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호국의 성지 남해 관음포, 역사 속 거대한 물줄기를 담다
"관음포와 남해군 일대는 고려대장경판각, 삼별초항쟁, 관음포대첩,
노량해전 등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과 호국 정신이 응축된 역사적 공간"
"남해는 단순한 관광지나 유배지를 넘어, 호국의 성지로서 교육과 연구를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후대에 전승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요충지"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2월 13일(금) 13:43
▲ 전(傳) 선원사지 터와 판각지에 나온 유물

남해군은 오랫동안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 그리고 한적한 유배의 섬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남해가 우리 역사에서 수행한 중요한 역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해는 단순한 관광지나 경승지가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나라의 운명이 걸린 순간마다 핵심에 서 있던 중요한 역사적 요충지였다.
특히 남해 관음포는 호국 역사의 상징성이 응축된 공간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곳은 고려 말 정지(鄭地) 장군이 왜구를 대파한 관음포 대첩의 현장이며, 임란의 마지막 전투인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이 실제로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의 발굴 성과와 학술 연구를 통해 남해가 세계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 판각의 핵심지였음이 시사되고 있으며, 삼별초가 이곳을 지휘 거점으로 삼았다는 연구 결과 역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남해가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 의지와 호국 정신이 집약된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남해는 유배지나 관광지의 이미지를 넘어, 호국 역사와 문화를 품은 성지(聖地)로서의 위상을 새롭게 확립하고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이 글은 관음포를 중심으로 한 여섯 가지 주제를 통해, 남해가 지닌 호국사(護國史)의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더욱 체계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 남해, 고려대장경 판각의 중심지로 다시 주목받다
▲ 전(傳) 선원사지 터와 판각지에 나온 유물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은 고려가 거란과 몽골의 침입에 맞서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호국 의지의 산물이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약 16년에 걸쳐 제작된 이 대장경의 판각지는 그동안 임시수도였던 강화도 선원사가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남해 판각지설이 강력한 근거를 통해 힘을 얻고 있다.
이 주장의 핵심 증거는 대장경 목록인 종경록(宗鏡錄) 권27에서 발견된 "丁未歲 高麗國 分司 南海 大藏都監 開板(정미세 고려국 분사 남해 대장도감 개판)"이라는 명확한 기록이다. 이는 1247년(정미년)에 남해에 설치된 고려국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판각이 이루어졌음을 명시한다.
박상국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등은 '분사'가 본사의 하부 조직이 아닌 개경의 중앙기관과 대등한 성격의 행정 기구를 지방에 나눠 설치하는 고려의 독특한 분사제도였음을 강조하며, 대장경 판각 작업이 남해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주장한다.
또한, 대장경 간행을 주도한 최우의 처남인 정안(鄭安)이 남해로 퇴거하여 개인 재산을 희사하며 간행을 주도했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판각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 선원사지, 백련암지 등 유적과 유물이 관음포 일대에서 잇따라 발굴되면서 남해 판각지설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남해는 몽골 침입에 대한 방어의 이점과 지리산 목재의 공급, 그리고 관음성지로서의 풍부한 불교적 토대를 갖춘 최적의 장소였다고 평가된다.



△ 남해 대장군지, 몽골에 항쟁한 최강 부대 삼별초의 남해 거점
▲ 남해 대장군지 유적 모습

1270년, 몽골과의 화친 및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봉기한 고려 최강의 정예부대 삼별초(三別抄)는 강화도와 진도, 제주도를 거점으로 몽골-고려 연합군에 맞서 최후까지 대몽항쟁을 이어갔다.
최근에는 이 삼별초의 항쟁 범위가 남해안까지 확장되었으며, 남해군이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주목받고 있다. 남해 서면 서호리 망운산 기슭에서 발견된 대장군지(大將軍址) 유적은 삼별초의 주둔지로 강력히 추정된다.
이곳에 전해오는 '대장군 설화'는 조공선을 약탈하는 장군의 이야기로, 삼별초가 남해안 해상로를 장악하고 조운선 탈취를 시도했다는 역사적 기록과 일치한다.
'고려사'는 삼별초의 핵심 지휘부 중 한 명인 유존혁(柳存奕)이 "남해현을 거점으로 하면서 연해 지역을 노략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진도가 함락된 후에는 유존혁이 병력 약 3,000여 명을 이끌고 80여 척의 배에 승선하여 제주도로 합류했다는 기록을 통해 남해 주둔 병력의 규모와 중요도를 짐작하게 한다.
발굴 조사 결과, 대장군지에서 발견된 유물의 시기가 삼별초 항쟁 시기인 13세기와 겹치고 축조 방식이 진도의 용장성(龍藏城)과 유사하다는 학계의 분석은 남해가 서남해안의 해상 교통 요충지이자 조운의 중심지로서 삼별초의 핵심 군사 거점이었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 정지 장군과 관음포, 고려 말 4대 대첩의 현장
▲ 정지 장군의 모습

 관음포(觀音浦)는 임진왜란(壬辰倭亂)보다 200여 년 앞선 고려 말에도 나라를 지킨 역사의 현장이었다. 1383년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정지(鄭地, 1347~1391) 장군이 왜구의 대규모 침략을 대파한 관음포 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최무선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말 4대 대첩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왜구는 큰 배 120여 척에 1만 6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 수군(47척)의 3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정지 장군은 관음포 해역의 복잡한 지형을 활용하여 적을 유인하고, 화포(火砲)를 장착한 함선이 기동하며 적선을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 수군은 적선 17척을 격파하고 2,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정지 장군 스스로 "오늘같이 통쾌한 적이 없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
 『고려사절요』 권32에는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전략〉 적은 이미 남해(南海)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고 기세는 매우 등등하여 사방으로 포위하고 전진하였다. 정지(鄭地) 장군이 진군을 독려하여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20척에 배마다 정예병 140인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공하여 크게 깨뜨리고 적선 17척을 불사르니, 뜬 시체가 바다를 뒤덮었다. 〈후략〉 … "
적이지남해지관음포, 세심치, 사위이진. 정지독진지박두양, 적이대선이십수, 수치경졸백사십인위선봉. 지진공대패지, 분적선십칠수, 부시폐해. 〈후략〉 …」
 관음포 대첩은 화포 기동 전술을 최초로 성공시킨 해전으로 기록되며, 후일 조선 수군의 전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중요한 점은, 정지 장군이 이 승리 직후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왜구의 근거지가 대마도(對馬島)와 이키섬임을 정확히 보고하고, 대마도 정벌을 강력히 건의했다는 사실이다. 이 건의는 이후 1389년 고려의 박위 장군과 1419년 조선 세종 때의 이종무(李從茂) 장군이 실행한 대마도 정벌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왜구의 침략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 이순신바다공원에 있는 이순신 장군상 모습

 노량해전(1598년 12월 19일)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최대 규모의 격렬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통상 노량(露粱) 앞바다에서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주 전장(戰場)은 남해 관음포(觀音浦) 해역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사천 왜성에서 승리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규모 함대는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좁은 노량 해협을 통과하려 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예측하고 명나라 수군과 연합하여 노량에서 적을 저지한 후, 적 함대를 관음포 해역으로 유인하여 포위 섬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관음포에 갇힌 일본군은 퇴로가 완전히 막히자,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조명연합군의 협공과 화력에 의해 200여 척의 적선이 침몰하거나 나포되고 1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노량해전은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조선 침략을 종결시키는 결정타를 날렸지만, 전투 중 이순신 장군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는 슬픈 역사를 남겼다. 장군이 관음포를 최종 전장으로 정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싸운 것은, 왜군을 단호히 격멸하겠다는 그의 강력한 호국 정신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장군의 유해가 육지에 처음 내린 곳인 이락사(李落祠)가 관음포에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은 명실상부 이순신 장군의 순국 성지로 남아 있다.
 


△ 고려대장경 판각 문화의 현대적 재발견
▲고려대장경 판각지의 현대적 재발견 심포지엄(2023.10.13)

 대장경 판각지로 남해군이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목판 인쇄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려는 노력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고려대장경의 제작 과정에는 목공, 제지, 서예, 서각, 인쇄, 제본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이 집약되어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불교 유산을 넘어 고려의 과학 기술력과 장인 정신을 보여주는 총체적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남해군에서는 이러한 판각 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하기 위해 대장경판각문화센터를 건립하고 판각 체험 교실을 운영하는 등 교육과 관광 자원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특히 '고려대장경 판각지의 현대적 재발견' 심포지엄을 통해 학술적 논의를 활성화하고, 판각지 복원 사업을 구체화함으로써 지역 문화를 세계적 유산으로 확장시키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고려대장경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기술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스님이 남해 정림사에 머물며 대장경 판각에 직접 참여했다는 기록은, 남해가 단순한 제작지를 넘어 당시 불교계 명승들이 교류하며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낸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자산을 바탕으로 남해군은 교육과 체험 기능을 갖춘 체류형 관광 모델을 구축하고, 다양한 학술 연구와 문화 프로그램을 연계하여 호국의 성지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러한 종합적 노력이 축적될 때, 국민은 고려대장경과 남해의 역사적 가치를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살아 있는 역사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이는 지역의 정체성과 국가적 문화유산 보존의 의미를 한층 깊이 있게 확립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 관음포(觀音浦),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호국 교육의 현장으로 만들어야

 
 남해군 관음포 일대는 고려대장경, 삼별초, 관음포 대첩, 노량해전에 이르는 천 년 가까운 호국 역사가 입체적으로 응축된 특별한 공간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우리 민족의 결연한 의지와 승리의 기록이며, 관음포가 '호국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음포 대첩이 일어난 해상 지형의 이점, 삼별초가 주둔했던 망운산의 전략적 위치, 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해역 등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은 역사적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들이 동일한 공간에서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은 관음포의 역사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며, 이곳이 단순한 전투의 무대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 속에서 형성된 호국 정신의 집약지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남해 관음포는 옛 유적을 나열하는 데 그치는 공간이 아니라, 현장감 있는 교육과 체험을 통해 우리 민족이 어떻게 국난을 극복하고 조국을 수호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 남해군은 이러한 역사적 무게를 널리 알리고, 다양한 학술 연구와 발굴 조사를 지속하여 '호국의 성지' 관음포의 의미와 가치를 후대에 제대로 전승해야 한다. 더불어 관음포를 중심으로 한 역사·문화 자원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교육·관광과 연계한다면, 모든 국민이 호국 정신을 직접 체감하고 배우는 살아 있는 역사 공간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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