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 황희 정승의 삶은 권위가 아닌 경청과 성찰을 통해
공동체를 이끌고 배움을 실천한 리더십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황희 정승은 정치적 권력의 중심에서도 평생 배우는 태도로
중용과 포용의 가치를 실천한 교육적 인물이었다.
2026년 01월 02일(금)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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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명재상 방촌 황희(1363~1452)는 '청렴, 중용, 경청, 포용'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모범적인 정승'으로만 기억하기보다는, 굴곡진 삶 속에서도 성찰과 배움을 놓지 않았던 인간적인 면모에서 교육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필요가 있다. 황희는 정치와 학문을 넘나들며 '삶으로 배우고 배움을 실천한' 참된 리더였다.
그의 경청과 포용은 다양한 의견을 아우르며 공존을 이끄는 통합의 리더십으로 나타났다. 그는 고려 말 관료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136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총명하고 학문에 뜻이 깊었던 그는 성균관(成均館)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고, 1389년 26세에 문과 대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이라는 격변 속에서 새로운 정권과 충돌하며 여러 차례 낙향, 파직, 유배를 겪었다.
1405년(태종 5년), 권신 하륜(河崙)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남원(南原)에 유배된 그는 이후 강원도와 전라도를 전전하며 오랜 시간 관직에서 멀어져야 했다. 그러나 남원은 단순한 유배지가 아니라, 그에게 깊은 성찰과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광한루(당시 광통루로 불린 누각)의 정비에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훗날 전라도 관찰사였던 정인지(鄭麟趾)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광한루(廣寒樓)'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일화도 있다. 황희는 이 시기 조용한 삶 속에서 인간, 정치, 학문을 깊이 사색하며 배움에 전념했다. 황희의 참모습은 태종과 세종 시대에 더욱 두드러졌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도 그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해 다시 기용했다.
세종은 그를 영의정(領議政)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 등 총 24년간 정승으로 중용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전례 없는 장기 재임이었다. 그는 세종의 이상 정치 실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집현전 설치, 토지 제도 개편 등 주요 개혁의 이면에는 실무 관료, 학자, 군주 사이를 조율한 그의 노력이 있었다.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중재자이자 조율자로서, 그리고 세종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정책 결정에 적극 참여하며 조선 정치의 균형을 이끌었다.
황희의 지도력은 단호함보다는 설득, 명령보다는 신뢰에 기반했다. 그는 타인의 실수를 따지기보다 의도를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자각을 유도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온건하다'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그의 중재력은 잦은 갈등 속에서도 조정의 평온을 유지하게 했고, 왕이 안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오늘날 교육 현장의 '경청하는 교사'의 모델과도 맞닿아 있다. 학생은 단순히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이해하고 진로와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로 인식되어야 한다. 황희의 정치관은 이 같은 현대적 교육 철학과도 깊이 연결된다.
그는 명재상(名宰相)으로 존경받았지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세종 25년(1443), 아들 황수신(黃守身)의 뇌물 사건이 드러나자 "내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라며 자진 사직을 청했다. 이는 오점이었지만,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성찰한 태도로 평가된다. 또 사위 서달(徐達) 관련 사건 등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정황도 있어 일각에선 청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상과 현실, 원칙과 유연함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했고, 비판을 감수하며 책임을 다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성찰할 줄 아는 사람, 그것이 곧 황희였다.
말년에 그는 경기도 파주 반구정(伴鷗亭)에서 여생을 보냈다. '갈매기와 벗한다'라는 뜻의 이곳에서 벼슬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삶과 정치를 되돌아보며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반구정은 지금도 그가 추구한 겸허와 성찰,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상징하는 장소다. 특히 그의 '배움의 태도'는 오늘날 교육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그는 권력이나 명예보다 늘 배우는 자세를 중시했고, 실수에서도 교훈을 얻으며 타인의 조언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성적과 경쟁에 몰두하기 쉬운 오늘날, 그의 평생학습 자세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본보기가 된다. 그는 배움을 지식 축적이 아닌 인격 수양과 공동체 실천의 기반으로 보았다. 책상 앞 공부를 넘어, 삶의 모든 순간에서 배우려는 태도는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그의 리더십은 '경청의 정치'였다. 세종은 "그대가 있어 내가 편히 정사를 돌본다"라고 말할 만큼 그를 신뢰했다. 황희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갈등을 조율해 공동의 결정을 이끌었다. 이러한 리더십은 오늘날 교육 현장에도 유효하다.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를 넘어, 학생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학급과 학교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경청을 통한 소통이 갈등을 줄이고, 상호 존중의 문화를 형성하며, 모두가 주체가 되는 교육공동체 실현의 핵심이다.
결국 황희의 삶은 조선 전기 정치사의 한 인물로만 보기 어렵다. 그는 권세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지킨 학습자였고, 중용과 배려, 신뢰로 공동체를 이끈 리더였다. 인간적인 약점을 숨기지 않고 평생을 성찰과 배움으로 채워간 그는 교육의 가치와 철학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정치적 역량뿐만 아니라, 인격과 품성,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시대를 이끌었기에, 그의 삶은 지금도 교육적 성찰의 본보기가 된다.
오늘날의 교육은 황희에게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리더를 길러내고 있는가? 교사와 학생,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함께 배우는 문화를 실천하고 있는가? 방촌 황희의 삶은 단지 과거의 미담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배움의 태도와 교육의 방향을 일깨워 준 거울이다. 그는 권위보다 경청을, 경쟁보다 공존을 중시하며 조정과 화합의 리더십을 실천했다. 이제 우리의 교실과 사회는 황희가 보여준 경청과 성찰의 정신으로, 모두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교육 문화를 실현해야 한다.

2026.01.02(금) 16: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