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남해현읍지』 선생안(先生案)이 전하는 200년 지방행정의 기록
약 200년 동안 120여명, 「선생안(先生案)」은 남해를 거쳐 간
이들의 '실패의 기록'조차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적시했다
누가 일을 잘했는지, 누가 탄핵당하고 누가 쫓겨났는지 명확히 기록,
관직이 결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자리가 아님을 후세에 경고했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3월 13일(금)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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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읍지(邑誌)에 수록된 '선생안(先生案)'은 한 고을에 부임했던 수령, 즉 군수·현령·현감의 명단과 그들의 부임 및 이임 월(月)을 기록한 공식적인 인사 명부이다. 이는 단순한 인명 목록이 아니라 지방행정의 흐름과 지역 역사를 보여주는 연대기라 할 수 있다. 1786년(정조 10)에 편찬된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선생안」의 첫 문장에는 "무술년(1598년) 이전의 일은 병란으로 인해 기록을 잃었다(萬曆戊戌以前 因兵亂失記)."라고 적고 있다. 이 짧은 기록은 임진왜란이 남해 지역 행정 기록에 남긴 공백과 전란(戰亂)의 상흔(傷痕)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남해현은 기록을 다시 이어갔다. 1598년 11월 부임한 현령 이종일(李宗一)을 시작으로 1785년 현령 이신경(李身敬)에 이르기까지 약 190년 동안 120여 명 수령의 부임(赴任)과 이임(離任)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언뜻 보면 단순한 명단처럼 보이지만, 이 기록에는 전란 이후 지방행정을 복원하고 지역 사회를 다시 세우려 했던 당시의 노력이 담겨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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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本稿)는 1786년 『남해현읍지』에 수록된 「선생안(先生案)」을 중심으로 남해현 수령 인사의 변천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 기록의 단절을 넘어선 역사의 복원, 1598년의 시작
조선시대 각 고을의 수령 명단인 '선생안(先生案)'은 단순한 성명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그 지역의 통치 책임자가 누구였으며, 그가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를 증명하는 행정의 족보이자 책임의 기록이다.
1786년(정조 10) 편찬된 『남해현읍지』의 선생안(先生案) 조항은 첫머리부터 비장한 문구로 시작된다.
"만력(萬曆) 무술년 이전의 일은 병란(兵亂)으로 인해 기록을 잃어버렸다.(萬曆戊戌以前, 因兵亂失記)."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한 문장은 전란(戰亂)이 휩쓸고 간 남해의 상흔(傷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다.
기록(記錄)이 사라졌다는 것은 과거의 통치 체계가 한때 완전히 붕괴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598년 11월, 노량해전(露粱海戰)의 포성이 막 잦아들 무렵 부임한 이종일(李宗一)을 기점으로 다시 기록의 붓을 들었다.
이는 끊어졌던 행정의 맥을 잇고, 무너진 고을을 다시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786년 『남해현읍지』는 1785년 부임한 현령 이신경(李身敬)에 이르기까지 120여 명의 수령을 촘촘히 기록하며, 조선 후기 남해 지역 행정의 변화 과정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전란의 폐허 속에서 다시 시작된 이 명단은, 단순히 행정적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눈물겨운 사투의 결과물이다.
1598년 11월 부임한 이종일이 마주했을 남해(南海)는 굶주림과 전염병, 그리고 전쟁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땅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기록은 남해가 다시금 국가의 행정망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선포하는 역사적 선언과도 같다.
△ 난세(亂世)의 수습과 파직의 소용돌이, 인사 변천의 민낯
1786년 '선생안'에 기록된 인사 행태를 분석해 보면, 조선 후기 남해현 수령들의 임기가 매우 불안정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령의 법정 임기는 60개월(1800일)이었으나, 실제로 이를 모두 채운 경우는 없었다.
선생안 기록에 따르면, 남해현령 가운데 최장 재임자는 이홍매(李弘邁, 재임: 1707.9.~1710.6.)로 2년 9개월이며, 나머지 현령들의 재임 기간은 대체로 매우 짧았다.
특히 17세기 전반에는 '경파(京罷, 조정의 결정으로 파직)', '계파(啓罷, 임금에게 고하여 파직)', '폄파(貶罷, 좌천이나 강등)' 등의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은 지방 수령의 지위와 권한이 조정과 사헌부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쉽게 변동되었음을 보여주며, 당시 지방행정 체제가 지닌 구조적 불안정성을 잘 드러낸다.
예를 들어, 1603년 계묘년(癸卯年) 한 해에만 김여회(金汝晦), 곽옥(郭玉) 등의 수령이 교체되었다.
어떤 이는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물러났고, 어떤 이는 불과 두 달 만에 자리를 떠났다.
이는 당시 전후(戰後) 복구 과정에서의 행정적 혼란과 당쟁의 여파, 혹은 수령 개인의 역량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상 남해는 중앙 정치의 부침(浮沈)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유배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수령들의 부임과 체임(遞任)은 마치 파도처럼 빈번했다.
이러한 빈번한 교체는 지방행정(地方行政)의 불안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령(守令)이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겪었을 혼란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선생안(先生案)」은 이 '실패의 기록'조차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적시했다.
누가 일을 잘했는지뿐만 아니라, 누가 탄핵당하고 누가 쫓겨났는지를 명확히 기록함으로써, 관직(官職)이 결코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한 자리가 아님을 후세에 경고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관 인사 운영의 실태와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서, 후대 연구자들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다.
△ '분상(奔喪)'과 '사체(辭遞)', 인간적 도리와 공직의 경계
명단에서 눈에 띄게 반복되는 퇴임 사유 중 하나는 '분상(奔喪)'이다. 부모상을 당해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이 표현은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송홍연(宋弘淵, 1600년), 이설(李渫, 1606년), 최정해(崔挺海, 1638년) 등 수많은 수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상(喪)을 치르기 위해 관직을 놓았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사정이 아니라, 유교적 효(孝) 사상과 공직 수행의 책임 사이에서 수령들이 겪어야 했던 고민과 긴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사체(辭遞)' 즉, 스스로 청하여 물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개인적인 질병이나 가족의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척박한 섬 고을의 행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선택한 고육지책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잦은 교체는 행정의 연속성을 저해하는 요소였으나, 동시에 '효(孝)'라는 절대적 가치가 공직 수행보다 우선시되었던 당시 사회의 윤리적 기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분상(奔喪)으로 인한 이임(離任)은 당시 관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백성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가 공직 사회의 대전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행정의 공백은 지역민들에게는 또 다른 짐이 되었을 것이다.
선생안(先生案)은 이처럼 효(孝)라는 개인적 가치와 행정이라는 공적 가치가 충돌하던 현장의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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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송받는 목민관(牧民官)의 선정(善政)과 그 기록
잦은 파직(罷職)과 교체(交替) 기록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이름들이 있다.
선생안은 단순히 부임 및 이임 월(月)만 적지 않고, 특별한 공적이 있는 인물에게는 별도의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
1608년 부임한 박천기(朴天祺)에 대해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能解童蒙)."고 하였고, 1624년 부임한 박제(朴霽)에 대해서는 "도량은 따뜻하고 행실은 은혜로우며 자신의 몸가짐이 얼음처럼 맑다(煖宇惠行 己氷淸)."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선생안은 단순한 관직 변동의 목록이 아니라, 당시 수령들의 덕성과 청렴, 교육적 실천까지 평가하고 기록한 귀중한 역사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1624년 부임한 남두병(南斗柄)이다.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다스림이 가장 훌륭했으며 지금까지 백성들이 추모한다(文武治化居最 至今追慕)."는 극찬과 함께 훗날 통제사(統制使)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소산해(蘇山海, 1659년)는 "정사가 엄격하여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했으나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여 지금까지 추모한다"는 평을 받았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진심으로 아낀 수령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그들의 이름을 선생안이라는 역사적 장부에 '추모(追慕)'라는 단어와 함께 영원히 박제되어었다.
또한 백세전(白世傳, 1689년)에 관한 기록 역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피고 굶주린 이들을 진휼하여 굶어 죽는 이가 한 명도 없게 하니,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다(視民如子 賑恤殘民 無一餓莩 立碑頌德)."고 적혀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려 했던 목민관의 사명감은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공직자가 어떠한 헌신적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 승진과 영전, 남해를 발판으로 도약한 인물들
남해 현령 자리는 때로 영전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1612년 정산뢰(鄭山雷)는 풍천부사로 승천(陞遷)했고, 1644년 박영계(朴永繼)는 곤양군수로, 1659년 이석관(李碩寬)은 초계군수로 영전했다.
특히 이석관에 대해서는 "정사가 맑고 간명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숨죽이고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유능한 관료가 남해에서의 치적을 인정받아 더 큰 고을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18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인사 기록은 더욱 상세해진다.
안윤복(安允福, 1773년)의 경우 "정사가 봄날처럼 화창하고 얼음처럼 맑았다(政若春和 庶如氷淸)."는 평과 함께 "곡식을 사서 구휼에 보태고, 이익을 내어 필요한 곳에 대신 쓰게 하여 은혜가 널리 퍼져 골수에 스미듯 깊이 미쳤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買粟添賑 以牟代需惠 浮浹髓浹世不忘)."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수령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목민관의 행정 능력이 고을의 생존과 직결되었음을 시사한다.
승천(陞遷)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청렴(淸廉)'과 '애민(愛民)'이었다.
남해라는 험지에서 거둔 성과는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이는 비록 변방의 작은 고을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흘린 땀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공직 세계의 정의를 보여준다.
반면, 탐욕을 부리다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파직당한 백시승(白時升, 1716년)의 사례는 대조를 이루며 기록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히 인사의 흥망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청렴과 덕성을 갖춘 위정자(爲政者)의 모범과 잘못된 처신의 결과를 동시에 후세에 경고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 「선생안(先生案)」이 오늘날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
1786년 남해현읍지에 기록된 선생안은 과거의 먼지 쌓인 명단이 아니다. 그것은 공직자의 이름 석 자 뒤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를 숫자로 환산한 기록이다.
약 200년 동안 120여 명, 평균 임기 1.6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남해를 거쳐 간 이들은 누군가에게는 파직(罷職)의 불명예를,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추모(追慕)의 영광을 남겼다.
역사(歷史)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남해현 선생안은 전란으로 잃어버린 과거를 아쉬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는 기록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써 내려간 치열한 행정 보고서다.
1598년 이종일(李宗一)부터 1785년 이신경(李身敬)에 이르기까지, 수령들의 이름 뒤에 붙은 '분상(奔喪)', '계파(啓罷)', '승천(陞遷)', '추모(追慕)'라는 꼬리표는 그들이 남해라는 공간에서 보낸 치열한 시간의 증거다.
또한 선생안은 단순히 임기와 사건만 기록하지 않고, 수령들의 덕성과 공적, 그리고 실패까지 모두 드러냄으로써 당시 지방행정의 현실과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공직자의 책임을 생생히 보여준다.
오늘날의 공직 사회 역시 수많은 명단이 명멸(明滅)한다.
그러나 수백 년 뒤 후세가 기록할 우리 시대의 '선생안(先生案)'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을 것인가. '기록이 사라졌다'는 절망에서 시작해 '잊히지 않는다'는 찬사로 끝나는 이 명단은, 기록하는 자의 준엄함과 기록되는 자의 두려움을 동시에 가르쳐준다.
남해현 선생안은 단순한 인명부를 넘어 조선 후기 지방 행정사의 보고이자, 시대를 막론하고 변치 않는 '공직의 도리'를 묻는 역사의 거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