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남해로 귀촌한 지 2년, 잊혀져 가는 남해 수제 전통 막걸리 맛 복원이 '꿈'
"양조장이라는 게 다른 업종보다 지역이랑 밀접성이 좀 있는 업종이라고 생각했어요."
"양조장 개업 준비 당시 지역 어르신들이 삼동면에 사라진 '영지 막걸리'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을 많이 이야기하셨거든요."
이태인 기자
2025년 07월 04일(금)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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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푸른 바다와 고즈넉한 풍경 속에 스며든 젊은 에너지가 있다. 삼동면 지족 마을, 이곳에 자리 잡은 '준조양조'는 전통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조범준 대표(32)의 열정과 철학이 담긴 공간이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남해로 귀촌한 지 2년, 그는 잊혀져 가는 전통 막걸리의 맛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지역사회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창업 성공기를 넘어, 젊은 세대가 전통을 계승하고 지역과 상생하는 아름다운 여정을 보여준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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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나눔, 지역 사회에 스며든 막걸리 한 잔
최근 삼동면 경로식당 어르신들을 위해 직접 빚은 수제 막걸리를 기탁하며 지역 사회에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 조범준 대표.
그의 나눔은 특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양조장이라는 업종이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소신에서 우러나온 당연한 일이었다.
"양조장이라는 게 다른 업종보다 지역이랑 밀접성이 좀 있는 업종이라고 생각했어요.
양조장 개업 준비 당시에 지역 어르신들이 삼동면에 사라진 '영지 막걸리'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을 많이 이야기하셨거든요.
그래서 빨리 맛을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소규모 양조장이다 보니 생산량이 부족해서 미처 못 했어요.
이번에 생산량이 좀 늘어나면서 기부하게 됐습니다."어르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영지 막걸리의 그 맛이 느껴진다", "옛날 어머니가 심부름 시켰을 때 받아오던 그 맛이 난다"는 극찬이 쏟아졌다고 한다.
특히 "옛날 어머니가 심부름 시켰을 때"라는 말은 김 대표에게 가장 뜻깊은 칭찬으로 남았다.
이는 단순히 술의 맛을 넘어, 막걸리가 지닌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로서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 준조탁주, 옛것의 재해석과 현대적 기술의 조화
조범준 대표의 '준조탁주'는 기존 막걸리와는 확연히 다른 맛과 질감을 자랑한다. 그는 준조탁주를 '전주(원액)와 거의 흡사하다'고 설명한다. 물을 거의 타지 않아 도수가 높고, '바디감'이라 불리는 걸쭉한 질감이 특징이다.
이는 기존 막걸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옛 막걸리의 진한 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맛이다.
준조양조의 가장 큰 특징은 '옛날 제조 방식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보통 막걸리는 일본식 쌀누룩인 '입국'을 사용하지만, 조 대표는 전통 누룩을 고수한다.
전통 누룩은 자연균을 사용하여 술의 고유한 맛과 향을 내지만, 발효 품질의 편차가 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조 대표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효소와 효모제를 함께 사용한다. 특히 맥주 제조에 사용되는 효모를 탁주 제조에 활용하는 것은 기존에는 없던 방식이다.
"전통 누룩의 고유의 맛과 향은 가져가면서 발효의 편차를 줄이려고 효소와 효모제를 따로 사용하고 있어요. 특히 맥주 효모를 사용하는 건 아예 없던 탁주 제조 방식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통을 고수하되 과학적인 양조로 재해석하는 거죠."이러한 노력은 창업 전 6개월간 오직 제품 개발에만 매달린 결과다. 월세를 내면서도 개업을 미루고 품질 균일화에 집중한 그의 끈기는 '준조탁주'의 독특한 맛과 품질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규모 생산에서 대량 생산으로 넘어오면서 발효 품질의 변동으로 인해 모든 제품을 폐기해야 했던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연구와 노력을 거듭했다.
△ 파리에서 남해까지, 운명 같은 귀촌 이야기
조범준 대표의 남해 귀촌은 다소 이색적이다.
원래 직업은 미용사였고, 프랑스 파리에서 3년간 거주하며 미용 일을 했다.
그러다 귀국을 결심하고 전통주 양조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는 멀리서 지역을 찾을 필요 없이 익숙한 남해를 선택했다.
그의 본가가 삼천포라는 점도 남해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 귀국을 결심하고 전통주 양조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역을 찾고 있었는데, 남해라는 곳이 익숙하고 적합한 지역일 것 같아서 바로 들어오게 됐습니다."그는 프랑스에서 와인을 통해 큰 영감을 받았다.
각 지역마다 와인뿐만 아니라 농산물을 지역민들이 애용하는 모습에서 전통주의 가능성을 엿본 것이다.
우연히 한국에 들어와 전북 순창의 한 양조장에서 막걸리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맛을 경험하면서, 그는 전통주 양조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남해 삼동면 지족 마을에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었다.
처음 남해에 귀촌하여 집을 구했는데, 그곳이 삼동면 고암 마을이었다. 살다 보니 지족 마을이 너무 좋아서 자연스럽게 양조장도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양조장은 지족 마을 구거리의 '우리 식당' 옆 골목으로 들어오면 찾을 수 있다. 외관은 양조장이라기보다는 카페 같은 느낌을 주어, 방문객들이 양조장인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제조 공간을 유리창으로 볼 수 있게 해두어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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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감각으로 전통을 잇다
'준조양조'라는 이름은 조범준 대표의 이름에서 따왔다.
보통 양조장 이름은 지명을 따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젊은 감각으로 전통주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고 싶었다.
"제 양조장의 철학이자 방향성은 제가 젊다 보니 기존 양조장들의 형태를 젊게 바꾸고 싶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전통주에 대한 진입 장벽도 좀 낮추고 싶었고요.
그래서 이름도 지명이 아닌 제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그의 아내 또한 부산에서 남해로 내려와 함께 양조장을 운영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처음부터 함께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조 대표가 먼저 남해에 터를 잡고 아내가 합류하면서 부부가 함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아내가 남해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점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된다.
준조탁주를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은 그 자체로 마시는 것이지만, 걸쭉한 질감이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얼음을 타거나 탄산수와 2:1 비율로 섞어 마시는 방법도 추천한다.
도수가 9.5도로 일반 막걸리(5~6도)보다 높아 벌컥벌컥 마시면 빨리 취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유통기한은 냉장 보관 시 90일로, 살균 처리되지 않은 생막걸리이기 때문에 냉장 보관이 필수다.
△ 지역과의 상생, 그리고 기다림의 미학
조범준 대표의 가장 큰 목표는 '지역과 상생하는 양조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남해의 유자, 단호박, 시금치 같은 특산물 외에도 영세한 농가들과 협업하여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전통주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처음 양조장을 개업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에요. 유자나 단호박, 시금치 같은 작물 외에도 영세한 농가들과 협업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그는 전통주 산업이 전체 주류 시장에서 2%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사양 산업'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이를 꼭 이어서 지켜나가고 싶다고 강조한다.
특히 젊은 층의 막걸리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디자인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특정 세대를 겨냥하기보다는 전체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술을 빚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만의 인생 철학을 깨달았다.
바로 '기다림의 미학'이다. "술을 처음 배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제가 빨리 만들고 싶다고 해서 술이 만들어지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술을 빨리 거르면 맛이 안 날 때도 있어요. 인생도 제가 급급하다고 빨리 결과물을 내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술과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하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을 술 빚는 것에서 배웠습니다."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빚은 술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해주면서도, 아들의 노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지해 주는 든든한 조력자다.
특히 아버지는 자신의 모임에 아들의 술을 처음 들고 갔을 때 좋은 평가를 받아 기분이 좋았다고 전했다.
△ 남해의 매력에 빠지다, 청년 귀촌인의 삶
조범준 대표는 남해에 귀촌한 것을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많다고 말한다. 일을 하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잠시 걸어 나가면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이 그를 위로해 준다. 특히 해 질 녘 노을은 그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다.
"일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받고 그럴 때도 있는데,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로 자연이니까 신기하게도 그런 걸 바로 잊어버릴 수 있게 만들더라고요.
특히 해 질 때 노을이나 이런 걸 보는 점이 정말 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그는 귀촌을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텃세'에 대해서도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했다. 걱정과 달리 남해 주민들은 그에게 예상 밖의 환대를 베풀어 주었다.
현대 사회에서 소실되었다고 여겨지는 '이웃의 정'이 남해에는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청년 부부의 귀촌은 인구 소멸 지역으로 분류되는 남해에 큰 활력이 되고 있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해가 지면 특별히 할 것이 없는 남해의 밤을 위해 낚시를 시도해 볼 생각이라고 한다. 그의 집이 바닷가 바로 앞이라는 점도 낚시에 대한 흥미를 더한다.
△ 남해를 떠올리게 하는 준조탁주에 희망 걸다
조범준 대표는 준조양조 막걸리가 남해를 찾는 관광객이나 다른 지역 소비자들에게 '남해라는 지역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억의 매개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여행의 트렌드가 먹거리 중심으로 바뀌고,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중시하는 요즘, 준조탁주는 남해의 새로운 관광 상품이자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크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지역에서 먹었던 음식이나 술 같은 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준조탁주를 마셨을 때 남해라는 지역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그는 준조양조가 아직 작은 업장이지만, 많은 관심과 함께 전통주 자체에도 많은 관심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젊은 감각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전통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는 조범준 대표의 준조양조이 남해의 미래를 밝히는 하나의 희망찬 빛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