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발굴지 밑 삼별초 사적지휴식공간지에 조성된 비
홍성진 선임기자
2024년 08월 30일(금) 10:25
#현 발굴지 밑 삼별초 사적지휴식공간지에 조성된 비

1270년 고려시대 강화도에서 고려 정부가 사실상 몽골에 항복하고 개성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불복 봉기한 삼별초군은 같은 해 6월 강화도를 출발 진도로 남하하였다.

강화에서 봉기했을 때 좌승선에 추대 되었던 유존혁 장군이 일부 삼별초군을 이끌고 남해로 와서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이곳 장군터라고 전해온다.

이 거점은 한때 남해안 일대는 물론 원종 12년 3월에는 마산의 합포와 동래 4월에는 김해까지를 그 세력권 안에 넣을 만큼 활발한 저항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남해의 삼별초군은 해로에 의존했던 정부 세곡의 조운로를 차단 함으로써 국가 재정에 어려움이 극심했는데 장군은 산 위에서 부채질로 지나가는 조운선을 모조리 불러들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271년 5월 삼별초 진도 정부가 함락되자 이 곳의 유존혁 장군은 삼별초군을 배에 나누어 싣고 이곳을 떠나 제주도로 향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삼별초 대몽항쟁과 남해 대장군지 관련 기록

▲「고려사」 권 130. 배중손전: 유존혁은 남해현을 거점으로 삼아 연해를 노략질하다가 반적들이 탐라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도 8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따라갔다.



▲「고려사절요」 권 19. 원종 12년(1271년) 5월: 유존혁이 남해현을 점거하고 연해 지방을 쳐서 노략질하다가, 삼별초가 탐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자 배 80여 척을 거느리고 따라갔다.



▲「문화유적총람 중권, 경상남도」 1977: 임진왜란 당시 의병 훈련지로 전해졌으며, 대장군지라 기록. "옛날 이곳에는 장군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 장군이 도술을 부려 부채로 이 앞을 지나는 조공선을 이곳으로 불러 약탈을 일삼자 조정에서 군사를 풀어 그를 잡으려 하였다. 후략…"이런 전설에 연유하여 이곳을 장군터 혹은 재앙구터라고 부른다.



▲주민 구전 (서면 재앙구터, 삼별초 주둔지)

망운산 아래에 있는 옛날의 큰 건물터인데, 큰 돌로 축대를 쌓은 흔적이 뚜렷하나 수풀에 묻혀 있다. 옛날 힘 쎈 장군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살았는데 앞 바다를 지나는 세곡선을 부채로 부쳐서 해안으로 끌여들여 약탈하므로 나라에서 군사를 풀어 그를 잡고 보니 큰 지네가 되어 주춧돌 밑에 숨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말 삼별초의 항몽 항전에 이름을 떨친 유존혁 장군에 대한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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