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호구총수'와 읍지를 통해 본 조선시대 남해(南海)의 호구 현황
"남해현(南海縣)의 인구 변화 기록은 당대 지방 소읍이
겪었던 격동과 수난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2월 26일(금) 09:24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에 있어 호구총수(戶口總數)와 각종 읍지(邑誌)는 지방 사회의 변화상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특히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의 인구 변화 기록은 당대 지방 소읍이 겪었던 격동과 수난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전국(全國) 인구 통계서인 『호구총수』에 따르면, 당시 남해현은 7개 면(面, 창선면 제외) 90개 리(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원호(元戶)는 4,921호로 기록되어 있다.
총인구(總人口)는 25,949명으로, 남자 12,421명과 여자 13,528명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수치는 1786년 『진주진관지(晋州鎭管志)』에 기록된 남해현 인구 25,791명과 대등한 수준으로, 18세기 후반 남해현의 인구가 정점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1789년 『호구총수』에 기록된 사천(泗川, 삼천포 포함)의 인구 17,562명과 비교할 때, 당시 남해현의 인구 규모가 인접한 사천(泗川)을 크게 상회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789년 『호구총수』의 면별 상세 현황을 살펴보고, 이후 19세기 말까지 남해현의 인구가 어떻게 급격히 감소했는지 사료를 바탕으로 추적함으로써 조선 후기 남해 지역 사회의 단면을 보다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한다.



△ 1789년 『호구총수』에 기록된 남해현 7개 면의 상세 현황
▲ 호구총수 읍내면과 이동면 현황
▲ 호구총수 삼동면, 남면, 서면, 고현면, 설천면 현황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는 남해현 7개 면(당시 창선면은 진주목 관할)의 인구와 호구 현황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어, 각 면의 행정적 규모와 사회적 위상 및 사회적 중요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여기에 제시된 면(面)과 리(里)의 명칭은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 원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의 지명 및 한자 표기법과 다른 경우가 적지 않음을 밝혀둔다.
먼저, 읍내면(邑內面)은 선소리(船所里), 심천리(深川里), 오동방리(梧桐坊里), 아산리(牙山里), 평고개리(平古介里), 금동리(金洞里), 광포리(廣浦里), 평리(坪里), 남산리(南山里), 성내남변리(城內南邊里), 북변리(北변里), 북문외리(北門外里), 성북리(城北里), 유림동리(柳林洞里), 죽산리(竹山里), 입점고개리(笠店古介里), 토촌리(兎村里), 방포리(芳浦里) 등 18개 리로 구성되었으며, 원호 918호에 4,732명의 인구(남: 2,204명, 여: 2,528명)가 거주하고 있었다.
읍내면은 가장 많은 리와 호구 수를 가진 면으로, 현청(縣廳)이 위치한 남해현(南海縣)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였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다른 면에 비해 여성 인구 초과 현상이 비교적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 이동면(二東面)은 다정천리(茶亭川里), 초양지리(草陽地里), 초야동리(草野洞里), 석평리(席坪里), 성현리(城峴里), 신전리(薪田里), 곡포리(曲浦里), 원천리(院川里), 두모포리(豆毛浦里), 양아포리(良阿浦里), 상주포리(尙州浦里)의 11개 리로, 원호 730호에 4,231명의 인구(남: 2,033명, 여: 2,198명)가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읍내면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면이었으며, 상주포리 등 어업과 관련된 포(浦)가 포함되어 있어 농업과 해양 자원을 함께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동면(三東面)은 미조항리(彌助項里), 동천리(凍川里), 금송동리(金松洞里), 시문리(矢門里), 난양지리(蘭陽地里), 난음지리(蘭陰地里)의 6개 리로 구성되었으며, 원호 767호에 4,063명의 인구(남: 1,976명, 여: 2,087명)가 거주하고 있었다. 리(里)의 개수는 남해에서 가장 적었으나 원호 수는 많아 호당 평균 인구 밀도가 높았던 면으로, 미조항리 등 주요 포구를 중심으로 해양 활동이 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면(南面)은 양지변리(陽地邊里), 우형동리(牛形洞里), 당항리(唐項里), 점동리(店洞里), 석교리(石橋里), 순월포리(順月浦里), 물직리(勿直里), 가천리(加川里), 선구미리(船仇味里), 임포리(荏浦里), 유구미리(鍮仇味里), 평산포리(平山浦里), 오리정리(五里程里), 상가화포리(上加火浦里), 하가화포리(下加火浦里)의 15개 리로, 원호 731호에 3,841명의 인구(남: 1,856명, 여: 1,985명)가 기록되어 있다.
남면은 포(浦)와 점(店) 관련 리명(里名)이 다수 보여 농업 외에 상업 및 어업 활동이 혼재되어 나타났음을 시사한다.
서면(西面)은 조방리(鳥坊里), 둔전동리(屯田洞里), 연죽동리(烟竹洞里), 대정자리(大亭子里), 남정자리(南亭子里), 미치동리(尾治洞里), 유점리(柳店里), 포촌리(浦村里), 서상리(西上里), 작장대리(酌長大里), 예계암회리(禮戒巖回里), 염전포리(鹽田浦里), 노구미리(蘆仇味里), 중현리(中峴里), 우물포리, 해치리(蟹峙里) 등 16개 리로 구성되었으며, 원호 666호에 3,279명의 인구(남: 1,575명, 여: 1,704명)가 거주하고 있었다.
리(里)의 개수는 많았으나 인구수는 상대적으로 적어, 리당 평균 인구 규모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둔전(屯田)이나 염전포(鹽田浦) 등의 지명은 군사적 목적의 토지 이용이나 소금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현면(古縣面)은 이어산리(伊於山里), 대곡리(大谷里), 도마산리(都馬山里), 오곡리(五谷里), 어이조리(於伊條里), 남치리(南峙里), 대사동리(大司洞里), 포상리(浦上里), 천동리(泉洞里), 차면리(車面里), 신촌리(新村里), 화옹촌리(火瓮村里), 해촌리(海村里)의 13개 리로, 원호 594호에 3,033명의 인구(남: 1,452명, 여: 1,581명)가 기록되어 있다.
인구와 호구가 하위권에 속하는 면이었으며, 곡(谷)이나 촌(村) 관련 리명(里名)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농촌 마을의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설천면(雪天面)은 노량리(露梁里), 감암회리(甘巖回里), 덕신리(德新里), 사치리(蛇峙里), 왕지포리(王池浦里), 문희리(文希里), 지랑리(旨郞里), 문항리(文巷里), 모노리(慕魯里), 고사천리(古泗川里), 진목정리(眞木亭里), 비어내리(非於乃里)의 12개 리로, 원호 515호에 2,770명의 인구(남: 1,325명, 여: 1,445명)가 거주하고 있었다. 설천면은 7개 면 가운데 원호와 인구가 가장 적었으나, 노량리(露梁里) 등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외부와의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19세기, '인구 절반 감소'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사태
남해군 인구 및 행정 변화

18세기 후반 정조(正祖) 연간에 2만 6천 명에 육박했던 남해현의 인구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계절적 변동이 아니라,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舊韓末)에 이르는 구조적인 사회·경제적 위기가 남해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로 이해된다.
1789년(정조 13년) 남해현 인구는 25,949명이었다. 이로부터 43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년) 『경상도읍지 남해현읍지』에 따르면, 남해현은 7면 87리로 리(里)의 개수가 줄어든 가운데 원호는 3,429호, 인구는 15,634명(남: 7,857명, 여: 7,777명)으로 급감했다.
불과 40여 년 만에 약 10,315명에 이르는 주민, 곧 전체 인구의 40%가 넘는 인구가 감소한 것이다. 이는 세도정치(勢道政治)와 삼정(三政)의 문란, 농민 수탈의 심화, 그리고 연이은 기근과 질병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인구(人口) 감소 추세는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1871년(고종 8년) 『영남읍지 남해현읍지』에는 원호 3,909호, 인구 17,335명(남: 8,689명, 여: 8,646명)이 기록되어 있다.
 1832년에 비해 소폭 증가한 수치이지만, 여전히 1786년 『진주진관지』에 나타난 25,791명과 비교하면 8천 명 이상 감소한 상태였다.
 이는 과도한 세금과 요역을 피해 호구 등록을 꺼리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도망(逃亡) 현상, 그리고 만성적인 자연재해와 흉작으로 인한 사망률 증가가 장기간 누적된 결과였다.
 


△ 구한말(舊韓末)의 인구 격감과 행정구역의 완성 과정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남해현의 인구는 더욱 급격히 줄어들었다.
 1899년(광무 3년) 『남해현읍지』에는 원호 3,470호, 인구 11,361명(남: 6,188명, 여: 5,173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1871년의 17,335명에 비해 불과 28년 만에 5,974명이 추가로 감소한 수치로, 전란과 의병 활동, 외세의 침탈과 국내 사회의 극심한 혼란이 겹친 결과로 이해된다.
 1789년 25,949명이던 남해현의 인구는 1899년에 이르러 11,361명으로 줄어들어, 약 110년 사이 56% 이상 감소하였다.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에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 남해 지역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파괴적이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생산력의 약화와 군역 자원의 축소로 이어졌으며, 나아가 지역 사회를 유지하던 기반 자체를 흔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의 남해군(南海郡)이 지니는 지리적 완결성은 구한말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1906년 9월 28일 이전까지 창선도(昌善島)는 행정구역상 진주목(晉州牧)이었다.
 이날 진주에 속해 있던 창선도가 남해군에 편입되면서 남해군의 행정구역 경계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확정되었다. 진주목 호구총수 자료에 창선도의 정확한 호구(戶口) 현황이 남아 있지 않아 편입 당시의 인구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행정구역 개편은 남해현이 19세기 말 인구 감소라는 위기 속에서도 근대적 행정 체계를 정비해 나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1871년(고종 8년) [영남읍지 남해현읍지]

△ 남해현의 인구 변천에 투영된 지역사의 역동성
 
 789년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록된 남해현 7개 면의 인구는 약 2만 6천여 명으로, 당시 이곳이 비교적 안정된 지역 사회를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19세기 읍지(邑誌)에 나타난 기록은 불과 백 년 만에 주민의 절반 이상이 자취를 감춘 냉혹한 실상을 여실히 방증한다.
 이러한 인구 급감은 중앙 권력의 문란과 지방관의 수탈, 그리고 연이은 자연재해가 맞물려 발생한 구조적 모순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이 기록들을 통해 단순한 통계 수치를 넘어, 당대 남해 사람들이 마주했던 고난과 좌절, 그리고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감내해야 했던 신고(辛苦)의 시간을 읽어낸다.
 비록 쇠락의 시기를 겪었으나, 1906년 창선면을 편입하며 오늘날의 체제를 갖춘 남해군은 역경을 딛고 공동체를 재건해 온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결국 이 문헌들은 남해현의 행정구역과 인구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원천이며, 지역사 연구를 지탱하는 귀중한 토대가 된다.



◆참고: 호구총수(戶口總數)
 

 1789년(정조 13년)에 작성된 호구총수(戶口總數)는 18세기 후반 전국(全國)의 인구 자료(人口資料)를 집계한 통계서로, 필사본의 형식과 편찬 경위로 보아 규장각(奎章閣)에서 편찬(編纂)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성부(漢城府)와 전국 팔도(八道)의 호구 수(戶口數)를 군현별(郡縣別)로 수록하였다.
 본서는 조선 후기 정기적인 호구 조사(戶口調査)를 바탕으로 전국 인구 분포와 지방 행정 구역별 실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유일한 인구 통계 자료로서, 사회·경제사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된다.
 https://kyu.snu.ac.kr/wp-content/nas01/202112/%E6%88%B6%E5%8F%A3%E7%B8%BD%E6%95%B8.pdf /남해미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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