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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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편찬 남해군읍지는 남해 행정변천과 사회·문화적 특성 반영, 지역사 연구와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남해 읍치(邑治)는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삼동면 난현(蘭縣, 난포현)에 설치되었고(初設),
이어 남면 평현(平縣, 평산현)으로 옮겨졌다(再移).
세 번째는 고현의 성산(城山)을 거쳐(三遷),
마지막으로 망운산 아래 지금의 위치에 정착하게 되었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2월 05일(금) 14:30
▲ 1907년 『경상남도 남해군읍지』에 수록된 남해군 지도

1907년에 편찬된 경상남도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는 남해군의 역사와 지리, 풍속, 인물, 문화적 환경을 기록한 중요한 지역사 자료이다. 편찬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본문 연혁 기록 중 등장하는 '광무(光武) 11년'이라는 표현이다. 광무 11년은 1907년에 해당하므로, 본 읍지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제에 나타난 '경상남도 남해군'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말 지방제도 개편(1895년, 고종 32년)의 결과이다. 기존의 남해현이 남해군으로 승격되고, 경상도가 경남과 경북으로 분리(1896년)되면서 남해군은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본 읍지는 필사본으로 1책 12장(p24)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부분에는 남해군의 채색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읍지의 구성 항목은 위치경계, 지세, 연혁, 읍치, 산령, 하천, 도서, 인정풍속, 물산, 사단, 문장(文章), 치적, 사찰 등 총 2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체계는 단순한 행정기록을 넘어 지역 문화와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보여 준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 글에서는 『남해군읍지, 1907년)』에 기록된 남해군의 모습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남해군의 지리와 자연환경, 둘째, 남해군의 역사와 행정 변화, 셋째, 남해 지역의 사회·문화와 인물, 넷째, 고적·사찰 및 비갈(碑碣) 그리고 읍지에 관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남해군의 전반적 실상을 파악하는 동시에, 남해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907년 『경상남도 남해군읍지』에 수록된 남해군 자연환경
▲ 1907년 『경상남도 남해군읍지』에 수록된 남해군 사찰

△ 남해군(南海郡)의 지리와 자연환경



남해군은 경남도 동남단, 하동부(河東府)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서남쪽으로는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돌산도(突山島), 서쪽으로는 전라도 광양군 대인도에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곤양군(昆陽郡), 북동쪽으로는 사천현(泗川縣)과 고성부(固城府)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대양(大洋)에 면해 있다.
면적은 남북으로 약 100리, 동서로 70리에 이른다.
읍지의 산령(山嶺) 항목에는 광양군의 백운산에서 이어지는 망운산(望雲山)과 그로부터 뻗어 나온 원산(猿山, 납산 또는 호구산), 삼봉산(三峰山), 녹두산(鹿頭山), 원산에서 이어지는 금산(錦山), 소흘산(所屹山, 1895년 영남읍지와 1899년 남해군읍지에는 雪屹山으로 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하천 항목에는 망운산에서 발원하는 심천(深川), 봉천(鳳川), 대천(大川), 금산에서 발원하는 동천(洞川), 원산에서 발원하는 장천(長川)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도서 항목에는 소도(蘇島), 장도(長島), 소치도(蘇峙島), 세존도(世尊島), 호도(虎島), 조도(鳥島), 갈도(葛島), 노도(櫓島) 등 남해군 소속 섬들의 위치와 특징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 남해군의 역사와 행정 변화
▲ 1907년 『경상남도 남해군읍지』에 수록된 남해군 행정 변화

남해군읍지(1907년)의 연혁(沿革) 기록에 따르면, 남해지역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이 설치되면서 국가의 통치 체계에 편입되었다.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대에는 현재의 이름인 남해(南海)로 개칭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는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공민왕 대에는 왜적에게 고을의 일부 땅을 빼앗기는 시련을 겪었다.
조선 태종 대에는 해양현(海陽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남해현(南海縣)으로 칭하였다. 연산군 4년(1498)에는 현감(縣監, 종6품)으로 강등되었다가, 중종(中宗) 2년(1507)에는 현령(縣令)을 다시 두었다.
19세기 말 고종 32년(1895)에는 현령(종5품)이 군수(郡守, 종4품)로 개편되었으며, 광무 11년(1907, 정확한 편입은 1906년 9월 28일)에는 진주 창선면(昌善面)이 남해군에 편입되면서 남해군은 총 8면 185동으로 확정되었다.
읍치의 이동에 대해서도 읍치 항목에 상세히 적어 놓았다. "기록에 따르면 남해 읍치(邑治)는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삼동면 난현(蘭縣, 난포현)에 설치되었고(初設), 이어 남면 평현(平縣, 평산현)으로 옮겨졌다(再移).
세 번째는 고현의 성산(城山)을 거쳐(三遷), 마지막으로 망운산 아래 지금의 위치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처럼 읍치의 이동 과정은 남해 지역 행정의 변천을 보여 주는 중요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 남해 지역사회·문화와 인물



인정풍속(人情風俗) 항목에서는 남해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가치관을 기록하였다.
남해 주민들은 농사와 길쌈을 숭상하며, 예스럽고 질박한 생활을 선호하였다.
땅이 비옥하고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곤궁하지 않은 지역임을 밝히고 있다.
물산 항목에서는 곡식과 과실, 약재, 해산물 등이 포함되며, 특히 해삼, 김, 미역, 굴, 대하, 조개, 게, 민어, 대구, 숭어, 조기, 문어, 낙지 등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단(祀壇), 우단(雩壇, 비를 기원하던 제단), 신사(神祠) 항목에는 지역 종교와 제례 시설이 상세히 소개된다.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제석당(帝釋堂), 병사당(兵使堂), 신사로는 성내(城內)와 금산(錦山) 등지에 있는 칠신당(七神堂) 등이 있으며, 봉대(烽臺) 항목에는 소흘산봉수, 원산봉수, 금산봉수가 기록되어 군사적 신호 체계도 소개된다. 진보(鎭堡) 항목에는 수군첨절제영이 있던 미조항진(彌助項鎭)과 수군만호(水軍萬戶)가 관장하던 평산진(平山鎭)의 위치 및 석축의 규모, 전선 1척과 병선 2척, 사후선(伺候船) 1척이 있던 선소포(船所浦) 등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지역 인물 관련 기록에서는 영조(英祖) 대 정려(旌閭)를 받은 열녀 연대(蓮臺), 남해 출신 관료 이충걸(李忠傑), 이급(李伋), 문장가 유명규(柳明奎) 등의 활동상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치적(治蹟) 항목에는 선조(宣祖) 대 박천기 부터 정조(正祖)대 안윤복(安允福)까지 7인의 수령 치적과 업적을 기록하여 행정과 문화적 기여를 조명하였다.



△ 고적과 사찰, 비갈(碑碣) 그리고 읍지
 
남해 용문사
남해 화방사

 고적(古蹟) 항목에서는 금산(錦山)에 관한 기록이 특히 주목된다. 금산은 원래 보광산(普光山)이라 불리던 곳으로, 신라 고승 원효(元曉)가 머물며 암자를 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왕이 되기 전 이 산에서 부서(符瑞, 상서로운 조짐)를 얻어 이후 금산(錦山)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903년(광무 7)에는 소령전(昭靈殿)을 세워 태조 위패를 봉안하고 인수전(仁壽殿)을 설치해 황실 가족들의 장수와 무병을 기원하였다.
 비갈(碑碣, 돌에 새겨 세우는 비석) 항목에는 1598년(선조 31) 관음포(觀音浦) 앞바다에서 전사한 이순신(李舜臣) 기념 비각, 1599년(선조 32) 명(明)나라 장수 장량상(張良相)이 건립한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남해에 유배된 자암(自庵) 김구(金絿)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자암선생김구적려유허비(自庵先生金絿謫廬遺墟碑)가 기록되어 있어 지역사와 인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원우(院宇) 항목에는 충렬사(忠烈祠), 봉천사(鳳川祠), 운곡서원(雲谷書院) 등이 소개된다.
 충렬사는 이순신 위패, 봉천사는 남해 유배 인물 이이명(읍지에는 이건명으로 기록) 영정, 운곡서원은 유학자 정희보(鄭稀寶) 제향을 위한 사당이다.
 마지막 사찰 항목에는 원산(호구산)의 용문사(龍門寺), 망운산의 화방사(花芳寺) 등 주요 사찰들의 위치와 연혁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남해읍지는 본 읍지 외에도 여러 종류가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16세기 전반의 『신증동국여지승람,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 수록본, 정조대인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남해현읍지, 1832년에 제작된 경상도읍지, 1871년과 1895년에 간행된 영남읍지 수록본, 그리고 19세기 말(1899년)에 나온 또 다른 『남해읍지』 등이 있다.
 이와 비교할 때 1907년의 남해군읍지는 체제와 구성이 전혀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조선 후기 지방 읍지들이 주로 다루던 사회·경제적 내용은 거의 빠져 있으며, 대신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들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여타 남해 읍지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독창적인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지역사 연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의 자료적 가치와 의의
 

 본 읍지는 20세기 초 남해군의 지리, 역사, 인물, 풍속, 문화, 군사시설까지 다양한 영역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드문 사례이다.
 기존 남해읍지들과 비교하면 사회·경제적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고, 지역 역사와 문화 중심의 기록이 풍부하여 당시 지역 변화와 남해군의 특성을 살피는 데 매우 유용하다.
 특히 읍지의 체계와 구성, 세부 기록 방식에서 기존 읍지와 뚜렷한 차별성을 보여 주며, 20세기 초 읍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본 읍지는 단순한 지리서나 역사서에 그치지 않고, 남해군 전반의 사회적·문화적 환경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지역사 연구뿐 아니라, 교육 자료로써도 활용 가치가 높아, 지역 문화와 역사를 폭넓게 소개하고 학문적 논의와 교육적 활용에도 매우 유익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를 통해 남해군의 특수성과 시대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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