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명의 「유금산기(遊錦山記)」로 다시 읽는 남해금산의 역사와 풍경
남학명(南鶴鳴)은 「유금산기(遊錦山記)」를 통해 남해금산의 절경 속에 역사와 효심,
시대의 아픔을 함께 담아내며 조선 후기 산수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남해 금산은 자연 명승을 넘어 이순신 장군의 호국 역사와 보리암의 정신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역사·문화·생태가 어우러진 문화유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6월 05일(금)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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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회은(晦隱) 남학명(南鶴鳴, 1654~1722)은 1679년 남해(南海)로 유배된 소론의 영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의 영향을 받아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사유가 깊어 당대 문단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남학명은 특히 산수유기(山水遊記)와 기문(記文) 분야에서 독창적인 문체를 남겼는데, 단순히 경치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정 속 인물의 감정과 시대적 분위기를 함께 담아내는 데 탁월하였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서사적 긴장감이 살아 있어 조선시대 산문사(散文史)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 문집인 『회은집(晦隱集)』은 1723년경 간행된 5권 2책의 활자본으로, 시·부·기·서·제문·잡문 등이 폭넓게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에는 당시 명사들과의 교유, 자연을 노래한 산수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두루 담겨 있어 문학적 가치와 사료적 가치가 함께 매우 높다. 특히 『회은집』 권2에 실린 「유금산기(遊錦山記)」는 남학명의 산문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유금산기(遊錦山記)는 1679년(숙종 5)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남인(南人)의 비리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남해(南海)로 유배되었을 때, 아들 남학명이 부친을 찾아 남해로 내려가는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그는 길을 따라 지나치는 옛 백제와 신라의 유적, 남해의 산천과 바다 풍광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유배지(流配地)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효심을 절절하게 담아냈다.
특히 남해 금산(錦山)의 기암괴석과 푸른 바다, 사찰 풍경을 묘사한 대목은 뛰어난 현장감과 시적 운치를 보여주어 조선 후기 산수문학(山水文學)의 백미(白眉)로 평가된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삶과 역사, 가족애를 함께 성찰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남학명은 자연을 바라보며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정서를 함께 담아냈고, 이러한 문학적 성취로 인해 조선 후기 산수유기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본 글은 조선 후기 문장가 남학명(南鶴鳴)의 기행·산수 기록인 「유금산기(遊錦山記)」를 여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 역사와 문학 속에 담긴 남해금산(南海錦山)의 풍광과 정신세계를 오늘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 유배지 남해(南海)로 향한 효심의 여정과 금산(錦山) 유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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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己未年, 1679) 가을 8월, 남학명은 결성(潔城, 충남 홍성)의 집을 떠나 왕모(王母)께 하직한 뒤 남해 유배소(謫所)에 있는 아버지 남구만(南九萬)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는 여정 중 의자왕(義慈王)과 기자 준왕(箕準王), 견훤(甄萱)의 옛 도읍을 지나며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 흔적을 되새겼고, 대방(帶方)·진한(辰韓)·신라(新羅)의 옛 영역을 지나며 한반도의 오랜 역사 공간을 체감하였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을 끼고 섬진강(蟾江)을 따라 바다를 건너며 육로와 수로 칠백여 리를 이동한 끝에, 집을 떠난 지 여드레 만에 비로소 부친 곁에 도착하였다.
반년 동안 떨어져 있던 끝에 다시 아침저녁 문안[晨昏]을 드릴 수 있었다는 기록에는 유배지(流配地)에 있는 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효심이 담겨 있다.
그 무렵 용문사(龍門寺)의 승려 도순(道淳)이 찾아와 남해현(南海縣) 남쪽 삼십 리에 있는 금산(錦山)을 소개하며, 바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절승(絶勝)이니 꼭 올라보기를 권하였다.
부친 역시 이를 허락하였고, 남학명은 9월 23일 을묘일(乙卯日) 새벽 아버지를 모시고 금산 유람에 나선다. 고을 사람 하장도 동행하였다.
이날은 흐린 기운이 모두 걷히고 바람과 햇살이 청명하였다. 말을 타고 길을 나서자, 붉게 물든 숲과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고, 푸른 대숲과 누런 귤(橘)이 울타리 사이로 드러났다.
그는 "참으로 마음에 맞는 경치는 반드시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여, 남해 자연의 소박하면서도 깊은 아름다움을 감탄하였다. 저물 무렵 번천(樊川) 가에 이르니 울창한 소나무가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흰 돌들이 줄지어 놓여 있어 벌써 산중에 들어선 흥취가 느껴졌다.
승려 십여 명이 가마를 메고 마중 나왔고, 남학명(南鶴鳴) 일행은 말을 버리고 가마에 올라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수백 보를 가니 산길 왼편에 넓은 반석(盤石)이 펼쳐져 있었다.
평평한 돌 위에 낙엽을 쓸어 자리를 펴고 쉬는 동안, 사방의 단풍 숲은 사람의 옷 빛마저 빼앗을 정도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장대한 해양 세계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역사
중당암(中堂巖)에서 잠시 쉬고 다시 천여 보를 오르자, 봉수대(烽燧臺) 석축(石築)이 나타났다.
높이는 칠팔 장쯤 되었고, 봉수군(烽燧軍)은 억새를 엮은 초가를 지어 그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마침내 금산 정상에 오르자, 시야가 한순간에 열리며 장대한 해양 풍광이 펼쳐졌다.
남학명은 단순히 절경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하나의 해양 지리지를 쓰듯 주변 산천과 섬들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동쪽으로는 욕지도(浴池島)와 거제(巨濟)의 계룡산(鷄龍山)이 보이고, 검은 점처럼 아스라하게 일본(日本)의 대마주(對馬州, 대마도)도 희미하게 드러났다.
서쪽으로는 장흥(長興)의 천관산(天冠山)과 흥양(興陽)의 팔량산(八良山)이 아련히 이어졌고, 남쪽 먼바다에는 탐라(耽羅, 제주도)와 진도(珍島)까지 희미하게 드러났다.
북쪽에는 방장산(方丈山), 즉 지리산(智異山)이 우뚝 솟아 남악(南嶽)의 큰 진산(鎭山)이 되었고, 그 산맥이 진양(晉陽)의 비봉산(飛鳳山), 사천(泗川)의 와룡산(鷄龍山)으로 이어졌다. 남쪽의 대해(大海)는 하늘과 바다가 한빛으로 맞닿아 경계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순천(順天)의 절도영(節度營)과 통제영(統制營)의 성곽(城郭), 남해도의 상주포(尙州浦)·곡포(曲浦)·미조(彌助)·평산(平山) 등의 진보(鎭堡)는 발아래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남학명은 남해가 사방으로 바다에 둘러싸여 있지만, 실은 백두산(白頭山)에서 이어진 거대한 산맥의 끝자락이라는 점을 통찰하며 자연과 국토의 맥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는 이어 노량(露梁)을 바라보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기억을 떠올린다. 노량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판옥선(板屋船)을 정박하던 곳이었다.
비록 장군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였지만, 왜적은 다시는 이 바닷길을 넘지 못하였다.
남학명(南鶴鳴)은 지금도 평안(平安)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의 존재가 이순신의 위엄과 호국 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며 깊은 감동을 드러낸다.
△ 보리암(菩提菴)과 금수굴(金水窟), 홍문(虹門)의 신비로운 절경
금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바람이 일고 바다가 소용돌이치며 구름이 햇빛을 가리자, 조금 전까지 선명하던 산과 섬들은 모두 안개 속에 뒤섞여 자취를 감추었다.
높은 봉우리 몇 개만 희미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승려는 "바다의 산은 안개가 많아 깊은 가을에도 이처럼 멀리 바라보는 일은 드물다"라고 말하였다.
산길을 내려가던 중 절벽에는 "유홍문상금산(由虹門上錦山)"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가정(嘉靖) 무술년(戊戌年, 1538)에 주세붕(周世鵬) 등이 남긴 흔적이었다.
남학명(南鶴鳴)은 이끼를 걷어내며 백사십여 년 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깊은 감회에 잠겼다.
이어 도착한 보리암(菩提菴)은 대장봉(大藏峰) 아래 자리한 암자로, 뜰에는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가을 정취를 더욱 짙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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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주지 축경(竺敬)은 남학명을 금수굴(金水窟)로 안내하였다.
굴속 샘물 위에는 금박(金箔) 같은 빛이 떠올랐다가 입김을 불면 흩어지고 다시 퍼졌다.
그는 이 기이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연의 신비로움을 경탄하였다.
의상대(義湘臺), 기암(기巖), 음성굴(音聲窟), 구룡굴(九龍窟) 또한 장엄하였다. 특히 홍문(虹門)은 바위가 저절로 갈라져 거대한 성문처럼 이루어진 곳이었다.
문 안에 다시 문이 이어져 있었고, 바다를 향해 열린 쌍문 사이로 파도와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남학명은 이 광경을 보고 이백(李白)의 시구를 떠올리며, 마치 신선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듯한 감동을 기록하였다.
△ 별빛 가득한 보리암의 밤과 남해 사람들의 삶
밤이 되자, 보리암(菩提菴)에는 깊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바람은 잔잔하고 바다는 평온하였다.
구름이 걷히자,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고, 하현(下弦, 왼쪽이 밝은 반달)의 은은한 달빛은 별빛을 가리지 않아 은하수(銀河水)가 더욱 또렷하게 빛났다.
남학명(南鶴鳴)은 소동파(蘇東坡)의 "하늘빛과 바다빛은 본래 맑고 깨끗하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깊은 감흥에 잠겼다.
다음 날 새벽 그는 동쪽 창을 열어 일출을 보려 했으나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관음굴(觀音窟)에 이르자, 절벽 틈에서 떨어지는 샘물 소리가 마치 비바람처럼 울려 퍼졌고, 그 물맛은 몹시 맑고 차가웠다.
당시 남해(南海)는 습하고 물이 좋지 않아 유배지(流配地)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마을 우물물도 흐려 배탈을 일으키기 쉬웠다.
그러나 관음굴 주변만큼은 속세와 동떨어진 맑고 깨끗한 별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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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곳곳에는 늦가을에도 차꽃이 피어 있었고, 산과 들의 여러 열매는 유람객의 갈증을 씻어 주었다.
남학명은 이어 산신당(山神堂)에 이르러 무격(巫覡)들이 머물며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는 모습도 보았다.
북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민간의 신앙 풍속이 산속 깊은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화엄대(華嚴臺)·향로봉(香爐峰)·지장봉(地藏峰)·도솔암(兜率菴)·구정봉(九井峰) 등을 차례로 둘러보니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형세와 기이한 절경이 펼쳐졌다.
특히 구정봉의 아홉 돌 웅덩이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절벽 아래로는 푸른 대해(大海)가 끝없이 이어졌다.
남학명(南鶴鳴)은 이러한 풍광과 풍속을 단순한 산수 묘사에 그치지 않고, 남해 사람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자연 속에 깃든 인간의 정서를 함께 담아내며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 금강산(金剛山)에 견준 금산(錦山)의 가치와 남학명의 철학적 성찰
남학명은 금산 유람을 마친 뒤 자신이 평생 유람한 여러 산을 떠올린다.
금강산(金剛山), 칠보산(七寶山), 지리산(智異山), 삼각산(三角山), 계룡산(鷄龍山), 가야산(伽倻山) 등은 저마다 특징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금산은 그 모든 장점을 모아 놓은 산과 같다고 평가하였다. 칠보산의 절벽도 홍문(虹門)만 못하고, 계룡산의 공암(孔巖)도 구룡굴(九龍窟)에 미치지 못하며, 백암산(白巖山)의 영천(靈泉)도 금수굴(金水窟)보다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는 만약 금산이 서울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귀족과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 명성 또한 중국(中國)의 명산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 탄식한다.
그러나 남해 바다와 구름 속에 가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곡포진(曲浦鎭)과 용문사(龍門寺)의 풍광을 다시 바라본 남학명은, 금산이 마치 오랜 벗처럼 자신을 배웅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생과 여행을 모두 "꿈속의 또 다른 꿈"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작은 꿈을 깨고도 여전히 또 다른 꿈속에 살아가며, 언젠가 큰 꿈에서 깨어나면 금산 유람 또한 한순간의 환영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꿈속의 즐거움이 근심보다 낫다"라며, 후일 웃으며 돌아볼 수 있도록 이 기록을 남긴다고 맺는다.
이는 단순한 산수기(山水記)를 넘어 자연 속에서 삶과 역사, 인간 존재를 성찰한 조선 후기 산문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다.
△ 남해금산(南海錦山)의 미래, 세계적 해양 문화유산으로
남학명이 금강산(金剛山)과 지리산(智異山) 등 여러 명산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은 남해 금산(錦山)은 기암괴석의 절경을 넘어 사찰 문화와 해양 역사, 유배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 문화경관의 결정체이다.
따라서 금산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역사·문화·생태·치유가 융합된 세계적 해양 문화유산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금산기(遊錦山記)》를 기반으로 한 인문 관광 동선 복원, 이순신 장군과 연계한 해양 역사 관광지구 조성, 보리암(菩提庵)을 중심으로 한 명상·치유 공간 특화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자연과 공동체가 지닌 본래의 품격을 지켜내는 보존이 선행되어야 한다.
남학명이 바라본 금산은 효심과 유배의 슬픔, 나라를 지킨 충절,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철학이 깃든 인문학의 산이었다.
인생과 여행을 "꿈속의 한 장면"이라 표현한 그의 문장은 3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금산으로 이끌며, 시대를 넘어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거대한 인문 풍경이자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러한 금산의 인문 풍경 위에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의 유자 일화와 아들 남학명(南鶴鳴)의 《유금산기》가 더해질 때, 남해는 비로소 역사·문화·치유 자원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문화관광 콘텐츠를 갖추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금산 탐방로와 유기적으로 연계된 '약천 유자 치유길'을 조성하고, 남구만의 건강 회복 일화를 접목한 '웰니스 유자 테라피'를 금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결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남해 유자의 문화적 가치와 브랜드 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유금산기(遊錦山記)》가 일깨워 준 자연과 역사의 가치 위에 현대적 치유 콘텐츠를 융합하려는 노력은 남해를 단순한 유람지가 아니라 역사와 치유, 문화적 품격이 살아 숨 쉬는 세계적인 체류형 웰니스 관광도시로 도약시키는 강력한 미래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