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남해군(南海郡) 연혁(沿革)에 깃든 민족의 정기(精氣)
1억 년 지질의 신비 위에 새겨진 남해군(南海郡)의 유구한 역사는,
고난을 이겨낸 군민의 저력이자 도약하는 보물섬의 굳건한 뿌리다
백악기 공룡의 발자국에서 충무공의 마지막 숨결까지 이어온 남해군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고난을 이기고 번영을 일궈낸 거룩한 성전(聖戰)의 기록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6월 19일(금) 15:42

남해군은 한반도의 남단, 보석 같은 섬들 사이에서 빛나는 역사의 중심지로 자리해 왔다. 단순한 자연의 경치를 넘어, 수만 년 세월 동안 인류가 삶을 일구고 국난의 고비마다 민족의 자존을 지켜온 신성한 터전이다. 중생대 백악기 공룡들의 거대한 발자국이 새겨진 지층 위로 선사시대 인류의 기원이 담긴 고인돌이 줄을 잇고, 고려 팔만대장경 판각과 조선시대 충무공의 마지막 호국 정신이 서린 노량의 물결까지, 남해의 역사는 곧 우리 민족사가 응축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해양과 대륙을 잇는 가교로서 남해군은 외세의 침탈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방패가 되었고, 풍요로운 해양 문화를 꽃피우는 요람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보물섬 남해'의 진정한 가치는 그 수려한 풍광 이면에 켜켜이 쌓인 연혁(沿革)의 층위에서 기인한다. 지질형성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남해의 여정을 되짚으며, 이 땅에 깃든 불멸의 숨결과 그 속에 담긴 시대적 함의를 깊이 있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지질형성기와 선사시대, 생명과 인류의 여명


남해(南海)의 연대기는 인류의 기록을 훨씬 앞지르는 중생대 백악기(약 1억 1천만 년 전)의 거대한 서사(敍事)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남해는 거대한 호수와 비옥한 습지가 발달한 평원이었다.
그 증거로 창선면(昌善面) 가인리(加仁里)와 추도(楸島) 일대에는 당시 생태계를 지배했던 공룡들의 발자국 화석과 거대한 나무화석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는 남해의 지반이 지질학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며, 고생물학적으로도 세계적 가치를 지닌 천혜의 보고임을 증명한다.
인류(人類)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다. 남해군 남면(南面) 평산리(平山里)에서 발견된 석영제(石英製) 몸돌석기는 남해의 해안선이 구석기 인류에게 풍요로운 채집과 수렵의 장소였음을 말해준다.
이어지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는 남해 전역에 걸쳐 거석문화의 정수인 고인돌이 분포하게 된다.
이동면 다정리(茶丁里), 남면 평산리(平山里), 남해읍 심천리(深川里)와 평현리(平峴里), 창선면 당항리(堂項里), 고현면 대사리(大寺里) 등지에서 확인된 수많은 고인돌은 당시 남해에 이미 강력한 족장(族長) 중심의 정치 체제와 정교한 공동체 문화가 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원삼국시대의 패총(貝塚, 서도마) 등 유적으로 미루어 볼 때, 남해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음을 알 수 있으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어로(漁撈) 활동을 전개하며 독자적인 해양문화(海洋文化)를 구축해 왔음을 보여준다.



△ 삼한 및 가야시대, 변한의 기상과 소가야의 해상 거점


삼한시대 남해는 변한(弁韓)의 12개 부족 국가 중 군미국(軍彌國) 또는 낙로국(樂奴國)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한국정신문화원'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고성과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고자미동국(古自彌凍國)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남해가 고대부터 인근 내륙 지역과 긴밀한 정치적·경제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가야시대(加耶時代)에 접어들면서 남해는 소가야(小伽倻) 연맹체의 핵심적인 해상 관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오늘날 고성군과 사천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소가야는 남해를 통해 일본(日本) 열도 및 대륙과의 교역을 도모했다.
남해의 해안선 곳곳에는 이 시기 철기 문화와 토기 제작 기술이 유입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는 가야가 지향했던 해양 제국의 꿈이 남해라는 든든한 거점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방증한다.



△ 삼국 및 남북국시대, '남해(南海)' 명칭의 확립과 행정 체제의 정비


신라(新羅, BC57~935년)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690년(신문왕 10)에 남해는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 칭해졌다.
당시 남해는 청주(菁州: 현 진주) 태수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내포현(內浦縣)과 평서산현(平西山縣)이라는 2개의 영현(領縣)을 관할하는 독립된 군(郡)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신라(新羅)는 전국 지명에 대한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일환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남해군(南海郡)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속현인 내포현(內浦縣)은 난포현(蘭浦縣)으로, 평서산현(平西山縣)은 평산현(平山縣)으로 고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해(南海)' 지명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지리적 명칭을 넘어 국가 행정 체계 속의 공식 지명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판각과 항몽의 보루
 

 고려시대(高麗時代, 918~1392), 남해는 외세의 침탈에 맞선 국가적 결사 항전의 무대였다.
 995년(성종 14), 남해는 삼남도(三南道) 진주(晉州)의 영현인 남해현(南海縣)으로 개칭되었다.
 이 무렵 현재의 창선면은 유질부곡(有疾部曲)에서 창선도(昌善島)로 불리며 진주(晉州)의 속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남해현이라 개칭하고 현령(縣令)을 두어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였다.
 고려 후기, 남해는 민족의 영적 지주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판각하는 성소(聖所)가 되었다.
 몽골의 2차 침입으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소실되자, 고려는 국난 극복의 염원을 담아 1236년부터 1251년까지 남해에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판각을 진행하였다.
 또한 1269년(원종 10)에는 창선도에 보관하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로 이송했으며, 1270년 삼별초(三別抄) 항쟁 당시에는 유존혁(劉存奕) 장군이 남해에 주둔하며 80여 척의 전선(戰船)으로 항전을 준비하다가 진도 용장성(龍藏城)의 함락과 함께 제주도로 이동하기도 했다.
 충렬왕 시기(1275~1308년)에는 고성현의 철성(鐵城, 현 통영)이 남해현에 병합되었다가 복귀하는 변동이 있었고, 충선왕(忠宣王) 즉위년에는 창선현(彰善縣)이 왕의 이름자와 유사하여 그를 피해 흥선현(興善縣)으로 개칭되었다.
 1358년(공민왕 7)에는 왜구의 침탈로 남해현을 진주 대야천(大也川 = 鐥川,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 부곡으로 행정 관서를 임시로 옮겨야 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러나 1383년, 해도원수 정지 장군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선 17척을 격파하며 관음포 대첩(觀音浦大捷)에서 승리하여 남해안의 평화를 수호하였다.
 


△ 조선시대(朝鮮時代), 국방 요새화와 역동적 변천사
 

 조선시대 남해는 해안 방어의 중추적 요새이자 중앙 정부의 행정적 실험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태종(太宗) 대부터 남해는 왜구의 침입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관리되었다.
 1404년(태종 4) 구라량만호 임덕수(任德秀)가 남해 현령을 겸임하며 군사적 방비 체계를 구축하였고, 1406년(태종 6)에는 도관찰출척사를 지낸 최유경의 장계에 힘입어 남해현성(南海縣城: 비란의 고현산성)이 비로소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행정구역(行政區域)의 변천 또한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1414년 하동현과 남해현이 병합되어 하남현(下南縣)이 되었으나, 이듬해인 1415년에는 남해현과 금양현을 통합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 칭하였다.
 1417년 해양현에서 금양현이 분리되면서 다시 남해현으로 개칭되었고, 세종(世宗)대에 들어와 또다시 변화가 일었다. 1419년(세종 1)에는 남해현과 곤명현을 병합하여 곤남군(昆南郡)으로 개편하며 지방 통치 역량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남해라는 지리적 특수성과 방어적 가치를 고려하여 1437년(세종 19) 다시 남해현으로 복귀하는 결정을 내렸다.
 안정기에 접어든 남해는 1439년(세종 21) 현 남해군청 자리에 남해읍성을 축성하며 행정 중심지를 옮겼고, 1459년(세조 5)에는 남해현성을 증축하여 더욱 견고한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조선 중기, 남해는 민족의 명운을 건 결전지가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장렬히 순국하며 조국을 구했다. 조선 후기에도 남해의 저항 정신은 이어졌다. 1862년 삼정문란(三政紊亂)에 맞서 일어난 남해민란은 민초들의 강인한 자생력을 보여주었으며, 1894년 11월 갑오농민전쟁 당시 정용태(鄭龍泰) 남해접주(南海接主)가 남해 동학군을 인솔하여 고승당산전투(高昇堂山戰鬪)에 참여한 사실은 정의를 향한 남해인의 결기를 대변한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 마침내 남해군으로 개칭되었고, 1906년 진주목 소속의 흥선도(興善島)가 남해군에 편입되어 창선면으로 개칭됨으로써 오늘날 남해의 골격이 완성되었다.
 


△ 현대(現代), 독립의 함성과 보물섬으로의 도약
 


 일제의 침탈 아래에서도 남해의 항일 정신은 뜨거웠다.
 1919년 4월 3일, 설천면 문항리에서 시작된 남해 최초의 3.1운동은 군민들이 하나 되어 민족 자결(民族自決)의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해방 후 1950년 8월 24일 한국전쟁의 비극 속에서 남해경찰서가 북한군에 점령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 군민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를 극복하며, 재건에 힘썼다.
 오늘날 남해군의 비약적 발전은 1973년 6월 22일 남해대교(南海大橋) 개통과 함께 시작되었다. 육지와 이어진 남해는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니라, 전국적인 관광지(觀光地)로 부상하였다. 1973년 이동면 갈도(葛島)가 통영시(統營市)에 편입되는 변화가 있었고, 1979년 5월 1일에는 남해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1읍 7면 체제가 되었다.
 이후 1986년 4월 1일 상주와 미조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의 1읍 9면 체제가 완성되었다. 1990년대 후반 추진된 남해스포츠파크와 독일마을 조성은 남해군의 산업 구조를 '관광·스포츠' 중심으로 재편한 핵심 프로젝트였다.
 특히 2003년 4월 28일 개통된 창선·삼천포대교는 남해를 육지와 긴밀하게 연결하며, 이곳을 휴양과 레저가 어우러진 '보물섬'으로 도약시키는 이정표가 되었다.
 


△ 역사적 자긍심으로 여는 남해의 새로운 미래

 
 남해군(南海郡)의 역사는 거친 바다와 맞서 싸우며 생명을 이어온 민초(民草)들의 인내와 나라가 위태로울 때 기꺼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호국 정신이 켜켜이 쌓인 대서사시다.
 1억 년 전 공룡(恐龍)의 숨결부터 오늘날의 현대식 대교에 이르기까지, 남해는 단 한 순간도 역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민족사(民族史)의 주요한 고비마다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관음포의 승전보와 노량의 붉은 노을, 그리고 설천면의 독립 만세 소리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의 소중한 뿌리가 되었다.
 이제 남해군(南海郡)은 과거의 찬란한 유산을 단순히 보전(保全)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를 현대적인 관광 콘텐츠와 결합하여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보물섬'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고결한 역사적(歷史的) 가치와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상징한다.
 우리는 선조들이 물려준 이 위대한 발자취를 가슴 깊이 새기며, 남해군이 남해안 시대의 주역으로서 전 세계에 그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찬란한 역사(歷史) 위에 세워질 남해의 미래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더욱 굳건히 하는 희망의 등대가 될 것이다.
 또한 사료(史料) 속에 살아 숨 쉬는 이 기록들이 군민의 긍지와 어우러져, 남해군의 앞날을 밝히는 영원한 등불이 되기를 기원한다.


추기(追記) -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에 나오는 남해군 연혁』
 
1) 原文: 南海郡 沿革·郡名

2) 원문 번역: 남해군(南海郡)의 연혁 및 군명

 남해군은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이 설치되면서 행정구역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경덕왕 16년(757)에 지명을 남해군(南海郡)으로 고치고, 난포현(蘭浦縣)과 평산현(平山縣) 두 현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강주(康州)에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현령(縣令)을 두어 지방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7년(1358) 왜구의 침입이 잦아져 지역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주민들은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현재의 하동군 북천면 일대)으로 옮겨가 임시로 거주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4년(1414)에는 하동현과 통합되어 하남현(河南縣)이라 하였다. 이후 하동현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듬해인 태종 15년(1415)에는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으로 옮겨 통합되면서 해양현(海陽縣)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태종 17년(1417)에 금양부곡이 다시 진주에 귀속되면서 본래의 명칭인 남해현(南海縣)을 회복하였다. 세종 원년(1419)에는 곤명현(昆明縣)과 통합되어 곤남군(昆南郡)이 되었으나, 세종 19년(1437)에 다시 분리되어 남해현이 설치되었고 현령도 다시 두었다. 연산군 4년(1498)에는 남해 출신 인물과 구례 사람 배목인(裵目仁)이 반란을 모의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현의 등급이 강등되어 현령 대신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중종 2년(1507)에 다시 현령을 두어 원래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고종 32년(1895, 개국 504년)에는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행정 책임자의 직함을 군수(郡守)로 변경하였다. 이어 광무 11년(1907)에는 진주군 창선면(昌善面)을 남해군에 편입하였으며, 이로써 남해군은 8개 면과 185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남해군은 역사적으로 전야산(轉也山), 해양(海陽), 남해(南海)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별호로는 전산(轉山), 윤산(輪山), 화전(花田) 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명칭들은 남해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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