 됐으며 99년"신지식농업인 장" 2000년"대통령표장"을 수상했다.

06년 흑마늘을 개발(특허 2개)하여 07년부터 상품화하며 흑마늘의 기능성을 인정받아 바이오산업을 목표로 08년 자체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사업비 20억으로 흑마늘 2품목에 대한 성분분석, 전 임상실험, 2011년 전북대에서 임상실험까지 완료하여 상당한 기성이 입증됐는데 문제는 표준화 자료부실로 인증받지 못하고 사업도 멈추니 헛되고 헛된 사업이 되었다.

그리고 복합적인 이유로 2012년 말 기업회생을 신청했고,-이하생략- 결과적으로 2018년, 2019년, 2020년 세 사업장을 경매로 어렵게 매입했다. 한데 헤아려보니 2018년 이후 지방세 1억, 국세 1억, 은행이자 15억가량을 지급했다. 08년 삼성바이오 설립을 준비하든 삼성전자 전무의 바이오산업과 주권매입 권유를 따라야 했었는데, 허 참이다.



2024년 현재와 30년 후 2054년으로 미래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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