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선도(一點仙島), 자암(自菴) 김구(金絿)의 적려 유허비에 서다
기묘사화로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자암 김구는 절망의 땅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고, 유배의 한(恨)을 고결한 인문학적 정신으로 꽃피웠다
남해 노량의 적려유허비는 자암 김구의 학문적 절의와 예술혼을 기리는 표상이자,
남해를 유배 문학의 성지(聖地)로 자리매김하게 한 핵심적인 정신사적 상징이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4월 17일(금)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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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배는 생육체와 정신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혹독한 형벌이었다. 그중에서도 '절해고도'라 불린 남해는 수많은 정객(政客)이 유배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그러나 이 땅은 절망에만 머무는 공간은 아니었다. 문신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친 자암 김구(金絿, 1488~1534)는 유배의 한을 학문과 문학으로 승화시키며, 남해를 새로운 인문학 정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이른바 '인수체(仁壽體)'의 거장으로서, 절망(絶望)의 시간을 사색과 창작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고, 유배지에서마저 붓을 놓지 않으며 자신의 학문적·예술적 경지를 더욱 심화시켰다.
본 글은 기묘사화로 남해에 유배된 인수체의 거장 자암 김구 선생이 절해고도 남해에서 유배의 한(恨)을 인문학으로 승화하고, 군신의 정을 넘어 해학과 풍류를 노래했던 삶의 자취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특히 6대손 김만상이 세운 '자암 김 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의 원문을 통해, 그의 생애와 유배 문학이 지니는 정신사적 의의와 문학사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절해고도(絶海孤島) 남해, 유배객의 한(恨)을 인문학으로 승화시키다
유배(流配)는 죄인을 연고 없는 벽지나 외딴섬으로 내치는 형벌이다.
비록 목숨을 직접 빼앗지는 않으나, 질병과 정신적 절망감 속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했던 잔인한 형벌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배 관련 기사가 2만 건이 넘는다는 사실은 당대 사대부들에게 유배가 얼마나 숙명적인 경험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절해고도'라 불린 남해는 수많은 정객이 거쳐 간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보수주인(保授主人)의 감시 속에 의식주조차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사대부들은 무위도식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인문학적 족적을 남겼다.
서포 김만중, 약천 남구만, 소재 이이명 등 남해를 거쳐 간 쟁쟁한 인물 중에서도 그 역사의 서막을 연 이는 바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명필인 자암(自菴) 김구(金絿) 선생이었다.
△ '인수체(仁壽體)'의 거장, 기묘사화의 광풍에 밀려 남해에 들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김구'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거인이 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이 근현대사의 상징이라면, 자암(自菴) 김구(金絿) 선생은 조선 전·중기 도학 정치를 꿈꿨던 개혁의 아이콘이다.
20세에 사마시,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시험관들로부터 "한유(韓愈, 768~824)가 글을 짓고,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글을 쓴 듯하다"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특히 그가 태어난 서울 인수방(仁壽坊)의 이름을 딴 '인수체(仁壽體)'는 중국 사신들조차 탐낼 만큼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안평대군(安平大君), 한석봉(韓錫琫), 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名筆)로 손꼽힌다.
중종(中宗)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에 올랐던 서른두 살의 젊은 자암(自菴)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함께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1519년, 훈구파(勳舊派)가 일으킨 기묘사화(己卯死禍)는 그의 원대한 포부를 꺾어 놓았다.
개령을 거쳐 남해로 이배(移配)되던 날, 진주의 흙탕길에서 길을 잃고 탄식하던 청년 학자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노량 앞바다를 건너 유배지 설천면 노량리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는 고립된 섬 남해의 주민이 되었다.
△ 군신(君臣)의 정을 넘어 해학과 풍류를 노래한 선비
자암(自菴)은 유배 생활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았다.
그는 음률에 밝고 풍류를 아는 선비였다. 일찍이 옥당(玉堂)에서 밤늦게 글을 읽다, 중종과 격의 없이 술잔을 나누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그는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의 다리처럼 길어질 때까지 왕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시조를 읊었다.
이는 단순한 아첨이 아니라, 임금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해학이 담긴 노래였다.
유배지에서도 그의 문학적 성취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남해의 수려한 풍광과 풍속을 목격하고 경기체가 형식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총 6장》을 지었다.
"하늘의 끝, 땅의 변두리, 한 떨기 신선이 사는 섬. 왼쪽은 망운산(望雲山)이고, 오른쪽은 금산(錦山), 봉내와 고내 흐르고, 산천이 기묘하게 뛰어나 호걸과 준사(俊士)들이 모였나니, 인물이 번성했네. 아, 하늘 남쪽 경치가 아름다운 곳의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아, 나까지 몇 분입니까! - 화전별곡 제1장"
그의 노래 속에서 남해는 더 이상 형벌의 땅이 아닌, 망운산과 금산이 어우러진 신선의 섬으로 재탄생했다. 이러한 자암의 정신은 후대 남해 유배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 6대손 김만상(金萬相)이 세운 추모비, 선조의 유덕을 기리다
자암(自菴)이 남해에 남긴 흔적은 세월이 흘러 비석으로 고착되어 역사적 증표로 남아 있다.
숙종 32년(1706년), 당시 남해현령이었던 6대손 김만상(金萬相, 1704.10.~1707.3.)은 선조의 높은 덕행을 기리고자, 김구가 유배 생활을 했던 남해 노량에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를 세웠다.
자암 김구는 남해에서 13년의 유배를 마치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돌아가 1534년(중종 29) 쓸쓸히 생(生)을 마감했다. 비록 유배객의 처지였으나 원망에 머물지 않고 학문과 절의를 지켜낸 그의 삶은 후손의 손을 거쳐 공식적으로 기록되었고, 그 숭고한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비석은 남해 유배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오래된 유적 중 하나다.
비문에는 그가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시를 읊으며 남해의 절경을 찬미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척박한 유배지에서 피어난 그의 학문과 예술혼이 비석이라는 금석문(金石文)을 빌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 노량 바다를 지키는 비석, 유배 문학의 성지를 증언하다
오늘날 남해는 남해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더 이상 외딴섬이 아니다.
그러나 충렬사 입구에 홀로 서 있는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는 이곳이 한때 깊은 고독의 땅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마지막 숨결이 서린 노량 바다와 나란히 자리한 이 비석은 구국의 영웅과 문학적 거목(巨木)이 시공간(視空間)을 초월해 만나는 숭고한 경외감을 선사하고 있다.
전란(戰亂)의 불꽃 속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忠武公)의 강직함과 유배(流配)의 가시밭길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자암(自庵)의 고결함은 이곳 노량의 물길 위에서 하나의 정신으로 맞닿아 있다.
남해군이 '김만중문학상'을 제정하고 유배문학관을 건립하며 '유배 문학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장 먼저 이곳에 유배되어 문학의 씨앗을 뿌린 자암 김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척박한 변방이었던 남해를 시와 학문이 살아 숨 쉬는 문화의 터전으로 일구어낸 진정한 개척자였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추모비 앞에 서면, 절망 속에서도 남해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던 한 선비의 진정한 풍류가 전해진다.
그의 생애는 비록 불운했으나, 그가 남긴 문장과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는 여전히 남해 바다의 푸른 파도 소리와 함께 영원히 울려 퍼지고 있다.
△ 자암 김선생 적려유허추모비 (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 번역
오호라, 이곳은 나의 선조이신 자암 선생이 귀양살이하시던 고을이다.
선생의 6대손인 내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와서 처음으로 선생의 유지를 찾았다.
고을 사람이 그곳을 알려주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선생의 음덕(蔭德)이 이곳 사람들 마음속 깊이 스며있음을 알았으며, 이미 여기저기 돌아보며 사모함과 존경스러움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현인과 군자들이 지나거나 머물러 사시던 곳이라면 그러한 사실들을 분명하게 보여주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하는 법인데, 불초(不肖) 자손이 여기에 와서 어찌 선생의 유적들을 돌보지 않아 그 자취가 길이 전하지 않도록 하겠는가? 그러므로 임피(臨陂)에 유배되셨던 장소나 예산(禮山) 고향 땅에 모두 선생의 서원(書院)이 있으니, 이곳에도 반드시 비(碑)에 새겨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16살 때 한성시에 장원급제하셨고, 약관 20살에 생원과 진사에 모두 급제하니, 시험관이 선생이 쓰신 작품의 시에 쓰기를 "퇴지 한유의 작법이고, 왕희지의 서체(書體)"라고 놀라워했다.
26살 때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니 괴원(槐院, 승정원)을 거쳐 홍문관 정자와 저작 박사가 되시고, 수찬과 교리를 역임하셨으며, 이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간원 사간, 또다시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 직제학을 지내셨다.
사가호당(賜暇湖堂)하셨으며, 이어 부승지로 승직 되었다가 부제학으로 옮겼다.
일찍이 달 밝은 밤 옥당(玉堂)에서 숙직을 하며 독서를 하는데, 중종 임금께서 달빛을 따라 친히 술을 가지고 오셔서 책 읽는 청아한 소리에 이끌려 시가(詩歌)를 읊게 하신 다음 담비 가죽옷을 내려 융숭하게 대우하신 일은 실로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선생과 함께 도의로서 사귀어 서로 마음을 모아 도와 나가며 요순시절과 같은 새 세상을 실현코자 하셨으나 시운(時運)이 불행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나 이 땅 남해에 귀양을 오시니, 일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겁내는데 정작 선생은 화복(禍福)을 개의치 않고 대나무 숲에 작은 집을 지어 시가와 술을 즐기며 한가롭게 지내셨다.
유배오신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계사년(중종 28년, 1533)에 풀려나고, 이듬해인 갑오년에 관직에 다시 오르셨다.
유배하던 중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쳤는데, 마침내 송추(松楸)에 돌아오셔서 추복(追服)을 입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곡을 하니 눈물이 초목을 적셔 다 말라 죽었다.
선생은 홍치 무신년(성종 19년, 1488)에 나시고, 가정 갑오년(중종 29년, 1534)에 세상을 떠나시니, 그때 나이 47살이었다. 만력 신묘년(선조 24년, 1591)에 이조참판에 추증되니, 종계변무(宗系辨誣) 때의 공로 때문이었다.
오호라! 선생의 도덕과 문장은 선생의 행장에 쓰여 있고, 또한 나라의 역사에 등재되어 있어 가히 속일 것이 없어 불초 후손이 짧은 소견으로 보탤 것은 없다.
이제 기묘사화가 지나간 지 188년 만에 이곳에 비를 세우니, 이 어찌 우러러 사모함이 나 혼자만의 사사로운 정이겠는가? 장차 멀고 외딴 시골의 사람들도 추모하고 분발하여 선생의 유적이 여기 있는 것을 잊지 않게 하노라.
숭정 기원후 79년(숙종 32년, 1706) 병술년 3월 6대손 통정대부 행남해현령 만상이 짓고, 후학 통훈대부 전행사헌부장령 김만주가 삼가 썼다.
△ 자암 김구의 문학적 영감, '일점선도(一點仙島) 남해'에 깃들다
자암(自菴) 김구(金絿) 선생이 남긴 유적과 문학은 단순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고립된 섬 남해를 유배 문학의 성지(聖地)로 격상시킨 귀중한 인문학적 자산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라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절망에 굴하지 않고, 독보적인 인수체(仁壽體)와 시문(詩文)을 통해 유배지의 척박함을 예술적 풍류(風流)로 승화시켰다.
특히 그의 작품 《화전별곡(花田別曲)》은 남해의 절경을 찬미하며 변방의 공간을 신선이 사는 이상향(理想鄕)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후대 문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문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706년 노량 바닷가에 세워진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는 시공을 넘어 선생의 고결한 정신과 학문적 열정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비록 마흔일곱의 이른 나이에 생(生)을 마감했으나, 불우한 처지 속에서도 임금을 향한 충절(忠節)과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을 끝내 잃지 않았던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한 이정표로 남아 있다.
결국 자암 김구는 절해고도(絶海孤島) 남해에 인문학(人文學)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다. 그는 이곳 남해를 '한 점 신선의 섬', 곧 '일점선도(一點仙島)'라 예찬하며 고난의 유배지를 다시 찾고 싶은 동경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긴 문학적 향기를 따라 메마른 일상을 성찰하고,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선비의 지조(志操)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의 유덕(遺德)은 푸른 파도와 함께 남해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며, 오늘날 우리에게 삶을 되묻고 세파(世波) 속 길을 밝히는 정신의 이정표로 남아 있다.
본 글은 기묘사화로 남해에 유배된 인수체의 거장 자암 김구 선생이 절해고도 남해에서 유배의 한(恨)을 인문학으로 승화하고, 군신의 정을 넘어 해학과 풍류를 노래했던 삶의 자취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특히 6대손 김만상이 세운 '자암 김 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의 원문을 통해, 그의 생애와 유배 문학이 지니는 정신사적 의의와 문학사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절해고도(絶海孤島) 남해, 유배객의 한(恨)을 인문학으로 승화시키다
유배(流配)는 죄인을 연고 없는 벽지나 외딴섬으로 내치는 형벌이다.
비록 목숨을 직접 빼앗지는 않으나, 질병과 정신적 절망감 속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했던 잔인한 형벌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배 관련 기사가 2만 건이 넘는다는 사실은 당대 사대부들에게 유배가 얼마나 숙명적인 경험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절해고도'라 불린 남해는 수많은 정객이 거쳐 간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보수주인(保授主人)의 감시 속에 의식주조차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사대부들은 무위도식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인문학적 족적을 남겼다.
서포 김만중, 약천 남구만, 소재 이이명 등 남해를 거쳐 간 쟁쟁한 인물 중에서도 그 역사의 서막을 연 이는 바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명필인 자암(自菴) 김구(金絿) 선생이었다.
△ '인수체(仁壽體)'의 거장, 기묘사화의 광풍에 밀려 남해에 들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김구'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거인이 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이 근현대사의 상징이라면, 자암(自菴) 김구(金絿) 선생은 조선 전·중기 도학 정치를 꿈꿨던 개혁의 아이콘이다.
20세에 사마시,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시험관들로부터 "한유(韓愈, 768~824)가 글을 짓고,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글을 쓴 듯하다"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특히 그가 태어난 서울 인수방(仁壽坊)의 이름을 딴 '인수체(仁壽體)'는 중국 사신들조차 탐낼 만큼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안평대군(安平大君), 한석봉(韓錫琫), 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名筆)로 손꼽힌다.
중종(中宗)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에 올랐던 서른두 살의 젊은 자암(自菴)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함께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1519년, 훈구파(勳舊派)가 일으킨 기묘사화(己卯死禍)는 그의 원대한 포부를 꺾어 놓았다.
개령을 거쳐 남해로 이배(移配)되던 날, 진주의 흙탕길에서 길을 잃고 탄식하던 청년 학자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노량 앞바다를 건너 유배지 설천면 노량리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는 고립된 섬 남해의 주민이 되었다.
△ 군신(君臣)의 정을 넘어 해학과 풍류를 노래한 선비
자암(自菴)은 유배 생활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았다.
그는 음률에 밝고 풍류를 아는 선비였다. 일찍이 옥당(玉堂)에서 밤늦게 글을 읽다, 중종과 격의 없이 술잔을 나누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그는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의 다리처럼 길어질 때까지 왕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시조를 읊었다.
이는 단순한 아첨이 아니라, 임금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해학이 담긴 노래였다.
유배지에서도 그의 문학적 성취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남해의 수려한 풍광과 풍속을 목격하고 경기체가 형식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총 6장》을 지었다.
"하늘의 끝, 땅의 변두리, 한 떨기 신선이 사는 섬. 왼쪽은 망운산(望雲山)이고, 오른쪽은 금산(錦山), 봉내와 고내 흐르고, 산천이 기묘하게 뛰어나 호걸과 준사(俊士)들이 모였나니, 인물이 번성했네. 아, 하늘 남쪽 경치가 아름다운 곳의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아, 나까지 몇 분입니까! - 화전별곡 제1장"
그의 노래 속에서 남해는 더 이상 형벌의 땅이 아닌, 망운산과 금산이 어우러진 신선의 섬으로 재탄생했다. 이러한 자암의 정신은 후대 남해 유배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 6대손 김만상(金萬相)이 세운 추모비, 선조의 유덕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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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自菴)이 남해에 남긴 흔적은 세월이 흘러 비석으로 고착되어 역사적 증표로 남아 있다.
숙종 32년(1706년), 당시 남해현령이었던 6대손 김만상(金萬相, 1704.10.~1707.3.)은 선조의 높은 덕행을 기리고자, 김구가 유배 생활을 했던 남해 노량에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를 세웠다.
자암 김구는 남해에서 13년의 유배를 마치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돌아가 1534년(중종 29) 쓸쓸히 생(生)을 마감했다. 비록 유배객의 처지였으나 원망에 머물지 않고 학문과 절의를 지켜낸 그의 삶은 후손의 손을 거쳐 공식적으로 기록되었고, 그 숭고한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비석은 남해 유배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오래된 유적 중 하나다.
비문에는 그가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시를 읊으며 남해의 절경을 찬미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척박한 유배지에서 피어난 그의 학문과 예술혼이 비석이라는 금석문(金石文)을 빌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 노량 바다를 지키는 비석, 유배 문학의 성지를 증언하다
오늘날 남해는 남해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더 이상 외딴섬이 아니다.
그러나 충렬사 입구에 홀로 서 있는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는 이곳이 한때 깊은 고독의 땅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마지막 숨결이 서린 노량 바다와 나란히 자리한 이 비석은 구국의 영웅과 문학적 거목(巨木)이 시공간(視空間)을 초월해 만나는 숭고한 경외감을 선사하고 있다.
전란(戰亂)의 불꽃 속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忠武公)의 강직함과 유배(流配)의 가시밭길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자암(自庵)의 고결함은 이곳 노량의 물길 위에서 하나의 정신으로 맞닿아 있다.
남해군이 '김만중문학상'을 제정하고 유배문학관을 건립하며 '유배 문학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장 먼저 이곳에 유배되어 문학의 씨앗을 뿌린 자암 김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척박한 변방이었던 남해를 시와 학문이 살아 숨 쉬는 문화의 터전으로 일구어낸 진정한 개척자였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추모비 앞에 서면, 절망 속에서도 남해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던 한 선비의 진정한 풍류가 전해진다.
그의 생애는 비록 불운했으나, 그가 남긴 문장과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는 여전히 남해 바다의 푸른 파도 소리와 함께 영원히 울려 퍼지고 있다.
△ 자암 김선생 적려유허추모비 (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 번역
오호라, 이곳은 나의 선조이신 자암 선생이 귀양살이하시던 고을이다.
선생의 6대손인 내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와서 처음으로 선생의 유지를 찾았다.
고을 사람이 그곳을 알려주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선생의 음덕(蔭德)이 이곳 사람들 마음속 깊이 스며있음을 알았으며, 이미 여기저기 돌아보며 사모함과 존경스러움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현인과 군자들이 지나거나 머물러 사시던 곳이라면 그러한 사실들을 분명하게 보여주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하는 법인데, 불초(不肖) 자손이 여기에 와서 어찌 선생의 유적들을 돌보지 않아 그 자취가 길이 전하지 않도록 하겠는가? 그러므로 임피(臨陂)에 유배되셨던 장소나 예산(禮山) 고향 땅에 모두 선생의 서원(書院)이 있으니, 이곳에도 반드시 비(碑)에 새겨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16살 때 한성시에 장원급제하셨고, 약관 20살에 생원과 진사에 모두 급제하니, 시험관이 선생이 쓰신 작품의 시에 쓰기를 "퇴지 한유의 작법이고, 왕희지의 서체(書體)"라고 놀라워했다.
26살 때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니 괴원(槐院, 승정원)을 거쳐 홍문관 정자와 저작 박사가 되시고, 수찬과 교리를 역임하셨으며, 이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간원 사간, 또다시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 직제학을 지내셨다.
사가호당(賜暇湖堂)하셨으며, 이어 부승지로 승직 되었다가 부제학으로 옮겼다.
일찍이 달 밝은 밤 옥당(玉堂)에서 숙직을 하며 독서를 하는데, 중종 임금께서 달빛을 따라 친히 술을 가지고 오셔서 책 읽는 청아한 소리에 이끌려 시가(詩歌)를 읊게 하신 다음 담비 가죽옷을 내려 융숭하게 대우하신 일은 실로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선생과 함께 도의로서 사귀어 서로 마음을 모아 도와 나가며 요순시절과 같은 새 세상을 실현코자 하셨으나 시운(時運)이 불행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나 이 땅 남해에 귀양을 오시니, 일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겁내는데 정작 선생은 화복(禍福)을 개의치 않고 대나무 숲에 작은 집을 지어 시가와 술을 즐기며 한가롭게 지내셨다.
유배오신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계사년(중종 28년, 1533)에 풀려나고, 이듬해인 갑오년에 관직에 다시 오르셨다.
유배하던 중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쳤는데, 마침내 송추(松楸)에 돌아오셔서 추복(追服)을 입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곡을 하니 눈물이 초목을 적셔 다 말라 죽었다.
선생은 홍치 무신년(성종 19년, 1488)에 나시고, 가정 갑오년(중종 29년, 1534)에 세상을 떠나시니, 그때 나이 47살이었다. 만력 신묘년(선조 24년, 1591)에 이조참판에 추증되니, 종계변무(宗系辨誣) 때의 공로 때문이었다.
오호라! 선생의 도덕과 문장은 선생의 행장에 쓰여 있고, 또한 나라의 역사에 등재되어 있어 가히 속일 것이 없어 불초 후손이 짧은 소견으로 보탤 것은 없다.
이제 기묘사화가 지나간 지 188년 만에 이곳에 비를 세우니, 이 어찌 우러러 사모함이 나 혼자만의 사사로운 정이겠는가? 장차 멀고 외딴 시골의 사람들도 추모하고 분발하여 선생의 유적이 여기 있는 것을 잊지 않게 하노라.
숭정 기원후 79년(숙종 32년, 1706) 병술년 3월 6대손 통정대부 행남해현령 만상이 짓고, 후학 통훈대부 전행사헌부장령 김만주가 삼가 썼다.
△ 자암 김구의 문학적 영감, '일점선도(一點仙島) 남해'에 깃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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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自菴) 김구(金絿) 선생이 남긴 유적과 문학은 단순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고립된 섬 남해를 유배 문학의 성지(聖地)로 격상시킨 귀중한 인문학적 자산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라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절망에 굴하지 않고, 독보적인 인수체(仁壽體)와 시문(詩文)을 통해 유배지의 척박함을 예술적 풍류(風流)로 승화시켰다.
특히 그의 작품 《화전별곡(花田別曲)》은 남해의 절경을 찬미하며 변방의 공간을 신선이 사는 이상향(理想鄕)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후대 문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문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706년 노량 바닷가에 세워진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는 시공을 넘어 선생의 고결한 정신과 학문적 열정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비록 마흔일곱의 이른 나이에 생(生)을 마감했으나, 불우한 처지 속에서도 임금을 향한 충절(忠節)과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을 끝내 잃지 않았던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한 이정표로 남아 있다.
결국 자암 김구는 절해고도(絶海孤島) 남해에 인문학(人文學)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다. 그는 이곳 남해를 '한 점 신선의 섬', 곧 '일점선도(一點仙島)'라 예찬하며 고난의 유배지를 다시 찾고 싶은 동경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긴 문학적 향기를 따라 메마른 일상을 성찰하고,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선비의 지조(志操)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의 유덕(遺德)은 푸른 파도와 함께 남해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며, 오늘날 우리에게 삶을 되묻고 세파(世波) 속 길을 밝히는 정신의 이정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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