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허목(許穆)의 남해 유람기(遊覽記), '범해록'에서 남해를 읽다
17세기 석학 허목의 『범해록』, 남해의 역사적 위상과 생태적 경이로움,
소외된 백성들의 삶에 대한 따뜻한 인문주의적 통찰 기록 담겨 있다

발행연월일 : 2026년 03월 27일(금) 13:56
▲ 허목(許穆) 초상 (보물 제1509호)
조선 후기 정계와 학계를 이끈 대표적 인물인 미수(眉수) 허목(許穆, 1595~1682)은 성균관제조, 이조판서, 우의정(右議政)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단순히 남인(南人)의 영수(領袖)라는 정치적 수식어로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예술적 경지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그는 주자학(朱子學)의 경직된 틀에서 벗어나 유학의 본류인 원시 유학을 탐구했으며, 독창적인 '미수체(眉수體)'를 통해 고전의 생명력을 서예로 구현하였다.
1638년 관직의 굴레를 잠시 내려놓고 쓴 그의 『범해록(泛海錄)』은 남해안을 유람하며 창선과 비자당, 금산 등 남해군 일대의 풍광과 소회를 기록한 기행문으로, 시문집 《기언(記言)》 별집에 수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이후 혼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집필된 이 글은 단순한 유람기(遊覽記)를 넘어, 17세기 조선의 지식인이 바라본 남해군의 역사와 생태, 그리고 민생의 모습을 집약한 인문보고서라 할 수 있다.
삼천포에서 출발해 창선과 금산의 절경을 지나 백천사에 이르기까지, 허목의 여정을 따라 그가 발견한 '남해의 진면목'을 일곱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의미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되짚어 본다.



△ 삼천포 앞바다의 달밤과 노량에 흐르는 충혼의 기억


여정(旅程)은 1638년(인조 16) 9월, 서늘한 달빛이 감도는 삼천포(三千浦) 옛 진(舊鎭)에서 시작된다.
허목(許穆)의 이 기록은 단순한 유람을 넘어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간 삶을 함께 성찰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그는 신해일에 옛 삼천진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른 새벽 밀물을 이용해 배를 띄웠다.
바다 위에는 두어 길 높이로 달이 떠 있었고, 잔잔한 물결 위에 부서진 달빛이 신비로운 풍경을 이루었다.
얼마 후 뱃사람이 서쪽을 가리키며, 그곳이 바로 노량해협이라 했다.
그가 바라본 남쪽 해안에 충민사(忠愍祠)가 있고, 그 앞에는 남해대전비가 서 있으며, 북쪽 해안에는 명나라 장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특히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곳에 주둔했다는 이야기는, 이 바다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전쟁과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서 허목이 언급한 충민사는 남해의 충렬사를 인근 여수의 충민사와 혼동해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시선은 이미 풍경을 넘어 역사로 향하고 있다.
그는 옛 주둔지를 떠올리며 전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바다의 긴장감과 구국 영웅들의 숭고한 넋을 기행의 서두에 새겨 넣었다.
이는 단순한 풍경 감상을 넘어 국가의 안위와 역사의 무게를 성찰하는 유학자의 의식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파도 소리 속에서 전사자들의 함성을 듣고, 고요한 수면 위에서 전쟁이 남긴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또한 지명 하나하나에 깃든 유래를 살피며 그것이 단순한 이름이 아닌 민족의 기억임을 강조했다. 노량의 물살은 거칠었으나, 그가 남긴 문장은 유려하면서도 단단했다.
이는 후대 사람들에게 이곳이 단순한 어장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국토의 최전선임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 창선도, 야생의 말 떼가 노니는 생명의 낙원


새벽녘 창선도(昌善島)에 닻을 내리자,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며 별빛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러나 날이 밝고 보니 밤새 보았던 불빛은 별이 아니라 고기잡이배의 횃불이었고, 희미한 안개는 소금 굽는 연기였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뒤섞이며 만들어낸 착시였다. 창선도는 동쪽의 흥선도와 서쪽의 창선도로 나뉘어 있었고, 섬에는 소나무와 산초나무가 무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태복시(太僕寺)에서 감목관(監牧官)을 두어 말을 기르고 있었는데, 이는 국가적 차원의 목축 관리가 이루어지던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밭에는 울타리를 둘러 말[馬]들이 곡식을 해치지 못하도록 했고, 토양은 비옥해 수확도 풍부했다.
허목은 무리를 지어 달리는 말들을 보았다. 그 가운데는 준마(駿馬)가 많았고, 사람들은 그중 신마(神馬)가 있어 때때로 구름과 안개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전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傳說)이라기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품어온 상상력과 경외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는 준마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변방의 섬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生命力)을 포착해 냈으며, 이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중시하는 그의 학문적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또한 목장 주변에 쳐진 울타리를 보며 농경과 목축의 조화를 발견하고, 말[馬]이 곡식을 해치지 않도록 한 섬사람들의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나아가 준마와 신마 같은 말의 종류를 구분해 기록한 점은, 현장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 제암(梯巖)의 단만과 비자당의 애절한 전설


유람의 발길은 제암(梯巖)으로 이어진다. 허목은 이곳에서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배를 집처럼 삼아 살아가며 잠수를 통해 조개를 채취했고, 누더기 옷을 입은 채 가난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당시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그는 이들을 《나충지》에 등장하는 단만에 비유하며 미개하고 변덕스럽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면 이는 낯선 삶을 바라본 당시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이들의 존재를 남김으로써 바다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이 공존하는 삶의 터전임을 보여주었다.
이튿날 그가 찾은 비자당(榧子堂)은 울창한 비자나무 숲과 함께 신라 왕자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었다.
타향에서 생을 마친 왕자가 신(神)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섬사람들에게 위로이자 신앙이 되었고, 그는 이를 위해 '영향신사(迎享神詞)'를 지어 죽은 영혼을 위로했다.
눈앞의 풍경에 머물지 않고 그 뒤에 서린 사연까지 포착해 내는 시선은 지역 설화를 존중하고 기록으로 남기려는 선구적인 민속학적 태도로 읽힌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화려한 조정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제암(梯巖) 사람들의 현실 앞에서 드러나는 그의 성찰이다.
누더기 옷에 의지해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은 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이는 기행문(紀行文) 곳곳에 서글픈 정조(情調)로 배어 있다.
이는 지식인의 책무가 경전을 탐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 속 백성의 삶을 직시하는 데 있음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 금산(錦山)의 선경(仙境), 바위에 새긴 선현들의 자취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금산에 올랐다는 기록은, 조선 후기 학자 허목의 시선이 얼마나 섬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산을 두른 석축은 세월에 묻혀 축조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옛날 이곳에서 말[馬]을 길렀던 흔적으로 짐작되며, 주변에 남아 있는 곡포권관의 보루는 이곳이 지녔던 군사적 기능을 짐작하게 한다.
어스레한 황혼 무렵, 비는 내렸지만, 하늘은 맑았고, 산 아래에서는 귤(橘)나무가 잔잔한 정취를 더했다.
산에 올라 깊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자, 맑은 물과 희게 빛나는 바위들이 어우러지고, 절벽과 깊은 연못이 곳곳에 펼쳐졌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 길이 끊기자, 돌다리를 건너고, 그늘진 벼랑 아래 바윗길을 더듬어 간신히 정상에 오르는 여정은 자연과 마주하는 고된 체험의 과정이었다.
바닷가의 9월 서리는 초목을 시들게 할 만큼 매섭지 않아 잎들은 여전히 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자연의 질서와 계절의 변화를 읽어내는 관찰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산꼭대기에는 봉수대인 연대(烟臺)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단순한 경승지를 넘어, 과거 군사적 소통의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연대 아래 바위에는 "홍문을 지나 금산에 오르다(由虹門上錦山)"라는 글과 함께, 가정 임진년(1532)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일행과 함께 이곳에 올랐음을 기록한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다만 세월의 풍화로 인해 다른 글씨들은 대부분 훼손되어, 그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연대(烟臺) 북쪽에 자리한 층석(層石)은 위가 평평해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으며, 그중 가장 높은 곳은 늘 안개와 노을이 감돌아 '하석대(霞石臺)'라 불린다.
 자연이 빚어낸 이 장관은 금산 정상의 또 다른 절경을 이룬다.
 산 정상 서쪽에는 오래된 사당이 있어, 남해 사람들은 이곳에 성조신사(聖祖神師)를 모시고 무당을 통해 제사를 이어왔다. 이는 자연과 신앙이 결합된 지역 공동체의 전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주변 바다의 풍경 또한 인상적이다.
 검매도(黔魅島) 서쪽 해안은 낮고 습해 바닷물이 흐린 반면, 동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연하도(烟霞島) 바깥으로 나가면 탁한 기운이 미치지 않아, 그 너머에는 따뜻한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경계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아득하지만, 푸른 하늘과 검은 바다의 빛깔이 그 경계를 대신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유람의 묘사를 넘어, 자연과 역사, 그리고 지역 신앙이 어우러진 금산의 입체적 풍경을 오늘날까지 전해준다.
 


▲ 허목의 범해록 전문
▲ 허목의 범해록 전문

△ 보리암의 신비와 제왕의 꿈이 깃든 공간
 

 산정상에서 남쪽으로 석벽을 타고 내려서면 보리암(菩提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허목(許穆)의 『범해록(泛海錄)』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의 기이한 지형과 풍경을 세심하게 기록했다.
 보리암 앞에는 또 하나의 석벽이 솟아 있고, 그 위에는 돌부처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교룡굴(蛟龍窟)과 성음굴(聲音窟)이 이어진다.
 특히 성음굴에 들어가 돌을 두드리자, 북소리처럼 울림이 퍼져 골짜기 전체에 메아리쳤다는 대목은 자연이 빚어낸 신비로운 음향의 세계를 생생히 전한다.
 이 일대에는 '무지개문(虹門)'이라 불리는 바위 통로도 남아 있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바다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이 통로는 자연과 인간의 흔적이 어우러진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더불어 보리암 아래 바위 봉우리 일대는 예로부터 산의 정기가 모인 곳으로 전해지며,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전설 또한 깃들어 있다.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이곳이 단순한 명승을 넘어 신앙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해록』에 나타난 금산의 지명은 오늘날 금산 38경의 명칭과 상이하며, 이 같은 명칭 변천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신사(神祠) 남쪽에 자리한 바위 봉우리, 이른바 사신암(捨身巖) 또는 구정봉(九井峯)은 특히 기이한 형상을 지닌다.
 정상에는 아홉 개의 우물이 자리하고, 짐승이나 새의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기록은 이곳에 대한 신비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 산이 인상적인 이유는 바다 위에 솟아난 지형이 만들어내는 절경에 있다.
 기암괴석이 빚어낸 풍광은 남쪽을 유람한 여러 곳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고 있다. 다만 남해 한가운데 위치한 까닭에 서울과의 거리가 멀고, 섬 특유의 환경으로 벌레와 뱀이 많아 기운 또한 예사롭지 않다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산에서는 삼(蔘)과 복령이 난다는 기록은, 이곳이 지닌 자연의 풍요와 생명력을 함께 전해준다. 이처럼 『범해록』 속 금산과 보리암 일대의 기록은, 절경에 대한 감탄을 넘어 자연·신앙·전설이 어우러진 남해의 다층적인 풍경을 오늘날 독자에게 생생히 전해준다.
 



△ 여정을 마치며: 철쭉 지팡이에 담긴 인연의 무게
 

 유람(遊覽)의 막바지, 성조사(聖祖祠)에서 맞이한 새벽 바다의 폭풍우는 자연의 변덕과 위엄을 동시에 일깨워 준다.
 하산하는 길에 스님 희극(熙克)으로부터 선물 받은 철쭉 지팡이는 산사(山寺)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의 징표가 되었고, 허목은 이에 고시(古詩) 한 수로 화답하며 학자와 승려 사이의 담백한 교유를 마무리한다.
 백천사(百泉寺, 삼천포)에 이르러 여정을 정리하는 그의 뒷모습에는 남해의 풍광뿐 아니라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잊혀가는 역사의 파편들을 기록했다는 자부심이 은은히 배어 있다.
 함께 유람한 이는 숙정(叔挺), 자의(子儀), 운정(雲程), 그리고 소년 김남로(金南老)였으며, 그 가운데 숙정은 바다에서 나오자 곧 자신의 바닷가 별장으로 돌아갔다고 적고 있다.
 『범해록』은 이처럼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우리가 딛고 선 땅과 바다의 내력을 잊지 말라는 17세기 석학(碩學)의 준엄한 메시지로 읽힌다.
 철쭉 지팡이를 짚고 험한 산길을 내려오던 허목의 사유는, 중앙 정계의 복잡한 정쟁을 넘어 남해의 푸른 파도와 그 속에 깃든 백성들의 진솔한 삶이야말로 국가의 진정한 뿌리라는 깨달음에 닿아 있었을 것이다.
 


△ 『범해록』, 스토리텔링으로 여는 지속 가능한 지역 발전
 

 허목(許穆)의 『범해록(泛海錄)』은 단순한 기행문을 넘어 역사와 생태, 민중의 삶을 입체적으로 아우르는 인문학적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대상을 선입견 없이 관찰하고 기록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태도를 견지했으며, 이러한 시선은 오늘날 교육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오늘날 교육은 교실 안의 이론에 머무르기보다, 지역의 산천과 역사, 삶의 현장을 직접 마주하는 체험 중심의 탐구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학생들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고장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애향심을 함양하도록 하는 일은 과거의 기록을 현재의 배움으로 확장하고 미래를 여는 자산으로 전환하는 살아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역 발전과 교육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기 위한 방안으로, 남해의 유휴 자원을 활용한 '미수(眉수) 인문 교육 센터' 설립을 제안할 만하다.
 이곳은 청소년들이 허목의 문장과 필법을 익히고 노량해협과 금산 일대를 답사하며 국토의 역사성과 아름다움을 체득하는 배움의 장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범해록』 여정을 기반으로 한 '인문 로드 투어'를 개발한다면, 역사 체험과 치유 여행을 결합한 새로운 방문 수요도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고전의 기록을 현대적 문화 콘텐츠로 재창조할 때, 남해는 단순한 휴양지를 넘어 지혜가 축적된 '인문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는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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