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1899년 남해군읍지, 남해사람들 농사와 길쌈을 숭상,
무예를 익히며, 예스럽고 질박함을 좋아한다고 '기록'
읍명(邑名)으로는 전야산(轉也山), 해양(海陽), 남해(南海)가 기록,
별호로는 전산(轉山), 윤산(輪山), 화전(花田)이 전해진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1월 28일(금) 09:39
▲ 1899년 『경상남도 남해군읍지』에 수록된 남해읍성
▲ 1899년 『경상남도 남해군읍지』에 수록된 남해 금산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와 문화를 기록한 읍지(邑誌)는 한 지역을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일종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읍지는 단순한 지리지에 머무르지 않고, 행정 제도와 풍속, 인물, 조세, 토산물 등 지역의 전모를 두루 담아냈다. 본고(本稿)에서 다루는 『남해군읍지』는 1899년 무렵, 즉 조선 말기 지방제도 개편(1895년) 직후에 편찬된 필사본으로, 남해군의 지리적 조건과 역사, 사회·경제적 상황, 군사·문화적 특징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표제에 '경상남도 남해군'이라 기록된 점은 1896년 경상도(慶尙道)가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로 분리된 직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읍지의 편찬 시점을 가늠하게 한다. 이 읍지는 총 1책 14장(p28)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두에는 남해군의 채색 지도가 실려 있어 당시 지역 인식을 시각적으로 보여 준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 글에서는 1899년 편찬된 『남해군읍지』의 내용을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남해군의 위치와 역사적 연혁, 둘째, 지역사회와 주민의 생활상, 셋째, 자연환경과 특산물, 넷째, 군사·문화와 역사적 유산, 마지막으로 『남해군읍지』의 사료적 의의이다.
이를 통해 남해군의 전반적인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남해 지역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가치 또한 살펴보고자 한다.



△ 남해군의 위치와 역사적 연혁



남해군은 한반도 남쪽 바다에 위치한 섬 지역으로, 읍치(邑治)를 기준으로 동쪽 해안까지는 5리, 서쪽 해안까지는 10리, 남쪽 해안까지는 40리, 북쪽의 노량진(露梁津)까지는 37리가 떨어져 있다.
서울과의 거리는 1,035리였으며, 순영(巡營)과는 400리, 통영과는 220리, 진주부(晉州府)와는 120리, 곤양군과는 80리, 하동군과는 100리의 거리에 있어 교통과 군사적 연결망이 잘 드러난다.
건치연혁(建置沿革)에 따르면, 남해는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신라 신문왕 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경덕왕(재위: 742~765)이 '남해(南海)'라는 이름으로 개칭(757년)하였다.
고려 현종 대에는 현령(縣令)을 두었으나, 공민왕(재위: 1351~1374) 시기 왜구의 침략으로 진주 선천부곡(鐥川部曲)으로 치소를 옮기기도 했다.
조선 태종 때에는 하동과 합쳐 하남현이라 불렸으나, 이후 다시 분리되어 진주 금양부곡을 이속시키면서 하양현(河陽縣)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곧 금양부곡이 다시 진주에 속하게 되면서 본래의 명칭인 남해로 복귀하였다.
세종 때에는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세종 19년(1437)에 분리하여 다시 현령을 두고 다스리게 하였다.
다만 본 읍지 기록은 다른 남해 읍지들과 일부 상이한 점을 보인다.
예컨대 다른 자료에서는 치소를 옮긴 곳을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이라 기록하거나, 하양현을 해양현(海陽縣)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이는 읍지 편찬 과정에서의 전승 차이나 기록 오류의 가능성을 보여 주며, 동시에 지역사 연구에서 교차 검증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읍명(邑名)으로는 전야산(轉也山), 해양(海陽), 남해(南海)가 기록되어 있으며, 별호로는 전산(轉山), 윤산(輪山), 화전(花田)이 전해진다. 이러한 명칭들은 남해의 지리적 특징과 역사적 변천을 반영한다.



△ 남해군의 사회와 생활상



남해군은 속현이 없는 단일 군현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수령으로는 군수(郡守, 종4품) 1인이 파견되었다.
행정구역은 7개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현내면(縣內面), 이동면(二東面),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설천면(雪天面), 고현면(古縣面)이 그것이다.
읍지의 방곡(坊谷) 항목에는 각 면의 명칭과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19세기 말 남해군의 공간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풍속(風俗) 항목에 따르면, 남해 사람들은 농사와 길쌈을 숭상하고, 무예를 익히며, 예스럽고 질박함을 좋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해(南海)가 바닷길 교역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외부와 접촉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농업(農業)과 직조(織造) 같은 전통적 생업을 중시하며 단아한 생활 문화를 유지했음을 보여 준다.
인구와 호구 관련 기록은 읍지의 인물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 1899년 남해군의 총 호수는 3,470호, 인구는 11,361구로 남자 6,188구, 여자 5,173구였다.
이는 1871년 인구 17,335명보다 28년 사이 5,974명이 줄어든 수치이지만, 남해가 작은 고을임에도 상당한 규모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참고로, 1915년부터 서울시 통계 연보에 인구 규모가 공식적으로 수록되기 시작했으며, 이 시점의 서울시 인구는 약 24만 명(241,085명)이었다.
또한 읍지에는 지역 성씨와 효자·효녀·열녀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남해 지역이 충효와 절의를 중시했음을 보여 주며, 당시 사회의 도덕적 지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수령들의 치적을 정리한 '명환치적(名宦治績)' 부분에는 인조 대 남두병(南斗柄)부터 영조 대 김호겸(金好謙)까지 역대 남해군수를 소개하고 있어, 고을 운영의 전통과 행정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자연환경과 특산물



읍지에는 남해의 자연환경과 풍광에 대한 묘사가 풍부하다.
형승(形勝) 항목에는 동쪽에 명산 금산이 소개되어 있다.
금산은 산천이 아름다워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남해를 대표하는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산천 항목에는 고을의 진산(鎭山)인 망운산과 이곳에서 발원하여 동쪽 바다로 흘러드는 대천(大川), 북쪽 곤양으로 건너가는 길목의 노량진(露梁津), 동쪽 진주로 건너가는 지족암진(只簇巖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섬을 넘어 육지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 준다.
도서 항목에는 남해군에 소속된 섬으로는 고을 동쪽의 소도(蘇島, 쇠섬)와 비도(榧島)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해가 다도해의 중심에 위치하며, 여러 부속 도서를 거느린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남해의 토산물로는 낙지, 문어, 전복, 홍합, 해삼, 민어, 굴, 조개, 미역 등 풍부한 해산물이 대표적이다. 또한 후박(厚朴), 세신(細辛), 하수오(何首烏), 우슬(牛膝) 등의 약재도 산출되었다.
이는 남해가 해양 자원과 약재 생산지로서 경제적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환경은 곧 남해 사람들의 생활 기반이 되었으며, 농업과 어업, 약재 채집이 지역 생계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 군사·문화와 역사적 유산
 
남해 충렬사 충무공 가묘
자암 김구 선생 비각비명

 남해는 조선시대 내내 군사적 요충지였다.
 읍지의 성곽 항목에는 남해 읍성의 석축 둘레와 높이, 연혁, 성내 시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평산진(平山鎭), 미조항진(彌助項鎭), 곡포보(曲浦堡), 상주포보(尙州浦堡) 등 군사 거점에 대한 설명이 함께 실려 있다.
 관방(關防) 항목에는 선소(船所), 곡포보, 상주보가 언급되는데, 당시 전선(戰船)과 사후선(伺候船)은 이미 없어졌고, 곡포보와 상주보는 모두 혁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수는 금산(錦山), 원산(猿山), 설흘산(雪屹山, 1871년 영남읍지까지는 雪屹山이 所屹山으로 표기)에 설치되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체계를 보여 준다.
 문화적 측면에서, 학교로는 향교(鄕校)가 있었으며, 역원으로는 덕신역(德新驛)과 노량원(露梁院)이 운영되었다. 불우(佛宇)로는 망운산의 화방사(花芳寺), 망운암(望雲菴), 원산(猿山)의 용문사(龍門寺), 금산의 보리암(普提菴) 등이 기록되어 불교적 전통의 흔적을 보여 준다. 또한 사묘(祠廟)로는 사직단(社稷壇), 성황사(城隍祠,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 여제단(전염병이나 역병 같은 재앙이 돌 때 무주 귀신이나 죽은 귀신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관아에 설치되었던 제단), 충렬사(忠烈祠)가 있었다.
 특히 충렬사는 남해의 상징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관음포(觀音浦) 앞바다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633년(인조 11)에 창건되었으며 1663년(현종 4)에 사액을 받았다.
 읍지에는 충렬사에 봉안된 비문과 관련 문헌도 수록되어 있어, 지역민들이 충무공의 충절을 어떻게 기려왔는지를 알 수 있다.
 고적 항목에는 명나라 장수 장량상(張良相)이 세운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 왜인들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지는 선소왜성(船所倭城)의 천남대(天南臺), 충렬사의 충무공비(忠武公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남해에 유배되었던 자암 김구(金絿)를 기리는 자암선생비각비명(自庵先生碑閣碑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밖에 사실(事實) 항목에는 태종 4년(1404) 남해 읍성이 축조된 후 정이오(鄭以吾)가 쓴 기문이 실려 있어, 남해 읍성의 건축사적 의의를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토지 결수 기록에 따르면, 1898년 무술년 당시 남해군의 전체 토지는 2,645결 49부였으며, 그 중 밭(田)이 1,178결 48부 1속, 논(畓)이 1,467결 9속이었다. 이는 19세기 말 남해 지역 농업 기반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다.


 
△ 1899년 『남해군읍지』의 사료적 의의
 

 1899년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는 19세기 말 남해군의 지리, 역사, 사회, 군사, 문화 등 다양한 측면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이다.
 비록 일부 항목의 체계성이 부족하고 다른 읍지 기록과 상이한 점이 있으나, 이는 오히려 지방행정 실무에서의 기록 관행과 지역적 전승 차이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특히 조세 관련 항목이 소략(疏略)하거나 빠져 있는 점은 당시 조세제도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어, 조세 제도사 연구의 단서를 제공한다.
 1899년 『남해군읍지』는 남해 지역의 자연환경과 생활상을 상세히 전하고, 충렬사와 같은 역사적 기념물에 관한 기록을 통해 민족적 기억을 계승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또한 같은 시기 편찬된 다른 읍지들과의 비교를 통해 19세기 말 조선 사회의 변화상, 지방제도의 운영 방식, 지역사회의 생활 문화를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1899년 『남해군읍지』는 단순한 지리지 차원을 넘어, 지역사 연구와 더불어 조선 말기의 사회·문화적 전환을 조망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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