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이념의 프레임을 깨고 4·3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하며
2026년 01월 23일(금)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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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때로는 특정 이념의 프레임 속에 갇혀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 민족의 생존이 걸렸던 격동의 시기, 제주 4·3 사건은 이념의 광풍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물론, 무고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진정한 위로와 보상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민중 항쟁'이라는 단편적인 규정 속에 매몰되어, 국가 수호의 사명을 다했던 젊은 군인의 헌신과 희생이 폄훼되는 비극적인 현실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이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보적인 시각이 4·3 사건을 민중의 고통과 국가폭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면, 보수적인 시각은 남로당의 역할을 강조하고, 사건의 본질을 '대한민국 전복을 위한 공산 무장봉기'로 규정하며 정부의 진압 활동을 국가 수호를 위한 행위로 보고 있다.
특히, 이른바 '4·3위원회'의 보고서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를 외면하고 좌 편향된 시각으로 작성됨으로써, 진실 규명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왜곡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치우친 역사 인식을 바로잡고, 조국을 지키려다 산화한 박진경 대령(당시 중령)의 명예를 회복하며, 4·3 사건의 참된 본질을 재조명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김달삼의 고백과 북한 정권의 공식 인정 : 4·3 사건은 반국가적 폭동이었다
4·3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핵심적인 증거는 바로 무장대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김달삼이 직접 작성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와 「해주 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1948년 8월 25일, 이른바 해주대회 보고용으로 작성한 것이다. 인민유격대의 수장으로서 그가 몸소 겪었던 조직과 작전, 지역별·일자별 투쟁 결과, 국방경비대 9연대와의 연계까지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의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일기 형식의 육필 종합보고서다. 이 내용은 그해 해주에 모인 북한의 최고 지도부 앞에서 "인민 항쟁"이라는 미명하에 상세히 보고되었다.
그는 연설에서 "4월 3일 투쟁에 있어 한림면 여관에 서청 테러단원 7명이 숙박하고 있는 것을 한 청년이 단신 군도(軍刀) 하나를 가지고 맹습하여 15분 이내에 전원을 숙청한 다음 유유히 돌아온 일이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레 언급했다. 또한 "5월 10일에는 단신으로 삼엄한 경계망을 돌파하여 투표장소인 제주읍 사무소에 수류탄 2발을 던져 투표를 불가능하게 한 후 무사히 탈출하여 돌아온 청년도 있다."라며, 무장대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 총선거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을 행사했음을 스스로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처럼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당시 제주 4·3 사건을 획책한 그의 무용담을 중심으로 일기식으로 기록된, 가장 사실과 부합되는 중요한 사료이자, 김달삼 본인의 입에서 직접 대중을 상대로 연설한 고백록이다. 그러므로 4·3 사건은 단순한 '민중 항쟁'이 아닌, 북한 공산주의 세력과 연계된 남로당의 대한민국 건국 저지 투쟁이자 반국가적 폭동이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김달삼이 단순한 무장대 지휘관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 이후의 행적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달삼은 해주대회에서 이 투쟁보고서의 내용을 근거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을 낭독하여 청중의 지지를 받았고, 박헌영, 허헌 등 남로당 거두들과 더불어 35인의 주석단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김달삼이 북한 공산당 내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대한민국의 제헌의원에 해당)으로 선출되었고, 심지어 북한 헌법위원회 위원까지 지명받았다.
북한 정권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사후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묘역에 김달삼의 가묘를 조성하고, 2급 국기훈장을 수여하는 등 극진히 대우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남로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달삼의 제주에서의 활동이 북한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중차대한 전략의 일환이었음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하며, 북한이 4·3 사건의 성격을 '남로당이 기획한 인민유격대의 영웅적인 활동'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1949년 6월 7일, 인민해방군 초대사령관 김달삼에 이어 2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덕구를 제주 화북 지서장 문창송의 작전 지휘 아래 김영주 경사팀이 사살한 후 그의 직속 부하 '양생돌'이 소지하고 있던 증거물로 압수된 것이다. 북한은, 한 번도 평양에 가 본 적 없는 이덕구에게조차 국기훈장 3급과 조국통일상을 추서하고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추모하고 있다. 문창송이 당시 여러 부를 복사하여 돌려보다가 1995년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이란 책을 발간하여 세상에 공개되었고, 당시의 영인본은 현재 '제주 4·3 평화재단'에 보관·전시되어 있는 실재하는 역사적 증거 자료이다.
4·3위원회의 '선택적'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
그럼에도 김대중 정부 때 발족된 '제주 4·3위원회'의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러한 명백한 증거들을 애써 외면하며, 4·3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4·3위원회'가 좌 편향에 치우쳤다는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안들을 보더라도 분명해 보인다. 이는 단순한 지적이 아닌,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표시다.
첫째, 보고서 인적 구성 및 자료 선택의 편향성이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위원회 인적 구성이 특정 이념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편향성은 보고서가 4·3 사건의 자료를 선택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대의명분을 과도하게 부각하고, 김달삼의 북한 내 위상이나 북한의 공식적인 평가와 같은 결정적인 증거들은 의도적으로 누락하거나 축소하는 결과물을 보고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자료를 무시한 '취사선택적' 역사관이 작용되었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무장대 폭력 및 공산주의 개입의 의도적 축소다.
보고서는 무장대의 활동을 주로 '경찰과 서청 테러단원의 탄압에 맞선 저항'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며, 김달삼조차 직접 인정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학살, 그리고 북한과의 연계성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했다. 무장대가 일으킨 민간인 학살 사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군경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국가 공권력이 일방적인 가해자였던 것처럼 묘사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좌익 폭동' 프레임의 의도적 배제와 '민중 항쟁'론 강조다.
4·3위원회가 "4·3 사건은 민중 봉기가 아니고 5.10 선거를 막기 위한 좌익 폭동"이라는 비판을 단호히 부정하고, '좌익 폭동'이라는 프레임을 철저히 배제하며 '민중 항쟁' 또는 '봉기'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한 점은 이념적 균형을 잃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는 반국가적 폭동을 정당화하려는 위험한 시도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1948년 3월 중 순경 전라남도 당부에서 제주도 당부로 '올구' (오르그, 조직책) '이 동무'를 파견하여 무장 반격 지령과 함께 기존에 심어 두었던 국방경비대 프락치는 제주도당에서 직접 지도할 수 있으니 무장 반격에 국방경비대를 최대한으로 동원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해왔다"는 명백한 기록이 있다. 이는 남로당 상부에서 '무장 반격 지령'이 내려왔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러나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는 그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비켜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 대목을 의도적으로 감췄다. 이는 4·3을 제주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독자적인 봉기'라고 접근하기 위한 밑밥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적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또한 소련 스탈린의 직접 지시를 받는 '스티코프'가 기록한 「스티코프 비망록」,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았던 「리베데프의 비망록」 등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북한과 남로당이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남한의 5.10 총선거 반대투쟁을 지시한 내용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일체의 관련성을 배제함으로써 남로당이나 공산 세력의 공작적 기획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는 의도가 엿보이고, 민중 항쟁으로 미화하기 위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황이 여러 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했던 우파 성향의 위원 4명은 4.3 위원회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김익렬 중령 증언의 오류와 역사적 재해석
4·3 사건 초기 '평화적 해결' 노력을 주장하는 측에서 중요한 증거로 내세우는 김익렬 중령의 주장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다. 국제신문 기고문과 사후 출간된 유고집을 보면 사실관계의 오류와 불일치로 인해 객관적인 증거로서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김익렬 중령의 기고문은 1948년 작성되었으나, 유고집은 그로부터 무려 29년이 지난 1977년에 작성된 회고록으로, 기억의 미화와 왜곡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김달삼과의 면담에 대한 진술은 중대한 모순을 드러낸다. 김익렬 중령의 기고문과 유고집은 면담이 상부 명령에 따라 단 한 번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고문은 면담 일자를 4월 30일로, 유고집에서는 돌연 4월 28일로 바꾸며 면담을 '평화회담'으로 묘사하는 변화까지 보인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김달삼이 직접 작성한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김익렬 중령과의 면담이 총 두 차례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만약 상부의 허락 없이 '적장'인 김달삼과 두 차례나 비밀리에 회동했다면, 이는 군법상 적과 내통한 죄로 '총살형 감'에 해당하는 명백한 군율 위반 행위다. 김익렬 중령이 자신의 기록에서 면담 횟수를 축소하고, 면담 성격을 '평화회담'으로 미화하며 일자를 변경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거나, 후대의 평가를 염두에 둔 의도적인 조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서 김달삼은 김익렬로부터 15발의 카빈총 실탄을 공급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1948년 국제신문의 기고문에서는 제주 4·3 사태를 좌익 계열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1988년 사후에 발간된 유고집에서는 '관(官)에 의한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상반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는 4·3 사건의 진실에 접근함에 있어, 특정 인물의 '회고'를 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박진경 대령 : 국가를 위한 고독한 투쟁과 숭고한 희생
박진경 대령은 191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군인의 길을 택했다. 조국 광복을 염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본군 간부로 복무해야 했던 그는 해방 후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건설의 길목에서, 간부로 지원만 하면 될 수도 있었지만, 일본군 간부 경력이 자랑스럽지 못하다며 일반 사병으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북한 공산당과 남로당의 지령 아래, 제주도에서는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이들은 경찰서와 행정기관을 습격하고, 무고한 양민을 무참히 학살하며 대한민국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반국가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박 대령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제9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하며 국가를 수호하는 최전선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혼란과 이념적 대치 속에서 박진경 대령은 무너진 제주도의 치안을 회복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초를 수호하기 위한 막중한 책무를 부여받았다.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이 발생한 것은 통탄할 일이지만, 그 원인을 오직 '진압 작전'에만 돌릴 수는 없다. 무장대가 양민들 속에 숨어들어 '농부이자 반란군' 행세를 했고, 인민유격대의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로 인해 민간인 희생을 가중시켰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다. 박 대령은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국가의 존립을 위해 질서 회복에 나섰으며, 그의 강경 진압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국가의 안위와 체제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실질적으로 박진경 대령이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8일 새벽 남로당 프락치인 부하들의 손에 암살당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순수한 민간인 사망자가 얼마나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의하면, 5월 7일 남로당 중앙당에서 조직 연락책이 급파된다. 그의 지시에 의해 5월 10일 김달삼 측과 국방경비대 프락치가 5인 비밀 회동을 하였고, 이때 이미 박진경 대령에 대한 암살 공모가 논의되었다. 박진경 대령이 부임한 지 불과 4일 뒤였다. 이는 박 대령이 제주에서 본격적인 진압 작전을 펼치기도 전부터 남로당이 위협 인물로 판단하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건 10월 말로, 박 대령 사망 약 넉 달 뒤의 일이다. '4·3 보고서'의 주요 필진이 포함된 제민일보 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 3권에는 '4·3 사건 일지'가 실려 있다. 박 연대장 재임 기간 일지를 분석했더니, 국방경비대가 사살한 무장대는 14명이었고, 경찰과의 합동 토벌 작전까지 더해도 25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좌 편향적 시각을 가진 측의 기록이니 부풀려졌을 리는 만무하다.
월남 파병 용사의 영웅이었던 채명신 장군(당시 소위, 박진경 대령 부대의 소대장)은 "당시 체포된 양민을 포함한 약 4,000명 정도의 포로는 박 대령이 선무 공작의 일환으로 무장대로부터 양민을 분리하고자 작전하여 체포된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미군정 측에서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어 석방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국방부 전신인 '통위부'의 당시 담화내용이나, 각종의 미군 보고서에서는 "6주간의 제주도 작전에서 약 4000명을 체포하여 심문 끝에 약 500명을 구속했다. 작전 중 경비대 사상자는 사망 3명, 중상 2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4·3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사퇴한 나종삼(80) 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 부장은 "박진경 연대장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얘기는 완전히 날조"라면서 "박 연대장을 학살범으로 모는 배후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운 미 군정에 4·3 사건 책임을 돌리는 남로당 사관(史觀)이 있다"고 했다. 박진경 대령의 최후는 그가 바쳤던 헌신의 극점이었다. 1948년 6월,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남로당 프락치인 자신의 부대 부하 일당에게 암살당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확고하게 공산화 세력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키려 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자, 그가 치열하게 싸웠던 적이 누구였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비극적인 순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가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군인을 '강경 진압의 주역'이라는 단편적인 비난으로 매도하는 것은, 그의 숭고한 희생을 모독하고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박진경 대령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나라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제주 4·3 사건'을 순수한 민중 항쟁으로 미화하고 박진경 대령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당시의 복합적인 상황과 남로당 무장대의 반국가적 폭력성을 외면한 채 이념에 경도된 편향된 역사 해석이다. 김달삼의 월북 후 북한 정권으로부터 받은 극진한 대우와 최고위직 임명, 그리고 김달삼 본인과 김익렬 중령의 기록 속에 드러난 명백한 불일치들은 4·3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박진경 대령이 어떤 적과 싸워야 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왜곡된 역사 인식에 맞서 진실을 말할 용기
이제 우리는 냉정한 증거와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박진경 대령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 그의 젊은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이념의 안경을 벗고 왜곡된 역사의 베일을 걷어내고 진실을 바로 세우는 용기 있는 노력이 절실하다. 좌 편향된 역사 인식을 주입하는 '4·3위원회'의 보고서와 같은 시도에 단호히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제주 4·3 사건의 모든 희생자들을 진정으로 애도하고, 다시는 이 땅에 이념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998년 11월 2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 정부는 1948년 제주 4·3사태에 대한 진상은 서로 언제 공개할 방침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은 "제주 문제가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안으로) 국회에 청원 되어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한 뒤,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건국전쟁2'의 또 다른 부제인 "그의 죽음과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도 멈췄습니다"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박진경 대령, 그는 조국을 위해 싸웠던 용감한 군인이자, 해방 후 혼란기를 살아간 남해의 고귀한 아들이었다. 그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경박한 역사의식에 의해 신중치 못한 '서훈 취소'의 지시가 일어나고 이에 절절매는 국가보훈처나 국방부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치는 역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왜곡된 역사에 대한 냉철한 비판적 인식과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서는 용기 있는 역사 인식을 촉구한다.
4·3 당시 남로당의 지휘 아래 자행된 무장 유격대의 만행 중 몇 가지 증언들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4·3 당시 조천리에 살던 1936년생 이월색 여인의 증언에 따르면, 가족이 남로당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8년 11월 10일 아버지, 어머니, 숙부, 9세, 7세, 4세, 3세, 2세 동생들 등 8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습니다. 당시 13세였던 본인도 돼지우리 속에 숨었지만 발각되어 창에 여러 번 찔렸으나 죽은 줄 알고 그들이 떠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남원리에 거주하는 1916년생 정남국은 민보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48년 11월 28일 임신 6개월 된 부인, 10세, 8세, 6세 자식, 25세 누이동생과 그의 자녀 3세, 2세, 1세, 17세 둘째 누이동생, 그리고 집에 같이 살던 외가 쪽 친척 아이 15세 등 10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습니다.」
「4·3 사건 당일 애월면 구엄리에 사는 문숙자 14세와 문정자 10세 자매가 무참히 살해되었고, 구엄리 대동청년단 문기찬은 눈에 곡괭이가 박힌 참혹한 형태로 발견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도종 목사를 생매장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중의 『4·3을 바로 알자』 중에서 발췌)
그러나 이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민중 항쟁'이라는 단편적인 규정 속에 매몰되어, 국가 수호의 사명을 다했던 젊은 군인의 헌신과 희생이 폄훼되는 비극적인 현실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이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보적인 시각이 4·3 사건을 민중의 고통과 국가폭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면, 보수적인 시각은 남로당의 역할을 강조하고, 사건의 본질을 '대한민국 전복을 위한 공산 무장봉기'로 규정하며 정부의 진압 활동을 국가 수호를 위한 행위로 보고 있다.
특히, 이른바 '4·3위원회'의 보고서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를 외면하고 좌 편향된 시각으로 작성됨으로써, 진실 규명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왜곡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치우친 역사 인식을 바로잡고, 조국을 지키려다 산화한 박진경 대령(당시 중령)의 명예를 회복하며, 4·3 사건의 참된 본질을 재조명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김달삼의 고백과 북한 정권의 공식 인정 : 4·3 사건은 반국가적 폭동이었다
4·3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핵심적인 증거는 바로 무장대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김달삼이 직접 작성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와 「해주 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1948년 8월 25일, 이른바 해주대회 보고용으로 작성한 것이다. 인민유격대의 수장으로서 그가 몸소 겪었던 조직과 작전, 지역별·일자별 투쟁 결과, 국방경비대 9연대와의 연계까지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의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일기 형식의 육필 종합보고서다. 이 내용은 그해 해주에 모인 북한의 최고 지도부 앞에서 "인민 항쟁"이라는 미명하에 상세히 보고되었다.
그는 연설에서 "4월 3일 투쟁에 있어 한림면 여관에 서청 테러단원 7명이 숙박하고 있는 것을 한 청년이 단신 군도(軍刀) 하나를 가지고 맹습하여 15분 이내에 전원을 숙청한 다음 유유히 돌아온 일이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레 언급했다. 또한 "5월 10일에는 단신으로 삼엄한 경계망을 돌파하여 투표장소인 제주읍 사무소에 수류탄 2발을 던져 투표를 불가능하게 한 후 무사히 탈출하여 돌아온 청년도 있다."라며, 무장대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 총선거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을 행사했음을 스스로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처럼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당시 제주 4·3 사건을 획책한 그의 무용담을 중심으로 일기식으로 기록된, 가장 사실과 부합되는 중요한 사료이자, 김달삼 본인의 입에서 직접 대중을 상대로 연설한 고백록이다. 그러므로 4·3 사건은 단순한 '민중 항쟁'이 아닌, 북한 공산주의 세력과 연계된 남로당의 대한민국 건국 저지 투쟁이자 반국가적 폭동이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김달삼이 단순한 무장대 지휘관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 이후의 행적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달삼은 해주대회에서 이 투쟁보고서의 내용을 근거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을 낭독하여 청중의 지지를 받았고, 박헌영, 허헌 등 남로당 거두들과 더불어 35인의 주석단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김달삼이 북한 공산당 내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대한민국의 제헌의원에 해당)으로 선출되었고, 심지어 북한 헌법위원회 위원까지 지명받았다.
북한 정권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사후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묘역에 김달삼의 가묘를 조성하고, 2급 국기훈장을 수여하는 등 극진히 대우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남로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달삼의 제주에서의 활동이 북한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중차대한 전략의 일환이었음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하며, 북한이 4·3 사건의 성격을 '남로당이 기획한 인민유격대의 영웅적인 활동'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1949년 6월 7일, 인민해방군 초대사령관 김달삼에 이어 2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덕구를 제주 화북 지서장 문창송의 작전 지휘 아래 김영주 경사팀이 사살한 후 그의 직속 부하 '양생돌'이 소지하고 있던 증거물로 압수된 것이다. 북한은, 한 번도 평양에 가 본 적 없는 이덕구에게조차 국기훈장 3급과 조국통일상을 추서하고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추모하고 있다. 문창송이 당시 여러 부를 복사하여 돌려보다가 1995년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이란 책을 발간하여 세상에 공개되었고, 당시의 영인본은 현재 '제주 4·3 평화재단'에 보관·전시되어 있는 실재하는 역사적 증거 자료이다.
4·3위원회의 '선택적'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
그럼에도 김대중 정부 때 발족된 '제주 4·3위원회'의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러한 명백한 증거들을 애써 외면하며, 4·3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4·3위원회'가 좌 편향에 치우쳤다는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안들을 보더라도 분명해 보인다. 이는 단순한 지적이 아닌,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표시다.
첫째, 보고서 인적 구성 및 자료 선택의 편향성이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위원회 인적 구성이 특정 이념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편향성은 보고서가 4·3 사건의 자료를 선택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대의명분을 과도하게 부각하고, 김달삼의 북한 내 위상이나 북한의 공식적인 평가와 같은 결정적인 증거들은 의도적으로 누락하거나 축소하는 결과물을 보고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자료를 무시한 '취사선택적' 역사관이 작용되었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무장대 폭력 및 공산주의 개입의 의도적 축소다.
보고서는 무장대의 활동을 주로 '경찰과 서청 테러단원의 탄압에 맞선 저항'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며, 김달삼조차 직접 인정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학살, 그리고 북한과의 연계성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했다. 무장대가 일으킨 민간인 학살 사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군경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국가 공권력이 일방적인 가해자였던 것처럼 묘사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좌익 폭동' 프레임의 의도적 배제와 '민중 항쟁'론 강조다.
4·3위원회가 "4·3 사건은 민중 봉기가 아니고 5.10 선거를 막기 위한 좌익 폭동"이라는 비판을 단호히 부정하고, '좌익 폭동'이라는 프레임을 철저히 배제하며 '민중 항쟁' 또는 '봉기'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한 점은 이념적 균형을 잃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는 반국가적 폭동을 정당화하려는 위험한 시도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1948년 3월 중 순경 전라남도 당부에서 제주도 당부로 '올구' (오르그, 조직책) '이 동무'를 파견하여 무장 반격 지령과 함께 기존에 심어 두었던 국방경비대 프락치는 제주도당에서 직접 지도할 수 있으니 무장 반격에 국방경비대를 최대한으로 동원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해왔다"는 명백한 기록이 있다. 이는 남로당 상부에서 '무장 반격 지령'이 내려왔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러나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는 그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비켜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 대목을 의도적으로 감췄다. 이는 4·3을 제주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독자적인 봉기'라고 접근하기 위한 밑밥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적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또한 소련 스탈린의 직접 지시를 받는 '스티코프'가 기록한 「스티코프 비망록」,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았던 「리베데프의 비망록」 등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북한과 남로당이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남한의 5.10 총선거 반대투쟁을 지시한 내용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일체의 관련성을 배제함으로써 남로당이나 공산 세력의 공작적 기획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는 의도가 엿보이고, 민중 항쟁으로 미화하기 위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황이 여러 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했던 우파 성향의 위원 4명은 4.3 위원회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김익렬 중령 증언의 오류와 역사적 재해석
4·3 사건 초기 '평화적 해결' 노력을 주장하는 측에서 중요한 증거로 내세우는 김익렬 중령의 주장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다. 국제신문 기고문과 사후 출간된 유고집을 보면 사실관계의 오류와 불일치로 인해 객관적인 증거로서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김익렬 중령의 기고문은 1948년 작성되었으나, 유고집은 그로부터 무려 29년이 지난 1977년에 작성된 회고록으로, 기억의 미화와 왜곡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김달삼과의 면담에 대한 진술은 중대한 모순을 드러낸다. 김익렬 중령의 기고문과 유고집은 면담이 상부 명령에 따라 단 한 번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고문은 면담 일자를 4월 30일로, 유고집에서는 돌연 4월 28일로 바꾸며 면담을 '평화회담'으로 묘사하는 변화까지 보인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김달삼이 직접 작성한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김익렬 중령과의 면담이 총 두 차례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만약 상부의 허락 없이 '적장'인 김달삼과 두 차례나 비밀리에 회동했다면, 이는 군법상 적과 내통한 죄로 '총살형 감'에 해당하는 명백한 군율 위반 행위다. 김익렬 중령이 자신의 기록에서 면담 횟수를 축소하고, 면담 성격을 '평화회담'으로 미화하며 일자를 변경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거나, 후대의 평가를 염두에 둔 의도적인 조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서 김달삼은 김익렬로부터 15발의 카빈총 실탄을 공급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1948년 국제신문의 기고문에서는 제주 4·3 사태를 좌익 계열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1988년 사후에 발간된 유고집에서는 '관(官)에 의한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상반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는 4·3 사건의 진실에 접근함에 있어, 특정 인물의 '회고'를 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박진경 대령 : 국가를 위한 고독한 투쟁과 숭고한 희생
박진경 대령은 191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군인의 길을 택했다. 조국 광복을 염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본군 간부로 복무해야 했던 그는 해방 후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건설의 길목에서, 간부로 지원만 하면 될 수도 있었지만, 일본군 간부 경력이 자랑스럽지 못하다며 일반 사병으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북한 공산당과 남로당의 지령 아래, 제주도에서는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이들은 경찰서와 행정기관을 습격하고, 무고한 양민을 무참히 학살하며 대한민국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반국가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박 대령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제9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하며 국가를 수호하는 최전선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혼란과 이념적 대치 속에서 박진경 대령은 무너진 제주도의 치안을 회복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초를 수호하기 위한 막중한 책무를 부여받았다.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이 발생한 것은 통탄할 일이지만, 그 원인을 오직 '진압 작전'에만 돌릴 수는 없다. 무장대가 양민들 속에 숨어들어 '농부이자 반란군' 행세를 했고, 인민유격대의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로 인해 민간인 희생을 가중시켰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다. 박 대령은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국가의 존립을 위해 질서 회복에 나섰으며, 그의 강경 진압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국가의 안위와 체제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실질적으로 박진경 대령이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8일 새벽 남로당 프락치인 부하들의 손에 암살당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순수한 민간인 사망자가 얼마나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의하면, 5월 7일 남로당 중앙당에서 조직 연락책이 급파된다. 그의 지시에 의해 5월 10일 김달삼 측과 국방경비대 프락치가 5인 비밀 회동을 하였고, 이때 이미 박진경 대령에 대한 암살 공모가 논의되었다. 박진경 대령이 부임한 지 불과 4일 뒤였다. 이는 박 대령이 제주에서 본격적인 진압 작전을 펼치기도 전부터 남로당이 위협 인물로 판단하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건 10월 말로, 박 대령 사망 약 넉 달 뒤의 일이다. '4·3 보고서'의 주요 필진이 포함된 제민일보 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 3권에는 '4·3 사건 일지'가 실려 있다. 박 연대장 재임 기간 일지를 분석했더니, 국방경비대가 사살한 무장대는 14명이었고, 경찰과의 합동 토벌 작전까지 더해도 25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좌 편향적 시각을 가진 측의 기록이니 부풀려졌을 리는 만무하다.
월남 파병 용사의 영웅이었던 채명신 장군(당시 소위, 박진경 대령 부대의 소대장)은 "당시 체포된 양민을 포함한 약 4,000명 정도의 포로는 박 대령이 선무 공작의 일환으로 무장대로부터 양민을 분리하고자 작전하여 체포된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미군정 측에서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어 석방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국방부 전신인 '통위부'의 당시 담화내용이나, 각종의 미군 보고서에서는 "6주간의 제주도 작전에서 약 4000명을 체포하여 심문 끝에 약 500명을 구속했다. 작전 중 경비대 사상자는 사망 3명, 중상 2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4·3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사퇴한 나종삼(80) 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 부장은 "박진경 연대장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얘기는 완전히 날조"라면서 "박 연대장을 학살범으로 모는 배후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운 미 군정에 4·3 사건 책임을 돌리는 남로당 사관(史觀)이 있다"고 했다. 박진경 대령의 최후는 그가 바쳤던 헌신의 극점이었다. 1948년 6월,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남로당 프락치인 자신의 부대 부하 일당에게 암살당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확고하게 공산화 세력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키려 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자, 그가 치열하게 싸웠던 적이 누구였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비극적인 순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가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군인을 '강경 진압의 주역'이라는 단편적인 비난으로 매도하는 것은, 그의 숭고한 희생을 모독하고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박진경 대령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나라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제주 4·3 사건'을 순수한 민중 항쟁으로 미화하고 박진경 대령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당시의 복합적인 상황과 남로당 무장대의 반국가적 폭력성을 외면한 채 이념에 경도된 편향된 역사 해석이다. 김달삼의 월북 후 북한 정권으로부터 받은 극진한 대우와 최고위직 임명, 그리고 김달삼 본인과 김익렬 중령의 기록 속에 드러난 명백한 불일치들은 4·3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박진경 대령이 어떤 적과 싸워야 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왜곡된 역사 인식에 맞서 진실을 말할 용기
이제 우리는 냉정한 증거와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박진경 대령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 그의 젊은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이념의 안경을 벗고 왜곡된 역사의 베일을 걷어내고 진실을 바로 세우는 용기 있는 노력이 절실하다. 좌 편향된 역사 인식을 주입하는 '4·3위원회'의 보고서와 같은 시도에 단호히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제주 4·3 사건의 모든 희생자들을 진정으로 애도하고, 다시는 이 땅에 이념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998년 11월 2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 정부는 1948년 제주 4·3사태에 대한 진상은 서로 언제 공개할 방침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은 "제주 문제가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안으로) 국회에 청원 되어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한 뒤,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건국전쟁2'의 또 다른 부제인 "그의 죽음과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도 멈췄습니다"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박진경 대령, 그는 조국을 위해 싸웠던 용감한 군인이자, 해방 후 혼란기를 살아간 남해의 고귀한 아들이었다. 그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경박한 역사의식에 의해 신중치 못한 '서훈 취소'의 지시가 일어나고 이에 절절매는 국가보훈처나 국방부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치는 역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왜곡된 역사에 대한 냉철한 비판적 인식과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서는 용기 있는 역사 인식을 촉구한다.
4·3 당시 남로당의 지휘 아래 자행된 무장 유격대의 만행 중 몇 가지 증언들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4·3 당시 조천리에 살던 1936년생 이월색 여인의 증언에 따르면, 가족이 남로당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8년 11월 10일 아버지, 어머니, 숙부, 9세, 7세, 4세, 3세, 2세 동생들 등 8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습니다. 당시 13세였던 본인도 돼지우리 속에 숨었지만 발각되어 창에 여러 번 찔렸으나 죽은 줄 알고 그들이 떠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남원리에 거주하는 1916년생 정남국은 민보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48년 11월 28일 임신 6개월 된 부인, 10세, 8세, 6세 자식, 25세 누이동생과 그의 자녀 3세, 2세, 1세, 17세 둘째 누이동생, 그리고 집에 같이 살던 외가 쪽 친척 아이 15세 등 10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습니다.」
「4·3 사건 당일 애월면 구엄리에 사는 문숙자 14세와 문정자 10세 자매가 무참히 살해되었고, 구엄리 대동청년단 문기찬은 눈에 곡괭이가 박힌 참혹한 형태로 발견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도종 목사를 생매장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중의 『4·3을 바로 알자』 중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