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바다와 산, 그리고 공동체를 지켜낸 남해의 성곽 이야기 (1)
남해에는 삼국~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23곳의 성곽이 존재
대국산성·임진성·남해장성·금오산성 등은 경남기념물로 지정
남해 성곽의 구조와 재료는
시대와 지형에 따라 달랐고,
출토 유물과 배치를 통해
당시 사회조직과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2월 12일(금) 09:50
성곽(城郭)은 단순한 담장이 아니라 나라와 지역을 지키며 백성의 삶을 품은 공동체의 울타리였다. 남해군에는 삼국~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23곳의 성곽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대국산성·임진성·남해장성·금오산성 등은 경남 기념물로 지정됐다. 성곽의 구조와 재료는 시대와 지형에 따라 달랐고, 출토 유물과 배치를 통해 당시 사회 조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려대장경 판각과 목장 기록에서도 성곽은 전략적 요충이자 백성 생활과 맞닿은 핵심 공간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복원·보존되어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상당수는 훼손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앞서 다룬 10개 성곽을 제외한 13개 성곽을 2회에 걸쳐 소개하며, 각 성곽의 역사적 의미와 건축적 특징,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지역 공동체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성산토성(城山土城), 바다와 역사를 품은 토축산성


남해군 고현면 도마리에 자리한 성산토성(城山土城)은 흙을 다져 쌓은 토축산성(土築山城)으로, 남해도(南海島)의 북쪽만(灣)을 굽어보는 성산 정상부에 축조되었다.
성산토성은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당시 남해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던 전야산군(轉也山郡)의 치소(治所)로 추정된다.
구릉의 최정상을 두른 테뫼식 구조로 축조되었으나, 이후 고현산성의 축조와 경지정리로 인해 성벽 대부분이 훼손되어 오늘날에는 북쪽 성벽 75m 정도만이 남아있다.
비록 남해안은 조망되지 않지만, 남해도와 창선도 주변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이곳이 바다와 긴밀히 연결된 성곽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산토성(城山土城)의 축조 방식은 내외부 기저부에 기단석(基壇石)을 두고, 그 위를 흙과 잔돌, 숯을 섞어 다지는 판축 기법을 사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축성 기법과 성산 남쪽 말단부에 조창지(漕倉址)와 비어내부두(非於乃埠頭)가 자리했던 흔적은 성산토성이 단순한 군사적 요새지(要塞地)를 넘어 행정과 경제적 기능을 함께 담당했음을 보여 준다.
특히 토성이 주위를 조망하기 불리한 위치에 자리했다는 점, 그리고 기단석을 갖춘 판축 방식이 확인된 점은 삼국시대보다는 통일신라시대 성곽의 특징에 가깝다.
이는 사천 선진리토성(船津里土城)과 순천 해룡 산성의 입지 조건과도 유사하여, 성산토성이 통일신라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2018년 해동문화재연구원의 발굴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고현산성(古縣山城) 축조로 인한 훼손에도 불구하고, 성산토성(城山土城)이 내외벽 너비 6.8m, 내벽 높이 2.95m, 외벽 높이 4.85m에 달하는 견고한 판축토성(板築土城)임이 확인되었다.
약 150m가량의 성벽이 남아있으며, 성산토성이 통일신라시대 남해 지역의 행정 치소(治所)이자, 경제적 거점으로 기능했음을 뒷받침하는 유구(遺構)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대국산성이 방어적 배후 산성으로 성격을 달리하게 된 역사적 맥락도 한층 분명해졌다.
오늘날 성산토성은 단순한 흙더미가 아닌, 바다와 육지가 맞닿는 지점에서 삶과 역사를 이어온 사람들의 흔적이다.
무너진 성벽 너머로 스민 세월은 남해의 바다 바람 속에서 여전히 숨 쉬며,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뜻한 울림을 전한다.



△ 남해장성(南海長城), 왜구 방어 아닌 목장성(牧場城)으로 재해석되다



남해장성(南海長城)은 금산(錦山)에서 지족리 수장포와 물건리 대지포에 이르는 구간에 팔(八)자 형태로 축조된 석축(石築) 성곽(城郭)으로,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남해장성은 2005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정밀 조사에서 전체 길이 약 8.7㎞가 확인되었으며, 내벽에는 회곽도를 조성해 사람의 통행이 가능하게 했고, 외벽은 장방형과 부정형 할석을 허튼층쌓기로 올려 견고함을 갖췄다.
이러한 구조와 잔존 상태는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목장성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남해장성의 성격은 『축마비(逐馬碑)』와 『관방성비(關防城碑)』를 통해 드러난다.
1654년 창선에 있던 말을 남해 금산과 동천 곶장으로 옮기자,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고 떠나 황폐해졌다는 기록은 말 사육과 백성 생활의 긴장을 보여 준다.
이어 1655년 봄, 도관찰사의 장계(狀啓)로 말(馬)들이 다시 창선으로 옮겨진 사실은 남해장성이 목장 운영과 밀접히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1705년 세워진 『관방성비』는 남해 일대에 동서 방어망을 갖추고 난포에서 추천까지 이어지는 일자성(一字城), 병사성, 성현보(城峴堡) 등의 시설을 기록하여, 장성이 군사적 목적으로도 임진왜란 때 일시 활용되었음을 전한다.
남해군은 2023~2024년 정밀 지표조사를 통해 남해장성의 잔존 현황과 문화적 가치를 다시 규명했다.
조사 결과, 전체 길이 약 15㎞ 중 5.6㎞가 양호하게 남아있으며, 초기 성격은 목장성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군사적 기능이 덧입혀졌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에 남해군은 성곽의 본래 성격을 반영해 경상남도에 명칭 변경을 신청했고, 심의 끝에 2024년 9월 12일 '남해 금산목장성(錦山牧場城)'으로 정식 명명되었다.
돌과 흙으로 이어진 이 성곽은 단순한 방어선이 아니라 고려인의 삶과 말의 숨결, 그리고 세월을 버텨낸 공동체의 기억을 간직한 역사적 유산이다.
오늘도 바람과 햇살 속에 남해 금산목장성은 묵묵히 서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살아 있는 길이 되고 있다.



△ 금오산성(金鰲山城), 고려 말의 방어유적



남해군 창선면 당항리 금오산(金鰲山, 해발 261m) 정상부에 자리한 금오산성(金鰲山城)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산성(山城)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오산의 9부 능선을 따라 둘러싸인 테뫼식 석축성으로, 창선도의 동쪽 해안과 삼천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다.
가파른 산세로 인해 접근이 쉽지 않으며, 성곽(城郭)에 오르면 남해 북부와 사천, 고성 방면까지 시야가 트인다.
성벽은 얇은 할석(割石)을 무질서하게 쌓아 올린 형태로, 곳곳에 여장(女牆)과 치(雉)가 남아있고, 두 곳의 문지(門址)가 확인되는데 서문(西門)은 폭 4m로 뚜렷하나 남문(南門)은 흔적이 분명치 않다.
남문 안쪽에는 우물이나 연못으로 추정되는 집수시설(集水施設)이 있어 물을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의 2007년 정밀 지표조사 결과, 금오산성(金鰲山城)은 둘레 665m, 남북 150m, 동서 254m의 부정형 평면 구조를 보인다. 성벽은 지형을 따라 북동쪽은 편축(片築), 남동쪽은 협축(夾築) 위주로 쌓았으며 내벽은 허튼쌓기로 처리했다. 내외벽(內外壁)의 두께는 1~2m로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외벽의 잔존 높이는 높이 2~2.5m 내외이다. 성 내부에서는 치성(雉城) 한 곳이 확인되었으며, 북문(北門)은 너비 4m 내외의 개거식(開渠式) 구조로 추정된다.
서문(西門)은 현재 1m가량만 남아있어 암문(暗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내 평탄지 부근에서는 와편(瓦片)이 수습되어, 건물지는 북문(北門) 일대와 성 중심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계곡부(溪谷部)를 막아 물을 가두는 집수시설과 배수로(排水路)가 남아있어 장기간 방어를 위한 생활 기반도 마련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금오산성(金鰲山城)에서 발견된 유물은 대부분 고려 말기의 와편(瓦片)으로, 성(城)의 축조 시기를 고려 말 왜구(倭寇)의 침입 시기로 보고 있다. 삼천포 각산산성(角山山城)과 축조 수법이 유사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비록 성벽은 거칠고 내벽은 허술하게 쌓였지만, 이는 급박한 외적(外敵)의 위협 속에서 신속히 방어 시설을 마련해야 했던 시기적 상황을 반영한다.
오늘날 금오산성은 무너진 돌무더기와 성벽(城壁)만 남아있으나, 그 안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고려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세월에 깎여 남은 성곽의 돌 하나하나가 옛사람들의 치열했던 삶과 간절한 바람을 들려주고 있다.



△ 성담을등산성, 고려의 숨결을 품은 산성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603번지 일대에는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축조된 석축(石築) 산성이 자리한다.
문지(門址)와 치성(雉城) 등 주요 시설이 남아있으며, 성내(城內)에는 생활용 우물도 있어 당시 성민(城民)들의 일상과 방어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군사시설을 넘어, 지역 주민과 행정이 함께 호흡했던 공간임을 보여 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남해현 고적조'에는 「"古縣山城, 在縣北十七里. 石築. 周一千七百四十尺, 高十尺. 재현북십칠리. 석축. 주일천칠백사십척, 고십척."」라 기록되어 있다.
이를 해석하면, 고현산성은 현(縣) 북쪽 17리에 자리하며 돌로 쌓았고, 둘레 1,740척(약 810m, 1포백척=46.66cm), 높이 10척(약 4.7m)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남해의 산과 바다를 품은 이 성곽(城郭)을 바라보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옛 현성(懸城)의 숨결과 그 위에 서 있었을 사람들의 삶이 마음속에 살아 있는 듯하다.
주민들은 이 성(城)을 '오미 재터', '오미등', '대리비산', '성담을등'이라 불러왔으며, 오늘날은 성담을등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은 고현면 소재지 북동쪽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고, 남쪽 약 700m 지점에는 관당성지(官當城址), 1.7km 남동쪽에는 고현성(古縣城), 북동쪽에는 대국산성(大局山城)이 자리하여 서로 방어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남해 북부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보여 준다.
 1999년 실시된 정밀 지표조사에 따르면, 「성담을등산성」은 '오무재등'의 8부 능선을 따라 조성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경사가 급한 곳은 성벽을 두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완만한 경사면에는 석축을 쌓았다.
 성벽은 내탁(內托)과 협축(夾築)이 혼재되어 있으며, 북문지(北門址) 부근 협축부의 너비는 약 4m, 남문지는 약 4.2m로 확인된다. 현재까지 남·북의 문지(門址)가 남아있어 당시 출입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고려시대의 암수 기와와 도기는 옹(甕), 호(壺)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정상부와 남서측 사면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전(田) 603번지에서 다량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그 지형이 평탄하여 건물의 입지로 적합했음을 시사한다.
 성담을등산성은 남해도에서 육지와 가장 가까운 노량리로 통하는 교통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출토 유물과 축성 기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산성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성은 무너진 흔적만 남았지만, 바람에 씻긴 돌 하나, 들꽃 사이에 묻힌 성벽 조각 하나에도 고려의 숨결이 살아 있다.
 성담을등산성은 잊힌 역사의 파편이 아니라, 남해를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꿈을 전하는 조용한 목소리다.
 


△ 전(傳) 관당성지(官堂城址), 고려대장경 판각지의 흔적

 

 남해군 고현면 오곡마을에 위치한 전 관당성지(官堂城址)는 고려시대의 중요한 불교문화 유적지로 주목받고 있다.
 이곳은 대국산(大局山)의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날끝'과 '칠성당끝' 구릉에 둘러싸인 충적지(沖積地)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판각이 이루어진 장소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官堂城 在縣北十七里石築周七百二十尺 高九尺, 관당성 재현북십칠리석축주칠백이십척 고구척"」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현 북쪽 17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다. 둘레 720척, 높이 9척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곧 오늘날 관당마을 성터로 전해지는 위치와도 일치한다.
 또한 『해동지도(海東地圖)』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관당성의 규모가 기록되어 있어 그 실체가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기록은 남해 관당성지가 단순한 지방 성곽이 아닌, 고려 왕조가 불교문화를 집약적으로 구현한 현장이었음을 시사한다.
 2000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조사에서 다량의 청자, 도기편, 와편, 지석 등이 채집되면서 이곳은 성곽으로 보호받는 관청 시설로 추정되었다.
 특히 '관당(官堂)'이라는 지명 자체가 공적 기능을 가진 건물을 가리키는바, 유물의 존속 시기와 고려대장경 조성기의 일치성은 남해분사도감(南海分司都監)이 존재했음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이러한 학술적 배경은 2004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의 시굴 조사로 이어졌다.
 비록 1999년 경지정리 사업으로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고려시대 건물터, 배수로, 폐기장(廢棄場), 매납유구(埋納遺構) 등 주요 유적이 다수 확인되었고 북송대 화폐인 함평원보(咸平元寶)와 '관자명(官字銘)', 명문 와편도 출토되어 공공건물로서의 위상을 더 분명히 보여 주었다.
 남해 관당성지는 고려의 정신적 업적이자 세계적 문화유산인 대장경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성역으로, 단순한 지방 유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 속에는 신앙과 학문, 그리고 고려인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곽의 돌 하나, 기와의 파편 하나가 오랜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속삭인다.
 한 시대를 지탱한 믿음과 염원이 이곳 남해 들녘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기억하자.
 


△ 고현산성(古縣山城), 남해의 옛 현성(懸城)을 품다
 

 남해군 설천면 비란리 정태마을 성산 정상에 위치한 고현산성(古縣山城, 성산성·비란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남해의 현성(縣城)으로 기능한 중요한 석성(石城)이다.
 성산 정상부 동측에 축조된 이 석성은 기존 서측의 토성(土城)을 부분적으로 훼손하며 쌓아 올렸으며, 이전 단계의 토성이 지닌 방어 기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조선 전기까지 치소(治所)가 남해읍으로 이전될 때까지 지역 방어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성(城)의 체성(體城)은 판축식(版築式)으로, 기단석(基壇石)을 한 단씩 차곡차곡 쌓은 뒤, 그 위에 거대한 할석(割石)을 올리고 틈새를 작은 돌로 메워 견고하게 구축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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