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고문헌 『여지도서(輿地圖書)』로 본 남해현의 해상 방어와 지역사적 위상
남해현은 조선후기 진관체제 속에서 해상방어와 조운체계의 핵심 거점
『여지도서(輿地圖書)』는 남해현의 행정·군사·경제·사회 구조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로 조선후기 지방사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5월 15일(금) 18:26
▲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남해현 지도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조선 영조 연간(1757~1765), 왕명에 따라 홍문관(弘文館)이 주관하여 전국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수합하여 총 55책으로 엮은 대규모 인문 지리지이다. 이는 기존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완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으로, 조선 후기 지방 사회의 실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반영하고자 한 시도였다. 여지도서에는 총 313종의 지지(地誌)가 수록되어 있으며, 읍마다 지도와 지리·행정·경제·군사·풍속 등의 정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거리와 방위, 호구(戶口), 군사시설, 교통로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지방 행정과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여지도서』는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직접 작성한 사료를 집대성한 점에서, 지방 사회의 실제 모습을 비교적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동일한 시기 지역 간의 차이를 입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며, 조선 후기 지역사 연구의 핵심 사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에 대한 기록 역시 이러한 성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남해현은 단순한 지방 행정 단위를 넘어 해상 교통과 군사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으며, 『여지도서』는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여지도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남해현의 연혁과 행정, 군사 체계 및 경제 구조를 다각도로 조명하여 고문헌에 나타난 남해의 역사적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남해현 원문 일부

▲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남해현 원문 일부

▲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남해현 원문 일부
▲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남해현 원문 일부



△ 남해현의 행정·군사 체계와 지리적 위치


남해현(南海縣)은 경상도(慶尙道)에 속한 고을로, 진주진(晉州鎭) 관할 아래에 편제된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군사 조직인 진관체제(鎭管體制)하에서 남해현은 인근 해안 방어를 담당하는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지리적으로는 동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40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15리, 남쪽으로 해안까지 36리, 북쪽으로 노량(露梁)까지 38리에 이른다.
한양(漢陽)까지의 거리는 약 1,045리로 11일 반이 소요되었으며, 경상감영(慶尙監營, 대구)까지는 400리, 병영(兵營, 진주)까지는 120리, 통영(統營)까지는 220리였다.
이러한 거리 체계는 남해현이 중앙과 군사 거점 사이에서 중간 연결 지점으로 기능했음을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해상 교통로와 육상로(陸上路)가 결합된 복합 교통망의 요지로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음을 시사한다.
행정구역은 현내면(縣內面), 이동면(二東面),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川面) 등 7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삼동면은 관아로부터 60리로 가장 멀리 위치하였고, 현내면과 고현면은 각각 5리와 10리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었다.
기묘년(己卯年, 1759) 기준으로 호수는 4,491호, 인구는 21,738명으로 남자 9,336명, 여자 12,402명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은 여성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해상 활동과 군역 부담으로 인한 남성 인구 이동 또는 감소와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면 단위 행정 체계는 조세(租稅) 징수와 군역 동원, 치안 유지의 기본 단위로 기능하였으며, 각 면은 지리적 조건과 교통로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지방 행정이 단순한 구획을 넘어 기능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면별로 분화된 역할은 지역사회의 경제·군사적 대응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 남해현의 연혁과 왜구 침입에 따른 지역 변화


남해현은 본래 해중도서(海中島嶼)로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전야산군(田也山郡)이 설치되면서 행정단위로 편제되었다.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 남해(南海)로 개칭되었고,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기에는 왜구(倭寇)의 침입이 극심해지면서 주민들이 진주 대야천(大也川) 일대로 이주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는 단순한 피해를 넘어 행정 기능의 마비와 지역 공동화(共同化)를 초래한 사건이었다. 더불어 지역 기반의 해체는 향촌 사회 질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이주는 단기적 피난에 그치지 않고 장기간 지속되면서 농경지 황폐화, 세수 감소, 군사력 약화 등 복합적인 문제를 초래했다. 특히 해안 지역의 인구 공백은 방어 체계 자체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는 다시 왜구 침입을 용이하게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조선 태종(太宗) 때에는 하동(河東)에 편입되어 하남현(河南縣)이라 불렸으며, 이후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해양현(海陽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남해라는 명칭을 회복하였다.
세종(世宗) 때에는 곤명현(昆明縣)에 합속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었으며,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는 현인(縣人)들의 반란 사건으로 인해 현령이 현감(縣監)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이후 중종(中宗) 2년(1507)에 다시 현령으로 복구되었다.
이러한 변천 과정은 남해현이 단순한 행정단위를 넘어 군사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동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며, 외부 위협과 내부 정책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편된 특징을 지닌다. 나아가 이는 국가의 해안 방어 전략 변화와도 긴밀히 연결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 남해읍성(南海邑城)과 해안 방어 체계


남해현 읍성은 세조(世祖) 5년(1459)에 증축된 석성(石城)으로, 둘레 약 2,876척, 높이 13척 규모였다. 성문은 남문과 북문이 설치되었으며, 특히 옹성(甕城)이 18개나 배치되어 외적의 침입을 다층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축성되었다.
성(城) 내부에는 우물과 샘이 있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이는 장기적인 방어를 고려한 구조였다.
이러한 읍성은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니라 군사 거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또한 성곽의 배치는 지형을 적극 활용해 방어의 효율을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성내(城內) 관아와 군사시설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행정과 군사 통합 운영이 가능하였다.
또한 남해현에는 수군(水軍), 진지(鎭地)와 보(堡), 그리고 봉수(烽燧) 체계가 함께 구축되어 있었다.
금산(錦山) 봉수는 진주 방면과 순천 방면을 연결하며 해안 방어 네트워크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봉수는 5단계 신호 체계를 통해 긴급 상황을 중앙에 전달하는 군사 통신 수단이었다.
 특히 남해는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함께 남해안 방어선의 삼각 축을 이루는 지역으로, 서로 시야와 항로를 공유하며 방어 협력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단일 지역 방어를 넘어 광역 해상 방어 전략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각 거점 간 신속한 정보 전달과 공동 대응 체계는 해상 위협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직적 대응력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 경제 구조와 해상 교통·조운 체계
 

 남해현의 경제 구조는 어업(漁業), 염업(鹽業), 농업(農業)이 결합된 복합적인 경제 형태를 보였다. 해산물로는 문어, 전복, 해삼, 홍합 등이 풍부하게 생산되었으며, 유자(柚子), 비자(榧子), 옻, 닥나무 등 임산물도 중요한 특산물이었다. 특히 어염세(漁鹽稅)는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남해현은 이러한 재정 구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산업 구조는 자연환경과 긴밀히 결합된 지역 경제의 특성을 잘 보여주며, 계절과 기후 변화에 따라 생산 활동이 크게 좌우되었다. 이는 주민 생활 전반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며, 경제적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교통로는 동쪽으로 난포(蘭浦)를 거쳐 진주로 이어졌고, 서쪽으로는 호을포(湖乙浦)를 통해 전라도 순천부 경계와 연결되었다. 남쪽으로는 성현(城峴)을 지나 곡포보(曲浦堡)로 이어졌으며, 북쪽으로는 덕신역(德新驛)을 통해 곤양(昆陽)으로 연결되었다.
 세곡(稅穀) 운송은 노량(露梁) 조창(漕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운선(漕運船)은 남해에서 출발하여 순천, 흥양, 장흥, 영암, 진도 등을 거쳐 전라도 연안을 따라 이동한 뒤, 충청도 해안을 지나 한양으로 향하였다.
 이 과정은 연안 항해(沿岸航海)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풍향과 조류에 크게 의존하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조운(漕運) 체계는 단순한 물류 이동을 넘어 지역 간 경제적 연계망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해에서 생산된 물자와 세곡(稅穀)은 서남해 연안을 따라 집결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항구와 포구의 상업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운송 기간은 통상 25일 이상이었으나, 기상 조건에 따라 수개월이 소요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해상 교통 체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해현이 해상 물류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교통망은 지역 간 문화와 정보 교류를 촉진하는 통로(通路)로도 작용하였다.
 


△ 사회 구조와 문화·교육 환경

 
 남해현의 주요 성씨(姓氏)는 배(裵), 김(金), 백(白), 진(陳) 등이었으며,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집성촌(集姓村)이 형성되어 있었다.
 풍속(風俗)은 농업과 길쌈을 중시하고 무예를 익히는 실용적 성격을 띠었으며, 전반적으로 소박하고 근면한 생활 양식을 유지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향교(鄕校)가 설치되어 유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문묘(文廟), 사직단(社稷壇), 성황사(城隍祠), 여단, 충렬사(忠烈祠) 등의 제사 시설이 운영되었다. 이는 유교적 질서와 국가 제례 체계가 지방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러한 제례 공간은 지역민의 정신적 결속과 도덕규범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관아(官衙) 시설로는 객관(客館), 동헌(東軒), 승화당(承化堂, 객사의 부속 건물), 향사당(鄕射堂) 등이 있었으며, 행정과 군사 운영을 위한 다양한 창고와 관청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덕신역과 노량원(露梁院), 지족원(知足院) 등의 역원(驛院)은 교통과 숙박 기능을 담당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제도적 기반은 단순한 행정 운영을 넘어 지역사회의 질서 유지와 공동체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향약(鄕約)과 같은 자치 규범 역시 일정 부분 작동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지방 사회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요소였다. 나아가 이러한 제도와 풍속은 중앙의 통치 이념이 지방 사회에 구체적으로 구현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 해양 거점으로서 남해현의 역사적 의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타난 남해현(南海縣)의 모습은 조선 후기 해안 지역의 구조와 기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남해현(南海縣)은 진관체제(鎭管體制) 아래에서 해상 방어의 전초기지이자, 조운 체계의 핵심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왜구(倭寇)의 침입이라는 지속적인 외적 위협 속에서 읍성(邑城), 수군(水軍), 봉수망(烽燧網)이 결합된 입체적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이는 국가 차원의 해안 방어 전략이 지방에 구체화된 사례라 할 수 있으며, 지역 주민의 생활과 군사·행정 조직 운영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례였다.
 동시에 어업·염업·농업이 병행된 경제 구조는 지역의 자립 기반을 형성하고 국가 재정에 기여하였다.
 또한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와 지역 공동체의 유지 역시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 해상 교통망과 조운(漕運) 체계의 요충지로서 남해현은 지역 간 물자 유통과 군사 이동을 연결하는 전략적 공간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남해현은 군사·경제·사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해양 거점 지역으로서, 조선 후기 지방 행정과 해상 방어 체계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사례라 할 수 있으며, 주민 생활과 지역 발전의 맥락을 살피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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