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마비(逐馬碑)가 전하는 교훈, 백성의 삶을 지키는 정치
남해 축마비(逐馬碑)는 국가정책이 백성의 삶과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다
17세기 남해 사람들이 말[馬] 떼를 몰아내며 지켜낸 삶의 터전은,
오늘날의 정치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다시 묻게 한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5월 08일(금) 12:40
|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말[馬]은 단순한 동물을 넘어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핵심 자산이었다. 십이지신 가운데 하나인 말은 우직하고 성실한 소[牛]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 삶과 밀착되어 있었다.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는 전마(戰馬)부터 소식을 전하는 역마(驛馬), 그리고 주요 이동 수단인 승마(乘馬)에 이르기까지 말은 전쟁과 교통의 중심축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가죽과 털, 힘줄은 무기와 악기의 재료가 되었고, 말총은 선비들의 갓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데 쓰였다. 심지어 마분(馬糞)조차 비료와 약재로 활용될 만큼 말은 버릴 것이 없는 존재였다. 또한 '건육마(乾肉馬)'라 하여 식용으로 공납될 정도로 말고기 역시 귀한 별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처럼 쓰임새가 다양하고 국가 방위에 필수적인 자원이었기에,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狩獵圖)>나 신라 천마총의 <천마도(天馬圖)>에서 보듯 말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특별한 관리 대상이었다. 말을 잘 방목하여 충분한 수를 유지하는 일은 곧 국부(國富)를 유지하는 지름길이었으며, 이에 따라 마정(馬政)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국가의 중요한 정책 과제가 되었다. 본고(本稿)에서는 남해 축마비(逐馬碑)의 역사적 배경과 비문 내용을 통해 백성의 삶을 지키는 정치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편집자 주>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에는 174개, 고려시대에는 160여 개의 목장이 운영되었고, 조선 초기 마정의 기틀을 닦았던 세종 시대에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종합할 때 전국에 200여 곳의 국영 목장이 운영되었으며, 여기에 종사한 목자(牧子)만도 9천 명이 넘을 정도로 거대한 국가사업이었다.
흔히 '말[馬]'하면 제주도를 먼저 떠올리지만, 남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유구한 목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지형은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관리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으며, 남해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조선의 주요 국영 목장지로 기능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왔다.
△ 창선도(昌善島), 국가 목장의 중심지와 감목관들의 발자취
남해에서 말 기르기의 중심은 단연 창선도(昌善島)였다.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큰 섬인 창선도는 육지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섬 중앙에 꽤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어 말을 방목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강우량이 충분하고 목초지가 풍부했던 덕분에 창선은 조선 개국 초기부터, 혹은 그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이미 말의 주요 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창선의 역사는 창선면 부윤1리 '면민동산'에 모여 있는 비석군(碑石群)에서 선명하게 확인된다.
이곳에 줄지어 서 있는 12개의 비석 가운데 10개는 감목관(監牧官)의 선정비다. 감목관은 종6품 이상의 관직으로, 목장을 관리하고 마적(馬籍)과 목자의 호적을 정리하며 목장의 운영을 감독하던 실무 책임자였다.
이처럼 많은 선정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창선도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목장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화려한 번성 뒤에는 '목자(牧子)'라 불린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조선시대 한때 9천 명에 달했던 목자들은 신분상 양민이었으나 실제로는 천역(賤役)에 가까운 노동과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말 때문에 빚어진 고난의 역사는 근대에까지 이어진다. 1940년 세워진 정익환(丁益煥) 선생 사적비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목장이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남아 백성을 괴롭히던 불합리한 도세(賭稅)를 철폐하기 위해 형제가 4년 동안 한양을 오가며 투쟁했던 기록을 생생히 전한다. 이처럼 창선도는 단순한 말의 고장을 넘어, 국가의 거대한 시스템 아래 신음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했던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응축된 공간이다.
부윤리에 세워진 비석들은 감목관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 그늘에서 묵묵히 역사의 무게를 견뎌온 이름 없는 목자들의 눈물과 저항의 서사를 동시에 웅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창선의 너른 들판에서 마주하는 것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불의한 시대에 맞서 평범한 삶을 일구어낸 선조들의 살아 있는 발자취다.
△ 남해 본섬의 위기와 축마비(逐馬碑)의 탄생
|
평온하던 남해 본섬에 유례없는 위기가 닥친 것은 1650년대 효종(孝宗) 시절의 일이었다.
본래 창선도에 국한되었던 목장이 관리들의 탐욕과 점유욕으로 인해 본섬인 이동면과 금산 일대까지 무분별하게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영역의 확장을 넘어 농민들에게는 생존권의 처절한 박탈을 의미했다.
말 100여 필이 본섬으로 넘어오면서 재앙은 현실이 되었다. 굶주린 말 떼는 백성들이 피땀 흘려 일군 논밭을 짓밟았고, 목장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산의 울창한 적송(赤松)들은 무참히 불태워졌다.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정든 고향을 등져야만 했다.
섬 전체가 폐허가 될 지경에 이르자,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남해 사람들이 마침내 떨쳐 일어났다. 전(前) 찰방(察訪) 고대명(高大鳴), 유학(幼學) 주장정(周章定), 윤귀승(尹貴承) 등 지역의 선비와 지식인들이 앞장서 대궐로 향해 참상을 호소하였다.
이들의 간절한 상소는 마침내 조정과 도관찰사를 움직였고, 1655년 말들을 다시 창선 목장으로 돌려보내라는 준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말을 몰아낸다'는 뜻의 축마(逐馬)는 바로 이 절박했던 투쟁과 승리의 기록이다.
남해 사람들은 되찾은 평화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그해 이동면 난음리의 거대한 바위에 마애비(磨崖碑)를 새겼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축마비(逐馬碑)의 시작이다.
이후 남해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세대를 거쳐 이야기하며, 공동체의 결속과 정의를 지키는 의지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 비석은 단순히 가축을 쫓아낸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 공동체의 안녕을 지켜낸 민초들의 위대한 승전보와 같다.
당시 남해인들이 보여준 저항은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어떠한 거대 명분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온몸으로 증명한 행위였다. 깎아지른 바위에 새겨진 투박한 글자들 속에는 관(官)의 일방적인 정책을 뒤집고 민(民)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선조들의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결국 축마비는 370여 년 전 남해 땅을 휩쓸고 간 환란(患亂)을 이겨낸 인내의 산물이자,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와 권력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준엄하게 꾸짖는 역사의 거울인 셈이다. 또한 이 비석은 후손들에게 공동체를 지키는 책임과 부당함에 맞서는 용기가 시대를 초월한 가치임을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 1655년 마애축마비(磨崖逐馬碑) 전문 번역
남해는 현(縣)이 되었는데 바다 가운데 외진 곳에 있으며, 금산이 그 절반을 차지하고 예전에는 읍치가 없었다. 하나의 보(堡)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이 산(금산)의 중간 지대에서 말을 길렀다.
지세가 험하고 소나무 재목이 있었으며, 백성들의 밭이 그 사이에 끼어 있었으나 모두 무성한 풀밭(거친 땅)이 되었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현령을 두고 필진(匹鎭)을 설치하면서, 그 말들을 흥선도(興善島)로 몰아내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거친 밭을 일구게 하고 배를 만들 재목을 기르게 하니, 이는 실로 변방의 수비를 중시한 조치였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생업을 즐긴 것이 거의 200년이나 되었으니, 당시 조정(묘당)의 계획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순치(청나라 연호) 말년에 이르러, 흥선도의 목자와 목관 등이 국가 방비의 중요함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섬을 땅으로 점유할 계책만 세웠다. 점마신에게 하소연하여 조정에까지 소문이 들리게 하였다.
이듬해에 그 말 100여 필을 이곳(남해 금산)으로 옮겨 기르니, 산의 적송(赤松) 재목들이 불타고 말 떼가 들판을 뒤덮었다.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잃은 지 1년 사이에 울부짖으며 떠나간 자가 태반이었고, 짐을 지고 길을 떠나는 자들이 이어져 고을이 장차 빌 지경이었다. 갑오년(甲午年, 1654년) 가을, 고을 사람인 전(前) 찰방(察訪) 고대명(高大鳴), 유학(幼學) 주장정(周章定), 윤귀승(尹貴承) 등이 대궐 앞에서 울부짖으며 사정을 호소하니, 임금의 자비로운 윤허를 입어 묘당에서 의논을 올리고 도신(관찰사)이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655년) 봄, 말 떼를 다시 원래 있던 곳인 흥선도(興善島)로 돌려보냈다. 오직 우리 사군(수령)께서 다방면으로 힘을 써서 실질적으로 주관하셨으니, 그 공은 지금에 있고 덕은 후세에 드리워져 백성들이 어찌 감히 칭송하지 않겠는가. 태수는 누구인가? 이홍규(李弘奎, 1655.1~1656.10) 영감인데, 사람됨이 강개하고 큰 절개가 많으며 직무에 부지런하여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명(銘)하기를, "저 금산이 하늘 끝까지 높이 솟아 있으니, 우리 사또의 덕도 그와 더불어 나란하도다." 하였다. 감(감독)은 찰방 고대균이고, 향소(대표)는 박이직이다.
순치 12년(1655년) 을미년 어느 날, 유학 박인걸이 서문을 쓰고, 유학 고문환이 글씨를 쓰다.
△ 역사의 계승: 1928년 중건 축마비 전문 번역
지난 청나라 순치(順治) 을미년(乙未年, 1655년)에 처음으로 이 비석을 난음(蘭陰)의 바위 위에 세우고, 그 아래에 또 마애비( 磨崖碑)에 비문 한 통을 새겼다.
지금 기축년(己丑年, 1829)에 이르러 비석은 갑자기 벗겨지고 떨어졌으며, 바위의 글자도 또한 마모되어 씻긴 듯 희미해졌다.
이에 고우명(高友明) 군이 분연히 뜻을 일으켜 다시 세우는 일을 맡았다. 고을 수령 일가도 이를 허락하고 향리의 여론 또한 모두 일치하여, 마침내 그 종중과 함께 의논해 새 돌을 다듬어 이곳에 옮겨 세우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고우명은 찰방공(察訪公)의 6대손으로 그 가계가 번성하였으며, 대체로 지략이 있고 업무 처리에 능숙한 인물이었다. 공사가 끝나 비석이 완성된 날을 맞아 말하건대, 이렇게 다시 세워지게 된 것은 태수(太守)의 힘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유상표(柳相杓) 영감인데, 그는 총명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명성이 꽤 자자하다고 한다. 도광 13년(1833) 계사년 4월 10일. 유학(幼學) 하길원이 삼가 발문을 썼다. 향소의 직무를 맡고 있는 이는 이경문이다. 유학 하백원이 삼가 글씨를 썼다. 감독은 유학 고창성이며. 무진년(1928) 2월에 중건하였다. 유사(담당자)는 박재찬, 고명학이다.
△ 축마비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17세기 남해의 민초들이 보여준 용기와 이홍규(李弘奎) 현령 같은 관리들의 결단은 한 가지 보편적 진리를 보여준다. 국가의 대계라 할지라도 백성의 구체적인 삶을 파괴한다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의 거대한 마애비와 무림리의 중건비를 통해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절박한 숨결을 느낀다.
척박한 섬 환경 속에서도 불합리한 마정(馬政)에 맞서 평화를 되찾았던 남해 사람들의 기개는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이제 축마비는 단순한 역사 유물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책과 민생의 충돌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선조들이 바위에 새겨 넣은 애민(愛民)의 기록을 되새기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과연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가치와 어떤 평화를 물려줄 것인가.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세월 속에서 점차 마모될지라도, 백성을 아끼고 삶을 지키려 했던 그 정신만큼은 남해의 푸른 바다와 금산의 적송(赤송) 사이에서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나아가 이는 권력의 일방적인 집행이 아닌, 위아래가 소통하여 빚어낸 공존의 승리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결국 정치는 차가운 법전이 아니라 사람의 구체적인 고통을 덜어주는 온기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축마비는 3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으로 전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