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진 마음의 빚, 삶의 마지막까지 베풀며 갚겠습니다"
"억울하게 경찰서에 잡혀간 향우를 빼내주고, 일자리를 구하러 무작정
상경한 남해 사람들에게 숙식을 해결해 주고 취직을 알선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 돈 10원도 고향 사람들에게 받은 적이 없었으며,
경조사비조차 단 한 번도 받지 않는 엄격한 철칙을 지켰다.
정리 / 이태인, 홍성진 기자
발행연월일 : 2026년 07월 31일(금)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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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과 남해FM 공동체라디오가 기획한 특집 방송 [남해인 초대석]의 특별한 손님, 충북 단양에서 단양관광호텔 에델바이스를 경영하는 이환성 회장(80)이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오랜 세월 고향을 가슴에 품어온 한 남해인의 깊은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혹은 한 기업을 이끄는 회장이기 이전에 오롯이 한 사람의 남해인으로 고향 땅을 다시 밟은 그의 눈시울은 해질녘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남해대교를 건너오는데 코끝을 스치는 짠 흙내음에 가슴이 먼저 울렁거렸습니다. 제 나이 여든이 되고 보니 해질무렵 붉은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유독 고향 산천과 두고 온 얼굴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남해인 이환성 회장. 그의 삶은 남해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하며, 가문의 유산과 칠전팔기의 시련, 그리고 고향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과 나눔은 한 편의 서사시다. 본지는 그의 삶을 통해 남해의 역사와 한 세대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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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세민못에 아로새겨진 선조의 나눔
이환성 회장의 가문은 남해의 교육과 복지의 뼈대를 세웠다.
친조부인 서홍 이시봉 선생은 남해향교 전교를 지내며 다초초등학교 부지를 대가 없이 기부했고, 가뭄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자신의 전답을 아낌없이 내놓아 장평소류지(세민못)를 건립했다.
가마니 공장과 양조장, 염전을 운영하던 지역의 재력가였던 조부는 매년 보릿고개가 오면 어린 이 회장에게 쌀과 보리를 들려 인근 마을의 어려운 집에 보내곤 했다.
"어릴 때는 그 심부름이 참 싫었습니다. 남들은 노는데 왜 나만 이 일을 해야 하나 짜증도 났지요.
하지만 조부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더군요.
가난한 농민들과 이웃을 위해 전부 나누어 주셨던 겁니다." 장평소류지 제방 두둑에 심어진 왕벚꽃나무와 주민들이 빨래를 하고 우물을 긷도록 만든 물고랑에는 선조의 세심한 배려가 숨쉬고 있다.
어린 시절 조부의 손을 잡고 동네를 지날 때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 절을 하던 풍경은 어린 이 회장의 가슴속에 나눔의 가치를 깊이 각인시켰다. 외가 역시 남해 인재 양성의 산실이었다. 외증조부 최효석 선생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수제자로서 민족주의 유학자였으며,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는 난영초등학교, 삼동초등학교, 미조초등학교, 다초초등학교, 이동초등학교, 상주초등학교 등 남해군 내 6~7곳에 달하는 초등 교육기관의 설립과 증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환성 회장은 이렇듯 선대 친 외가 와 어머니가 다닌 이동초등학교의 기념관 건립에도 시설비 2,000만 원과 준공식 기념품으로 220만원을 쾌척했다. 남해의 인재를 키워낸 든든한 토양이 바로 그의 가문에서 시작된 셈이다.
# 기억, 6·25의 비극과 혹독한 가난, 시련을 딛고 일어선 잡초의 근성
그러나 평온했던 가문에도 잔인한 파도가 밀려왔다.
미군정기 남해국립농업중학교(5년제) 교감으로 재직하며 선소와 차산 일대에 토마토 재배기술을 보급해 농가 수입의 바탕을 깔아주었던 부친이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끌려가던 부친은 배급 주던 주먹밥을 함께 끌려간 제자들에게 건네고 기력이 쇠잔한 상태에서 지리산 입구에서 군경과의 총격전 끝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선친은 서른에 작고 하시고 당시 어머니는 스물세 살의 어린 나이에 자녀 세명을 홀로 건사하셨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의 부재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조부마저 세상을 떠난 후, 이 회장은 남해읍 남변동 방 두 칸과 부엌 하나 딸린 초가집에서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와 살아야 했다.
추운 겨울에도 땔감이 없어 냉골 방 벽면을 기어 다니는 노네기(노래기)를 바라보며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배가 너무 고파 고구마 서리를 많이 했습니다. 고구마 두둑 옆으로 손을 밀어 넣어 제일 큰 것만 잘라내고 다시 흙을 덮은 뒤 비가 오길 기다리는 나름의 도(도리)가 있었지요. 나중에 어른이 된 후 그 집 아들들의 취직을 시켜주며 어릴 적 서리했던 고구마 빚을 갚았습니다."부산으로 유학 간 친구들이 그리워 방학이 끝나면 눈물을 흘렸고,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치다 유림동 고개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던 할머니에게 붙잡혀 돌아오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75일이나 결석해 졸업조차 불투명했으나, 아버지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교사들이 교무회의를 열어 그를 졸업시켜 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서울로 시험을 치르러 갈 때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여수로 가는 10시 경진호 배를 탄 뒤, 오후 5시 기차를 타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 이튿날 새벽 4시 서울역에 내렸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갈 곳이 없어 퇴계로 대한극장까지 걸어가 영화 포스터를 보며 날이 새기를 기다리던 고단했던 청춘의 기억은 훗날 그를 어떤 시련도 견뎌내는 강인한 잡초로 키워냈다.
# 기억, 청와대 시절의 이야기와 고향 사람들을 향한 보이지 않는 손
절망의 문턱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인연이 찾아왔다.
큰집 누나의 남편이자 5·16 직후 청와대 경호차장을 지낸 신동관 전 경호차장과의 만남이었다. 이 회장의 눈치 빠르고 성실한 모습을 아꼈던 신동관 경호차장은 그를 곁에 두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회장의 신원조회를 하던 중, 그가 국가를 위해 일하다 희생된 남해 농업중학교 교감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의 가문 내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너 처갓집은 인물이 참 좋구나"라며 그를 어여삐 여겼고, 이 회장은 청와대에서 권력의 핵심을 보조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회장은 청와대 경호실의 '멍통 전화(대통령 직접 연결 전화)'와 자신의 위치를 오직 고향 남해 사람들을 돕는 데만 사용했다.
억울하게 경찰서에 잡혀간 향우를 빼내주고, 일자리를 구하러 무작정 상경한 남해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고 취직을 알선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 돈 10원도 고향 사람들에게 받은 적이 없었으며, 경조사비조차 단 한 번도 받지 않는 엄격한 철칙을 지켰다.
"고향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순간 순수성이 변합니다.
저는 남해 분들에게 밥은 얻어먹었을지언정 돈은 10원 한 닢 받지 않았고, 경조사비도 절대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고향 사람들에게 당당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훗날 유명 인권변호사로 존경받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의 인연도 깊다.
한전 사원들이 주택단지를 만들려다 계약금이 없어 사기를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5억 원을 선뜻 건네며 사업을 도왔고, 당시 조합을 변호하던 조영래 변호사와 깊은 신뢰를 쌓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를 몸소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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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남해대교와 남해각,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단들
오늘날 남해의 지형을 바꾼 역사적 사건 뒤에는 늘 이환성 회장과 신동관 경호차장의 숨은 공헌이 있었다.
1967년 여름, 저도 휴가지에서 섬이라는 이유로 풍랑이 불면 제때 복귀하지 못할까 봐 고향 남해에 가지 못하던 신동관 경호차장의 사정을 들은 해군 장성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리 건설을 건의해 남해대교 건설이 논의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남해대교 건설의 뒤편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숭고한 역사적 진실이 숨어 있다. 남해대교 건설은 신동관 경호차장의 사정을 접한 해군 장성들의 건의로 물꼬를 텄지만, 당시 정치권과 야당에서는 "남해에 무슨 산업이 있다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다리를 놓느냐"라며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엄청난 예산 부담과 반대를 무릅쓰고 남해대교 건설을 강행한 이유는 바로 '남해는 민족을 구한 충무공의 마지막 승전지'였다는 사실이다.
이환성 회장은 남해 노량 바다는 나라를 구한 충무공이 마지막 피를 흘리며 전사한 성지였기에, 국난 극복의 충절과 넋을 기리는 기념탑이자 상징적인 다리로서 남해대교를 건설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결단이 이었기 때문이라 전했다. 이 회장은 "남해대교의 탄생은 단순한 인간적 관계가 아니라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순국지였고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남해대교 개통식 날짜를 바꾼 주역이 바로 이환성 회장이다. 당초 정부는 1973년 6월 25일을 개통식 날로 정했으나, 이 회장은 신동관 경호차장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6월 25일은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제 아버지가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날입니다.
남해의 가장 역사적이고 경사스러운 날을 어떻게 6월 25일에 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개통식에 가지 않겠습니다."그의 간곡하고 결연한 설득에 신 경호차장은 청와대에 연락해 개통식을 6월 22일로 앞당겼다고 한다.
개통식 당일 구경꾼 인파가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 다리가 흔들리며 움직이는 바람에 비명이 터져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현수교의 안전한 유연성 덕에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며 당시를 추억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추억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남해각 이름에 얽히 비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인연이 있었던 해태그룹이 휴게소를 지어주며 이름을 '해태각'으로 붙이려 하자 "고향에 대통령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다리를 놓는데 사기업 이름을 붙일 수 없다"라며 강력히 반대해 오늘날의 '남해각'으로 이름 붙여 남해군에 기증하게 했다고 한다.
아울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명나라 등자룡 장군을 기리기 위해 관음포 한 섬에 유업비를 세우는 데 8년의 세월을 바치는 등, 그는 남해의 역사와 정기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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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마지막까지 나눔을 멈추지 않는 '묵묵한 실천가'의 길
여든의 나이에 접어든 이환성 회장이 고향 군민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은 오직 하나, '마지막까지 고향을 위해 봉사하고 빚을 갚는 묵묵한 실천가'라는 수식어다.
그는 이미 1986년부터 남해의 소년소녀가장들을 서울로 초청해 63빌딩 구경과 갈비를 사주고, 서울 야구장 전광판에 "남해군 소년소녀가장 방문" 문구를 띄워 시골 아이들에게 꿈과 자존감을 심어주었다.
최근 그는 경남 사회복지 제단 중앙회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가입하며 1억 원을 현금으로 일시 지정 기탁했다. 이 기부금은 남해군의 소년소녀가장과 한부모 가정 자녀들을 위해 온전히 쓰이게 된다.
그는 2006년 서울로 상경한 남해 출신 대학생들을 위해 70억 원 가치의 남해군학사를 건립하려다 무산되었던 아픔이 여전히 가슴속 빚으로 남아있다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정신이 온전할 때 고향에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싶었습니다. 남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이라도 해주고,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발목 잡지 말고 박수 쳐 주는 따뜻한 남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억, 격동의 현대사를 관통한 남해의 거목, 묵묵한 헌신으로 남긴 영원한 감사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 그 뜨거운 중심에 서서도 그의 시선은 늘 고향 남해만을 향해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이환성 회장의 굴곡진 인생사는 오직 고향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던진 고결한 헌신의 역사였다.
정치나 권력의 야망 대신 오롯이 고향 사람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그의 삶은 오늘날 남해 군민과 전국 향우들의 뇌리 속에 비할 바 없이 깊은 감동과 영원한 감사의 인상을 아로새겼다.
여든의 완숙한 나이에도 고향을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신동관 청와대 경호차장 때에 매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종로구 이화동 자택을 20~30명 향우들이 찾아왔다.
이완성 회장은 상경한 18살부터 결혼까지 13년간을 어려운 향우들의 애환과 차, 식사까지 빠짐없이 챙겨준 순남해인이다. 이번 1억 원 기탁을 한 것도 부인과 자식들이 그간 너무 고생하였으니, 이젠 아빠 자신을 위한 일 을 하라고 방목해 주었다고 한다.
남해군 소년소녀가장과 한부모 가정을 위해 '아너 소사이어티' 1억 원 일시 지정 기탁을 단행한 것에 이어, 잊혀가는 흩어진 향우들의 발자취와 남해인의 정체성을 올곧게 정립하기 위한 '남해 향우사' 집필 소식을 접하고 남해문화원에 500만 원의 성금을 선뜻 쾌척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의 역사와 후학을 세우는 일에 마음과 뜻을 아낌없이 보태는 그의 행보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되고 있다.
고향 남해를 향한 이환성 회장의 뜨거운 눈물과 감동적인 일대기, 그리고 남해대교에 얽힌 생생한 비하인드 스토리 전편은 아래 QR코드를 스캔하여 유튜브 [남해인 초대석] 본방송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 위 QR코드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스캔하시면 남해FM 유튜브 채널의 [남해인 초대석 - 이환성 회장 편] 생방송 풀영상을 바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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