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남해를 기록하다, 『진주진관남해현지』의 재발견
1828년 『진주진관남해현』의 기록, 남해는 조선 후기 남해안 방어의 핵심지,
행정·군사·재정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섬 고을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200년 전 진주진관남해현의 인구·토지·조세·군사 기록을 통해 본 남해는
고립된 변방이 아니라, 중앙 권력과 긴밀히 연결된 해상 전략의 요충지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6월 12일(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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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무자년(戊子年, 순조 28)을 기준으로 편찬된 『진주진관남해현지』는 200년 전 남해의 실상을 오롯이 담아낸 지방 지리지다. 남해현은 경상우도 진주목 관할의 진관체제에 속한 고을, 곧 진주진관남해현이었다. 진관(鎭管)체제는 평시에도 군사력을 지방에 분산 배치해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한 조선의 방위 제도였다. 따라서 남해는 단순한 섬 고을이 아니라, 남해안을 지키는 전략적 전초기지(前哨基地)였다. 읍지(邑誌)는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듯 행정·군사·재정·교통·경제 전반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편집자 주>
경상국립대학교 고문헌도서관에 소장된 『진주진관남해현』에는 경상도 남해현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 집약되어 있다. 1책 30페이지로 구성된 이 읍지는 건치연혁, 군명, 관직, 성씨, 산천, 풍속, 방리, 호구, 전부, 군액, 성지현성, 창고, 관방, 진보, 봉수, 학교, 단묘, 능묘, 불우, 궁실, 누정, 공해, 도로, 교량, 도서, 제언, 장시, 역원, 목장, 형승, 고적, 토산, 진공, 균세, 봉름 등 3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방대한 항목 구성은 단순한 행정 지리지의 범주를 넘어선다. 200년 전 한 권의 읍지가 품고 있는 내용은 19세기 전반 남해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자, 당시 지역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1828년이라는 시점을 기준으로 각 항목을 따라 남해현의 구체적인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 건치연혁과 군명, 관직과 성씨
건치연혁(建置沿革)은 남해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전한다. 신라 시기 신문왕(神文王)이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 대에 남해(南海)로 개칭하였다. 고려 현종은 현령을 두어 지방 통치를 정비하였다. 공민왕 대, 왜구 침입으로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현재 하동군 북천면)으로 관아를 옮긴 사실은 남해가 왜구 방어의 최전선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에 들어와 태종은 하동과 병합해 하남현(河南縣)으로 삼았고, 이후 해양현(海陽縣)을 거쳐 다시 남해로 환원하였다. 세종 때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재분리하였고,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 현감(縣監)으로 강등되었다가 중종 2년(1507)에 현령(縣令)으로 복구되었다. 이러한 변천은 남해의 행정 지위가 중앙 권력의 판단과 해상 방위 상황에 따라 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군명(郡名) 조항은 남해에 대한 명칭으로 전야산(轉也山), 해양(海陽), 남해가 기록되어 있고, 별호(別號)로 전산(轉山), 화전(花田), 윤산(輪山)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관직(官職) 항목에는 무관 종5품 현령 1인을 비롯해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인리 44명, 지인 20명, 사령 25명, 관노 33명, 관비 49명이 명시되었다. 이는 행정 조직과 더불어 군사적 성격이 강한 고을의 인적 구성을 보여준다. 성씨(姓氏) 조항에 나타난 김·정·박·이·최·권·오 등 다양한 성씨는 남해가 단일 집성촌(集成村)이 아니라 여러 가문이 공존한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 산천·형승과 풍속, 방리와 호구
산천(山川) 조항은 남해의 지형적 기반을 전한다. 망운산(望雲山)은 진산(鎭山)으로 읍성 서쪽 2리에 자리 잡았고, 금산(錦山)은 동쪽 25리에 우뚝 솟았다. 소흘산·원산·녹두산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동천·대천·파천의 물줄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형승(形勝) 항목에서도 금산의 경관과 위상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는 산세가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봉수와 방어망, 생활 터전과도 긴밀히 연결되었음을 암시한다. 풍속(風俗)은 "농사와 길쌈을 숭상하고 무예를 익히며 질박함을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농업(農業)과 군역(軍役)이 병행된 지역 특성을 드러낸다.
방리(坊里) 조항은 7개의 면과 각 면에 소속된 82리(里)의 이름과 관문(官門)으로부터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현내면(縣內面)은 차산리(車山里) 등 소속된 15개 리와 거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동면(二東面)은 다정리(茶亭里) 등 소속된 9개 리와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삼동면(三東面)은 미조항리(彌助項里) 등 소속된 6개 리와 거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남면(南面)은 우형동리(牛形洞里) 등 소속된 15개 리와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서면(西面)은 연죽동리(烟竹洞里) 등 13개 리와 1개 촌(村)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고현면(古縣面)은 도마산리(都馬山里) 등 11개 리와 거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설천면(雪天面)은 감암리(甘巖里) 등 12개 리와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호구(戶口) 조항은 무자년(戊子年, 1828)을 기준으로 인구 현황을 제시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원호(元戶) 4,688호, 총인구 34,309명(남: 10,974명, 여: 13,409명)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항목 간 수치 불일치가 확인된다. 남녀 인구의 합산치는 24,383명으로, 기록된 총인구(34,309명)와 비교했을 때 9,926명의 오차가 발생하여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필사 과정에서의 단순한 오기(誤記)로 보이며, 실제 인구는 2만 4천여 명 규모였을 것이다. 비록 수치상의 오기는 있으나, 당시 남해의 인구가 2만 명을 초과하였다는 점은 이 지역이 결코 작은 섬 고을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되, 수산업과 염업, 그리고 군역(軍役)이 결합된 복합적 생활 구조 속에서 상당한 사회·경제적인 규모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읍지에 나타난 남해현의 재정과 군역 체계
전부(田賦) 조항은 남해의 세금에 관한 기록으로, 한전(旱田)·수전(水田)·전세(田稅)·대동(大同)·요역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남해현의 조세 내역과 재정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전(旱田) 항목은 남해현의 전체 토지 가운데 밭을 기록한 것으로, 원장부상 1,422결(結) 39부(負) 2속(束)이며, 그 가운데 정해년(1827) 당시 경작 중인 토지는 1,049결 49부 5속이다. 수전(水田) 항목은 전체 토지 가운데 논을 기록한 것으로, 원장부상 1,510결 86부 1속이며 정해년 당시 경작 중인 토지는 1,268결 93부 3속이다.
전세(田稅) 항목과 대동(大同) 항목에는 남해현의 세금 내역과 상납 경로가 기록되어 있다. 요역 항목에는 바치는 현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8명을 기준으로 꿩(雉) 1두, 닭(鷄) 1두, 섶(柴) 48볶음, 숯(炭) 10말, 볏짚(藁草) 28묶음, 풀(生草) 18묶음은 통영(統營)에 회부하였다. 또한 돼지(家猪) 150마리와 외양간 사료로 쓰는 겨(租糠) 25말씩을 매년 거두었으며, 콩(豆) 40석, 팥(小豆) 5석, 녹두(綠豆) 3석, 참깨(眞荏) 10석, 들깨(水荏) 5석, 참밀(眞麥) 20석, 황밀(黃蜜) 20근, 목화(木花) 300근, 생마(生麻) 60근 등은 매년 시기에 따라 거둔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액(軍額) 조항에는 남해현에 배정된 군관(軍官)과 보인(保人)의 수가 기록되어 있다. 훈련도감포수보(訓鍊都監砲手保) 30명, 어영정군(御營正軍) 4명, 자보(資保) 4명, 관납보(官納保) 149명, 금위정군(禁衛正軍) 8명, 자보 8명, 병조기병(兵曹騎兵) 1명, 금군보(禁軍保) 26명, 복직 9명, 호연대보(扈輦隊保) 2명, 공조장인(工曹匠人) 24명, 순영물선군(巡營物膳軍) 9명, 통영친병(統營親兵) 18명, 표하솔(標下率) 3명, 별아병(別牙兵) 42명, 대기수(大旗手) 1명, 각포분방수군(各浦分防水軍) 1,380명, 사부(射夫) 263명, 사노(寺奴) 162명, 노대량군(奴代良軍) 80명, 주사사부(舟師射夫) 34명, 포수(砲手) 44명, 능노군(能櫓軍) 145명, 우병영별대마군(右兵營別隊馬軍) 2명, 보(保) 4명, 아병(牙兵) 5명, 보 5명, 봉수군(烽燧軍) 75명, 보 225명, 보군(步軍) 145명, 보(保) 145명, 합천(陜川)에서 이동해 온 보군 15명과 보(保) 15명이 명시되어 있다.
성지현성(城池懸城) 조항은 남해현성에 관한 기록으로, 성의 규모와 내력이 수록되어 있으며 정이오(鄭以吾, 1347~1434)의 기문(記文) 전문을 함께 실었다. 창고(倉庫) 조항에는 수창(穗倉), 대동고(大同庫), 진휼창(賑恤倉), 군향창(軍餉倉), 관청고(官廳庫), 육군기고(陸軍器庫), 별향고(別餉庫), 선가고(船價庫), 조창(漕倉)의 위치와 보관된 곡식 등이 기록되어 있다.
△ 남해 읍지에 나타난 관방·군영과 지역 시설
관방(關防) 조항에는 남해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요새들이 기록되어 있다. 노량진(露梁津), 성고개보(城古介堡), 우고개보(牛古介堡), 곡포보(曲浦堡), 상주포보(尙州浦堡), 미조항진(彌助項鎭), 평산포보(平山浦堡) 등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노량진에는 지족암진(只簇巖津)과 선소(船所)의 위치, 그리고 소속 선박과 물품이 기록되어 있다. 성고개보·우고개보·곡포보·상주포보는 위치와 규모가 수록되어 있으나 읍지를 편찬할 당시에는 이미 폐치(廢置)된 상태였다. 미조항진과 평산포보는 위치와 규모뿐 아니라 군사적 기능과 수군 편제까지 함께 기록되어 있어 남해 연안 방어 체계를 이해하는 사료가 된다. 또한 봉수(烽燧) 조항에는 금산봉수(錦山烽燧), 소흘산봉수(所屹山烽燧), 원산봉수(猿山烽燧)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어 남해안 일대의 군사 통신망을 보여준다.
진보(鎭堡) 조항에는 남해의 군영인 미조항진(彌助項鎭)과 평산포보(平山浦堡)의 인원 구성과 선박, 각종 장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조항진의 첨사(僉使)는 무관 종3품으로 군관(軍官) 3명, 진리(鎭吏) 29명, 지인(知印) 14명, 사령(使令) 8명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전선(戰船) 1척과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을 비롯해 돛대와 풍석, 각종 밧줄과 정박 장비, 노목과 노철 등 선박 운용에 필요한 물품이 기록되어 있다. 평산포보의 만호(萬戶)는 무관 종4품으로 군관 2명과 진리 24명, 지인 14명, 사령 8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전선과 병선, 사후선을 비롯한 선박과 장비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남해가 해상 방어의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학교(學校) 조항에는 향교(鄕校)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고, 단묘(壇廟) 조항에는 사직단(社稷壇), 성황당(城隍堂), 여단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李舜臣)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忠烈祠)가 기록되어 있다. 불우(佛宇) 조항에는 보리암(菩提庵), 의상암(義湘庵), 화방사(花芳寺), 용문사(龍門寺)의 위치가 수록되어 있으며, 공해 조항에는 객관(客館), 동헌(東軒), 승화당(承華堂), 향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인리청(人吏廳) 등 관가의 건물이 열거되어 있다. 반면 능묘(陵墓), 궁실(宮室), 누정(樓亭) 조항에는 별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기록은 남해가 군사 방어 거점이면서 동시에 행정과 교육, 제사의 기능을 함께 갖춘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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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지로 살펴본 남해의 교통로와 지역 경제
도로(道路) 조항은 관문을 기점으로 각 지역과의 거리를 설명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진주 (晉州) 창선목(昌善牧)의 경계까지 육로 30리, 수로 1리이며, 서쪽으로는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의 경계까지 육로 20리, 수로 30리이다. 남쪽으로는 전라도 좌수영(左水營)과의 경계까지 육로 25리, 수로 30리이며, 북쪽으로는 곤양군(昆陽郡)과의 경계까지 육로 37리, 수로 2리이다. 또한 서북쪽으로 한양까지는 1,035리, 북쪽으로 감영(監營, 현재 대구)까지는 400리, 북쪽으로 진주 우병영(右兵營)까지는 130리, 동쪽으로 통영(統營)까지는 220리이며 수로(水路)로는 180리라고 설명하였다.
교량(橋梁) 조항에는 해당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도서(島嶼) 조항에는 소도(蘇島)와 비도(榧島)의 위치와 각 섬의 특징이 기록되어 있다. 제언(堤堰) 조항에도 관련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장시(場市) 조항에는 읍성 안에서 4일과 9일에 열리는 5일 장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덧붙여 어염(漁鹽)에 대해서는 방렴(防簾) 61고(庫), 어조(漁條) 4고, 염분(鹽盆) 51좌(坐), 어선 206척이 기록되어 있다. 역원(驛院) 조항에는 덕신역(德新驛)과 노량원(露梁院)이 기록되어 있다. 덕신역은 현에서 북쪽으로 35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곤양 양보역과는 30리 떨어져 있다. 중마(中馬) 4필, 복마(卜馬) 5필, 역리(驛吏) 14명이 기록되어 있다. 노량원은 현에서 북쪽으로 37리에 위치하며, 지금은 조창(漕倉)의 기점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목장(牧場) 조항에는 목장이 없으며, 매년 8월에 말 1필을 해당 부서에서 분양받아 이듬해 4월에 다시 상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승(形勝) 조항에는 금산(錦山)의 위치와 특징이 수록되어 있다.
고적(古跡) 조항에는 고현산성, 관당성, 관음포, 난포폐현, 미조항고진 등의 위치와 규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토산 조항에는 살조개, 문어, 오징어, 전복, 상어, 조기, 향어, 홍합, 해삼과 같은 해산물 외에도 석류, 유자, 비자, 닥종이, 옻 등 지역 특산물이 열거되어 있다. 진공 조항에는 맥문동, 치자, 복신, 개나리열매, 천문동, 전복, 유자, 문어, 생전복, 일찍 따서 말린 미역, 김, 미역귀, 우뭇가사리, 표고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균세(均稅) 조항에는 전세조(田稅條), 대동조(大同條), 어염선세(漁鹽船稅) 등 세금의 액수와 상납 시기가 밝혀져 있다. 봉름 조항에는 관리에게 지급되는 봉급과 관청 운영에 필요한 재정이 기록되어 있다. 수령의 봉급인 아록위(衙祿位)는 25결이며, 쌀은 7섬 2말 5되 4홉, 콩은 2섬 5말 7되 5홉이다. 지방 관아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책정된 공수위(公須位)는 10결이며, 쌀은 2섬 13말 2홉, 콩은 14말 1되 2홉이다. 또한 관아의 수요를 뜻하는 관수(官需)는 227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 1828년 『진주진관남해현』의 기록 체계와 사료적 가치
본 지리지는 이전 시기의 읍지에 비해 사회·경제적 부문과 관련된 기록을 더욱 충실히 수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남해현의 인구와 토지 규모는 물론, 조적·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봉름(俸廩) 등의 항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지역의 조세 구조와 재정 운영 실태를 비교적 상세히 살필 수 있다. 특히 세목의 구분과 수치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조선 후기 지방재정의 운영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다만 인물·선생안·제영 등 인문학적 요소와 관련된 조항이 수록되지 않아, 남해현의 문화적 전통이나 지역 인물의 행적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본 지리지가 행정·군사·재정 중심으로 편찬되었음을 보여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해현은 조선의 남단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만큼, 군사 관련 항목이 매우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군액(軍額)·관방(關防)·진보(鎭堡) 조항에서는 각 진과 선소가 보유한 선박 수, 군관을 비롯한 소속 관리와 군사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당시 지역 군사 체제의 실상을 전한다.
관방(關防) 조항에는 노량진·지족암진·미조항진·평산포보 등 현존 요새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성고개보·우고개보·곡포보·상주포보 등 폐치된 보(堡)의 위치와 규모까지 함께 제시되어 있다. 이는 지리지가 편찬되기 이전 남해현의 군사 공간 구조와 방어 체계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진보(鎭堡) 조항에는 각 진의 소속 인원과 선박 현황, 나아가 사용 물품까지 기록되어 당시 진 운영 방식과 군사 조직의 구체적 실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더불어 창고(倉庫) 조항에서는 군향창·관청고·육군기고·별향고의 위치와 저장 곡식 규모를 밝혀, 조선시대 지방 군대와 수군의 편제 및 병력 유지 체계를 가늠하게 한다. 이처럼 본 지리지는 남해현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군사 운영 체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으로서, 조선 후기 남해안 방어 체제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