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 인터뷰◁ 남해시금치 역사와 함께 해온 박장근 전(前) 상임이사

군민마다, "겨울 남해경제가 도는 이유'남해시금치' 덕분이다"

홍성진 선임기자
2025년 01월 24일(금) 09:53
"그래도 남해는 추운 겨울에도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남해시금치, 보물초가 있어 복받은 곳이다" 가끔 외지 시금치 중매인이나 타지에서 남해로 살려온 주민들에게서 심심찮게 듣는 이야기다. 한겨울 윗지방의 경우 땅이 얼어 노지에서 지을 수 있는 마땅한 농사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남해는 복 받은 곳이라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경기상황이 힘들 때마다 남해시금치는 그 빛을 발한다. 주민들조차 현 경기상황에 그나마 지역경제를 지탱하고 군내시장이 돌아가게 하는 것은 남해에 시금치농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사실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본지는 설 명절을 맞아 남해시금치의 역사 속에 기억해야 할 과거 남해의 상황과 기억에 남겨야 할 인물들을 조명해 남해농업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남해시금치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농가와 농협인, 그리고 공무원들은 지금의 시금치산업을 일으킨 주역으로 거의 모두 과거 서면농협과 유통 및 지도 과장을 역임했던 박장근(68) 전 새남해농협 상임이사와 당시 직원들을 꼽는다. 오래동안 남해농업 취재를 담당해 왔던 필자 또한 여기에 이견은 없다.<편집자 주>


▲ 사양해 오던 인터뷰에 응해 줘 감사하다. 새남해농협에서 지난 2023년 2월 상임이사를 마지막으로 농협을 떠난 것으로 안다. 퇴임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 지금은 고향 서면 회룡마을에서 약 800여평 전답에 의지해 시금치 농사를 짓고 있다. 옳은 농부가 아니라서 현재까지 벌크 100푸대 밖에는 못했다. 습해와는 별개로 옳은 농사라면 보통 350~400개 가량 해야 하는데…이웃 농가에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이웃에서는 한 푸대에 6~7만원 받는데 저는 최고기록이 5만 6000원이다. 앞으로 열심히 농사에 매달리고 싶다. 과거 1979년도에 삼동농협에 발을 디딘 이후 남해농협에서 2년 근무하다 서면농협과 통합된 새남해농협에서 평생 농협맨으로 일했다. 지나고 보니 이 세월만 43년 5개월이다. 이제는 직접 농사를 짓다보니 정말 농사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 남해시금치농사가 활성화되기 전에 남해의 겨울 풍경은 어땠는지.

= 기억하기로는 1996이나 1997년 쯤 과거 서면농협(조합장 심재만)에서 남해 최초로 남해 토종시금치로 농협 산지경매를 시도했었다. 이때를 기준으로 보면 이전에는 시금치 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인데다 산지경매도 활성화되지 않아 겨울철 농가가 따로 할 게 없었다. 주로 마늘 전답을 관리하는 수준이었기에 사실 농가마다 겨울에는 별다른 소득 없이 놀거나 쉬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남해토종시금치를 재배하는 농가는 먹을 만큼 재배하거나 아름 아름 직접 찾아오는 상인한테 일부 파는 정도의 규모였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이 농가소득을 올릴 수 있는 농번기로 변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다.

▲ 1996~1998년 당시 서면농협은 남해 토종시금치의 산지경매 사업을 진행하며 신품종을 찾는 시도도 했다고 하는데.

= 당시 심재만 조합장이 마늘 산지경매시스템을 활용해 토종시금치 산지경매를 시도했지만 정착이 잘 되지 않았다. 농가도 가정에서 먹을 만큼만 심는 정도였고 아름 아름 찾아오는 상인에게 적은 물량을 파는 수준이었기에 활성화가 쉽지 않았다. 특히 토종시금치는 맛은 좋지만 파종해도 수량성이 현저히 떨어져 상품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저는 유통과 지도를 담당하였는데 그래도 일부 농가들은 상인한테 직접 파는 것보다 꾸준히 농협에 내는 게 소득이 낫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토종시금치 산지경매를 위해 직원들은 조합원의 밭을 찾아다니며 물량확보를 위해 순회수집에 나서는 등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이렇게 모은 토종시금치를 사기 위해 몇몇 상인들이 농협 공판장을 찾아왔다. 그렇지만 이들 상인은 대구나 부산에 있는 대상들에게 다시 파는 구조여서 어떻게 보면 유통단계만 늘어난 형태였다. 직원들의 노력으로 물량이 조금씩 늘어나자 농협은 대구나 부산 상인들(나름의 대상)을 산지경매에 참석토록 유도했다. 그러나 토종시금치가 가지는 수량성과 상품성의 한계로 인해 산지경매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때쯤 시금치 종자 갱신사업을 벌였다. 이 시기에 사계절, 유토피아, 무스탕 등으로 시범포를 운용 토종시금치를 대체할 신품종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남해의 토질과 기후에 알맞은 신품종을 찾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별인 결과 농가가 사계절 품종을 선택했다. 남해에서 사계절로 대부분 돌아선 것은 1998년이 기준인 것 같다.

▲ 마늘 대체 작목을 찾는데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가

= 기억하기로는 1990년대 중후반에는 마늘 관세나 우루과이라운드 등으로 마늘 대체작목을 찾아야 했다. 국가나 지자체도 마늘 대체작목 개발을 독려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당시 서면농협은 전국에서 보편화되지 않은 채소 품목을 찾다가 군내 시금치를 주목했다. 특히 남해는 마늘로 인해 산지경매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었기에 채소라 해도 경매를 통해 바로 팔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다행히 순회수집까지 나서며 고생했던 직원들과 농협을 믿고 토종시금치를 내놓았던 농가들로 인해 산지경매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수량성과 상품성을 갖춘 사계절로 품종을 전환하면서부터 농협산지경매가 급격히 살아났다. 농가도 사계절의 수량성과 상품성을 믿고 파종을 급격히 늘려나갔다. 이 과정에서 대구 이남의 큰 상인들을 농협에서 불러들였고 유통도 활성화되었다. 토종시금치뿐 아니라 사계절도 처음에는 단작업을 위주로 했지만 밤잠을 설치는 농가가 많아 차라리 푸대에 담아 내는 벌크출하가 낫겠다 싶어 벌크 출하를 이때쯤 시작하게 됐다.

▲ 95~98년 당시 서면농협 직원들의 노력은 어떠했나.

= 당시 서면농협은 조합장을 중심으로 시금치를 생산과 경매에 관심을 가졌고 대체작목 찾기란 시대적 사명에도 충실했다. 마늘과 마늘종 유통에도 열심히 하던 때였다. 고양유통, 창동유통에 마늘과 마늘종을 납품하던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시금치 유통에도 나설 수 있었다.
1998년 신품종 사계절이 나오기 이전에는 재래종시금치 종자를 농협에서 수매해 종자를 무상으로 농가에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해농산에서 사계절 뿐 아니라 8가지 품종의 시금치를 구해와 서면 예계, 상남, 노구 등지에서 농가와 함께 주로 밭에 시범사업을 벌였다.
당시에는 밭에만 시금치를 파종했는데 지금처럼 시금치를 논에 심기 시작한 것은 사계절이 남해 토양과 기후에 맞아 성공을 거두면서부터다. 이같은 성공도 새벽같이 서면 농가의 전답을 누비며 직접 순회수집하고 전국유통을 뚫기 위해 애써 준 당시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결국 현재의 남해시금치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98년 사계절이 남해의 주력 품종이 되면서부터였고 농협경매시스템에 사계절이 안착되면서부터였다고 생각한다.

▲ 작목반 구성 및 성공에 힘입어 농협마다 생산과 경매에 뛰어든 것으로 안다.

= 당시 서면농협은 1998년 이후 어느 정도 사계절이 안착되자 동시에 시금치 생산 활성화를 위해 작목반을 조직해 나갔다. 기억하기로는 100가구가 넘는 노구마을의 경우 시금치작목반원은 초창기라 20여명도 되지 않았지만 재배기술교육과 수확후 관리 등등의 노력에 힘입어 소득이 향상되자 작목회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이 전 군에 알려지면서 이웃 농가들도 시금치작목반 구성에 나섰고 실제 생산한 시금치들을 서면농협이 사들이기 했다. 점차 농가들이 시금치 생산에 나서자 농협마다 경매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서면농협이 확보해 있던 중매인(상인)들도 대리인을 타 농협에 보내 산지경매를 도왔다. 시금치 생산 관련 남해군도 자재를 공급하는 한편 판로개척에 함께 노력했다. 서면농협을 이어 시금치산지경매에 우선 나선 조합은 동남해농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군내 농협마다 사계절 파종과 시금치산지경매에 전격 나선 것은 2003년부터 2005년 사이인 것으로 기억한다.

▲ 당시 시금치 계약재배와 수도권 판로개척은 산지경매가격을 지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남해에서 시금치 계약재배를 시작한 것은 2002년 쯤으로 기억한다. 사계절 시금치 품종 선택 성공과 작목반 운영, 그리고 농협산지경매라는 시스템 덕분에 남해는 2000년대 초 급속도로 시금치 파종이 늘었고 생산물량도 증가했다. 늘어난 물량만큼 산지경매가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유통망을 뚫어내야만 했다. 아울러 대도시 공급처에 안정적인 물량 공급을 위해서는 계약재배를 통한 물량확보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통상 새로운 작물 시도해 생산뿐 아니라 유통까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당시는 정말로 전 임직원이 시금치산업의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와 생각하면 생산이나 공급에 차질이 있거나 거래처의 횡포가 있었다면 농가손실을 농협이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농가도 농협을 믿고 계약재배에 나서 주었다. 첫 계약재배량은 125톤이었다. 전량 판매에 성공했고 정산시 kg당 630원 정도 산지경매가격보다 좋게 나왔다. 다행이었다. 유통과 관련 기억나는 일은 2002년 경기도 평촌 소재 2001아울렛이라 곳과 연간 일정가격으로 납품계약을 체결하고 완수했다는 것이다. 생산이나 공급에 차질이 있거나 거래처의 횡포를 고민했었다면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 임직원은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손실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산지가격지지를 위해 시금치 물량을 수도권으로 분산시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계약을 체결하고 다함께 열심히 뛴 결과 성공적으로 사업을 완수했다. 이 일이 있은 뒤 농가도 농협의 계약재배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 서면 전체 시금치 생산 물량의 25%에 해당하는 350톤까지 계약재배를 하기도 했다.

▲ 올해는 습해를 입기는 했지만 대목을 앞둔 현재 농가마다 들에 나가면 10kg 벌크로 손주들 용돈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43년 세월의 절반 이상을 남해시금치와 함께 살아왔는데 시금치를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

= 무식해서 용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는 임직원 모두 그 일만이 농가와 농협이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금치를 볼 때마다 당시 현장에서 함께 고생했던 후배들과의 이런저런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농협의 중심축이 된 분들이다. 지면을 빌어 당시 업무상 서운했던 일이 있었다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농가에 바라고 싶은 점은 이분들이 있었기에 농한기 겨울에도 남해는 시금치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는 점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최근 습해로 물량을 다 캔 이웃농가에서 저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이제 캘 실금치가 없으니 어디서 물건을 잊어버린 듯 서운하다는 것이다. 들에 나가면 재미도 있고 돈도 되는 그 시금치가 없으니… 이제 농사를 지어보니 농심(農心)충분히 이해가 된다. 저 또한 열심히 시금치 농사를 짓고 농협경매에 내 시금치를 내는 재미로 산다. 오늘은 우리 시금치가 얼마나 나올지 두근 두근 기다리는 재미는 농사를 짓지 않는 분들은 모른다. 며칠 있으면 고유명절 설날입니다. 군민 모두 새해에는 뜻하는 일 모두 이루는 한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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