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도는 단순한 말의 사육장이 아니라, 말·봉수·성곽이 결합된 복합 군사 체계의 공간
창선도(昌善島)의 말과 목장은 국가 군사력의 근간이 되었고, 봉수(烽燧)와 성곽(城郭)은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방어 거점이자 신속한 군사 통신망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0월 17일(금)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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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조선후기 지방에서 제작된 한 장의 지도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진주목장창선도지도(晉州牧場昌善島地圖)」는 당시 창선도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 준다. 언뜻 보면 단순한 회화식 지방지도 같지만, 세밀히 들여다보면 군사·경제·종교·생활이 한 화면에 세밀하게 담겨 있다. 창선도는 단순한 농어촌이 아니라 국가가 목장(牧場)을 설치하고 봉수(烽燧)와 성곽(城郭)을 쌓아 운영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도를 펼쳐보면, 섬이라는 공간 안에 조선 후기 국가의 축소판이 오롯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1872년 지방지도 『진주목장창선도지도』와 관련 이 글에서는 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의미를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말과 목장 국가 군사력의 토대', 둘째, '흥선목장 위치·규모와 현황', 셋째, '봉수와 성곽 군사 통신과 방어의 거점', 넷째, '생활과 경제 장시와 마을의 일상', 마지막으로 '지명과 제사 이름에 새겨진 권력과 상징'이다.
▲ 말과 목장국가 군사력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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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창선도(昌善島)는 단순한 섬이 아니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목장(國營牧場), 즉 진주목장(晉州牧場)이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였다. 당시 말(馬)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기병 전술이 전장(戰場)을 지배했기에, 군마(軍馬)의 확보는 곧 전쟁 대비와 승패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이에 국가는 효율적인 말 관리가 가능한 섬에 목장을 두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은 외부 간섭을 차단하고, 말을 집중적으로 사육하기에 적합했다. 『영남읍지(嶺南邑誌, 1871년)』에 따르면, 창선도에서는 약 470필의 말이 사육되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중앙에서 감목관(監牧官)이 파견되었고, 별도로 감관(監官) 2명이 임명되어 무분별한 경작과 사적 방목을 통제했다. 이러한 체계는 창선도가 단순한 지방 목장이 아니라, 중앙 권력과 직결된 관리 공간이었음을 보여 준다.
지도의 중심에는 목장을 감독하는 목관(牧官)이 자리하고, 섬의 지리적 기준이 모두 목장에서 출발하는 방식으로 표현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북쪽으로 목장까지 5리, 남쪽으로 남해 관아까지 30리, 지족진수로(只簇津水路)는 30리"라는 표기는 창선도가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내륙과 해상 네트워크의 일부였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지도에는 군마와 관련된 특정 공간이 눈에 띈다. 점마장(點馬場)은 말을 정기적으로 검사해 품질을 확인하고, 중앙에 봉진(封進)할 군마를 선발하던 장소였다. 국가는 단순히 말을 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정기적인 점검을 제도화하여 군사 자산을 철저히 확보했다.
또 하나 중요한 공간은 제마당(祭馬堂)이다. 봄과 가을이면 이곳에서 양마제(養馬祭)가 거행되었다. 이 제사는 군마의 건강과 번식을 기원하는 국가적 의식이었다.
영물(靈物)처럼 여겨진 말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존재였기에, 단순한 가축을 넘어 신성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목장(牧場)이 제의(祭儀)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군마 정책이 단순한 경제·군사적 제도를 넘어 상징적·종교적 의미까지 지니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 흥선목장 위치·규모와 현황
1469년에 제작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진주도(晉州道) 진주목(晉州牧) 목장조(牧場條)」에는 "흥선도의 둘레는 61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도조(海島條)에서도 동일하게 "흥선도의 둘레가 61리"라 되어있다.
이를 통해 흥선도와 흥선목장의 둘레가 모두 61리로 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남읍지(嶺南邑誌), 1871년』 「진주목읍지(晉州牧邑誌) 목장지(牧場誌)」에는 창선도의 동서가 30리, 남북이 25리, 둘레가 60리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종합하면 창선 전역이 목장(牧場)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 13책』 「진주목읍지, 목장지(牧場誌, 103a~105b면)」에 기록된 창선목장(昌善牧場)의 현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청(公廳)으로는 동헌사간(東軒四間), 내아육간(內衙六間), 공수삼간(公需三間), 책실삼간(冊室三間), 이청육간(吏廳六間), 통인청삼간(通引廳三間), 급창청삼간(及唱廳三間), 아방오간(亞房五間), 관청삼간(官廳三間), 봉진마구오간(封進馬廐五間), 세곡고칠간(稅穀庫七間), 환상고육간(還上庫六間)이 있었다.
관원(官員)으로는 감독관인 전현령(前縣令), 전도사(前都事), 전첨사(前僉使)가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6품 음관직(蔭官職)에 속했다.
관속(官屬)으로는 아전(衙前) 20인, 통인(通引) 10인, 급창(及唱) 16인, 사령(使令) 30인, 방자(房子) 5인, 구종(驅從) 5인이 있었다.
또한 마정(馬政)에서는 약 470필의 말(馬)을 관리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당시 창선목장의 규모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방대했음을 알 수 있다.
▲ 봉수와 성곽 군사 통신과 방어의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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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장창선도지도(晉州牧場昌善島地圖)」에는 봉수대와 성곽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대방산봉(臺方山烽, 경남기념물 248호), 금산봉(錦山烽), 진주각산봉(晉州角山烽)은 중앙과 연결된 봉수망을 구성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봉수는 해상 침입과 국경의 위협을 가장 먼저 알리는 조기 경보 체계였고, 남해안은 왜구와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만큼 봉수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지도에 그려진 고산성(古山城)은 섬이 단순히 말을 기르는 곳이 아니라, 유사시 병력이 집결하고 방어하는 군사적 전초 기지였음을 시사한다. 섬의 성곽과 봉수는 결국 목장이 국가 방위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군사 거점이었음을 보여 준다.
즉, 창선도는 단순한 말의 사육장이 아니라, 말·봉수·성곽이 결합된 복합 군사 체계의 공간이었다. 지도를 통해 보면, 여기에는 국가적 관리와 전략이 담긴 또 다른 측면이었다.
▲ 생활과 경제장시와 마을의 일상
「진주목장창선도지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국가 시설뿐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까지 함께 담고 있다는 점이다. 옥천(玉泉), 해창(海倉), 적량(赤梁) 등 마을 이름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은 섬이 단지 군마 사육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섬 중앙에 장시(場市)가 표기된 점이 중요하다. 본래 국영 목장이 설치된 지역에서는 민간 경작과 거래가 제한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 목장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곡식과 해산물, 심지어 말까지 거래되던 장시는 지역 경제의 활력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이러한 사실은 목장의 쇠퇴와 함께 창선도가 군사 중심지에서 상업 공간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사료(史料)에 따르면 말의 사육 두수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1469년)』 「진주도 목장조」에는 창선도에서 737필이 길러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 1765년)』 「진주목조」에는 473필, 『경상도읍지(1832년)』 「진주목읍지」에는 882필이 사육되었다. 그러나 1871년의 『진주목읍지』에서는 470필로 줄어든다.
이러한 변화는 군사 제도의 개편과 기병 전술의 쇠퇴가 목장 규모 축소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며, 그 자리를 민간 경제와 상업 활동이 점차 채워갔음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국가 목장이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지도에 표시된 장시(場市)의 존재는 국가 중심에서 민간 중심으로, 군사적 기능에서 생활 공간으로 변모한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 지명과 제사이름에 새겨진 권력과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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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도(昌善島)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유질부곡(有疾部曲: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으로, 고려시대 창선현(彰善縣)으로 바뀌며 사라졌다. 당시 창선도는 부곡(部曲)에 속하여 조세를 납하던 특수 행정구역이었다)으로 알려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창선현(彰善縣)으로 불렸다. 이후 충선왕(忠宣王) 즉위 때 이름인 왕장(王璋)과 겹친다는 이유(발음이나 의미 면에서 겹침)로 흥선현(興善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조선 태종(太宗) 대에는 다시 창선도리(昌善島里)로 환원되어 진주목(晉州牧)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내내 창선도는 1906년 9월 28일 남해군(南海郡)에 편입되기 전까지 남해군이 아니라 진주목 소속 지역이었다.
섬 내부에서도 지명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대방산(臺方山) 서쪽은 율도(栗島), 북쪽은 창선(昌善), 동남쪽은 흥선(興善)이라 불렸으며, 특히 대부분 목장이 자리한 지역은 '흥선도목장(興善島牧場)'으로 별도 표기가 되었다. 이러한 작은 지명 하나에도 왕조의 권위와 행정 체계, 그리고 시대적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도상의 제마당(祭馬堂)은 군마(軍馬)가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제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국가는 봄·가을로 양마제를 지내며 말의 건강과 번식을 기원했다.
이는 군사 자원의 확보가 단순한 행정이 아니라 국가적 제의(祭儀)의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말(馬)은 단지 실용적 존재가 아니라 신성성을 부여받은 국가적 상징이었다.
그리고 국사봉(國祠峰) 정상(352m)에는 사각형 돌담 형태의 국사당(國祠堂)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은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洞神)을 모시고 나라와 마을 주민, 말(馬)의 안녕을 기원하던 제당이다.
돌을 3∼4단, 약 2m 높이로 쌓아 올린 형상은 마치 시골의 큰 장독대와 유사하다. 정상 약 30㎡ 규모의 평탄지 왼편에 석축 구조물이 있는데 과거 3칸 정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에는 겹담이 쌓여 있다. 국사당 아래 약 1,000㎡ 규모의 평지는 말 훈련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근처에는 깊은 샘과 80㎡ 규모의 연못이 있어 사람과 말이 쉽게 물을 마실 수 있어, 말 훈련장으로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 창선 목장의 흔적의 의미
1872년 「진주목장창선도지도」는 단순한 지방 고지도가 아니다.
이 지도는 국가 권력이 자연과 공간을 관리하고, 주민의 생활을 규제하며 변화를 끌어낸 과정을 보여 주며, 군사·경제·종교가 중첩된 풍경을 동시에 담아낸 귀중한 시각 자료다.
오늘날 우리는 위성지도를 통해 세계 어디든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의 지도는 단순한 행정구역을 넘어, 생활 반경과 상업 정보, 문화의 흐름까지 담아낸다.
그렇다면 150여 년 전의 「진주목장창선도지도」는 어떤 점에서 오늘날의 지도와 닮았을까? 당시 지도 속 중심에는 '말(馬)'이 있었다. 군마와 봉수, 제사와 시장이 한 장의 지도 위에 담긴, 국가의 보고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의 지도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경제 활동, 공동체의 삶을 반영한다.
창선도는 한때 수백 필의 말을 기르던 국영 목장이자, 봉수와 성곽이 지킨 방어 전초 기지였으며, 장시(場市)가 열리던 생활 공간이기도 했다.
목장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지도 속 말발굽 소리와 봉수대 연기, 장시의 흥정 소리는 여전히 과거의 울림으로 남아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목소리인 셈이다. 1872년의 작은 지도 한 장은 나라와 민중을 함께 품은 거울이자, 현재를 비추는 질문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