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9년 『경상도속찬지리지』가 말하는 「남해(南海)」의 역사
경상도속찬지리지 「남해」 조는 왜구 침탈로 황폐해진 남해현이 복치(復置) 정책과
관방 정치를 통해 해양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재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사료
1469년의 남해현은 읍성과 광역 봉수망, 강력한 수군전력, 자립적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조선 전기 남해안 제해권을 유지한 대표적 해방(海防) 거점이었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9월 11일(금) 15:13
|
|
역사(歷史)는 흔히 고요한 활자 속에 박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격변의 시기에 작성된 사료들은 당대인들의 숨 가쁜 현실 인식과 치열한 생존 전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선 초기 남해안 일대는 고려 말부터 이어진 왜구의 참혹한 침탈로 인해 영토의 주권이 뿌리째 흔들리던 유혈의 전장이었으며, 백성들을 육지로 대거 철수시켰던 공도정책(空政策)의 상흔은 깊었고 파괴된 지방 행정망과 국방 전선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는 조선 초기 조정이 직면한 가장 거대한 과제였다. 1469년(예종 원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남해조(南海條)'는 바로 그 무너진 변방의 세계를 조선왕조가 어떻게 다시 접수하고 인간의 땅이자 불패(不敗)의 요새로 개척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앞서 세종 7년(1425)의 『경상도지리지』가 인구 171명의 황량한 공도(空島) 상태에서 육지의 곤명현과 임시 통합되어 있던 '곤남군(昆南郡)' 시절의 아픔을 보여주었다면, 그로부터 44년이 흐른 1469년의 기록은 마침내 섬으로 돌아온 백성들과 그들이 피땀으로 쌓아 올린 굳건한 읍성, 그리고 영·호남을 잇는 거대한 해상 국방망의 완성을 선포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1469년 경상도속찬지리지』 '남해조(南海條)'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 세조와 예종 대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남해 바다의 주권을 완전히 복원해 낸 현장의 기록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삼국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해 온 건치연혁(建置沿革)과 그에 따른 행정적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 둘째, 고을 방어의 바탕을 이루었던 읍성과 군사시설, 그리고 관방 체계를 규명하며, 셋째, 해상 방어와 밀접하게 연관된 봉수망과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통신망의 운영 양상을 추적하고, 넷째, 호구와 토지, 그리고 다양한 특산물에 관한 기록을 통해 주민들의 구체적인 경제 활동과 향촌 사회의 풍속을 분석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남해현(南海縣)이 지닌 국가 안보상의 의의와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지역사적 가치를 함께 규명하고자 한다.
1) 유랑(流浪)의 종식과 치소(治所)의 귀환: 건치연혁과 행정적 변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남해조(南海條)'의 첫머리는 이 고을이 겪었던 혹독한 시련과 마침내 달성한 행정적 독립을 짧지만, 묵직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본래 남해군(南海郡)이었던 이곳은 지정(至正) 무술년(戊戌年)인 1358년(고려 공민왕 7) 왜구의 대규모 침탈로 인해 주민들이 섬에서 쫓겨나 육지로 탈출해야 했고(因倭出陸), 행정 기능마저 육지의 곤명현에 강제로 합쳐져 귀속되는 비운을 겪으며 고을이 완전히 비어버리는 공도(空島)의 세월을 보냈다.
명칭만 남은 채 내륙을 떠돌던 남해현이 마침내 섬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안정을 찾아가던 세종 19년인 1437년(丁巳) 8월이었다.
조정은 변방의 섬을 비워 두는 것이 오히려 왜구에게 전초기지를 제공하는 꼴임을 절감하고 남해현을 전격적으로 복치(復置)하여 다시 독립된 현령(縣令)을 파견하는 결단을 내렸다.
예종 원년인 1469년의 기록은 이러한 복치(復置) 조치 이후 약 30년이 지나 남해현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독자적인 행정 체제를 확립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남해현은 주민들의 안정적인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공물과 세금의 납부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사료에서 공세(貢稅)를 모두 육지가 아닌 현의 창고(縣倉)에 직접 납부한다고 명시한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는 과거 육지 고을의 창고에 더부살이하며 세원(稅源)을 빼앗기던 예속적인 시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제는 남해섬 내부에서 거두어들인 많은 물산과 세금을 자체적인 현창(縣倉)에 비축하고 집행할 만큼 견고한 경제적·행정적 자립을 이루었음을 뜻한다.
또한 사료의 말미에 기록된 섬의 거시적 지표는 남해현의 복원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았음을 구체적인 수치로 웅변한다.
거대한 바다 섬(縣本海島)인 남해현은 관문에서 북쪽 노량진까지는 40리 떨어져 있었으며, 육지와 연결되는 수로는 1리 150보에 달하고 섬 전체의 둘레 또한 320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넓은 섬이었음에도 1425년 당시 거주 인구는 171명에 불과하였으나, 1469년에 이르러서는 민호(民戶)가 738호로 증가하여 주민들의 정착이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가구당 평균 인구를 고려할 때, 이는 최소 3,000~4,000명 이상의 주민이 섬으로 복귀하여 정착하였음을 의미하며, 이들이 섬 전역의 옥토를 개간하여 확보한 전답의 규모는 1,323결 87부 6속으로, 오늘날 면적으로 환산하면 약 1,305만㎡(약 395만 평)에 해당한다.
결국 1469년의 남해현은 더 이상 왜구의 눈치를 보며 배를 타고 오가던 임시 경작지가 아니라, 수백 가구의 백성들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세금을 바치며 왕조의 영토를 채운 진정한 '조선의 땅'으로 완전히 거듭나 있었다.
2) 돌로 쌓은 성곽과 바다의 방패: 군사시설과 관방 체계
주민들이 돌아오고 행정이 복원되자, 조선 조정은 이들을 보호하고 바다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남해섬을 거대한 요새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서 가장 비중 있게 서술된 내용은 단연 읍성(邑城)의 축조와 군사력 편제에 관한 관방(關防) 조항이다.
고을의 옛 읍성은 현 북쪽 고현리 화금현(火金峴)에 자리한 고현산성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 산성은 임자년(壬子年, 정이오의 「남해읍성기」 등을 종합해 볼 때, 정확한 연대를 특정하기는 어렵다.)에 돌로 축조되었으며, 둘레 1,740척, 높이 10척, 너비 11척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지세가 좁고 경사지며 위태롭다는 치명적인 약점(地窄傾危)을 지니고 있어, 왜구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한 장기 방어와 주민 보호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기미년(己未年, 세종 21년, 1439), 조정과 남해현은 치소(治所)를 보다 넓고 전략적인 요충지인 죽산리(竹山里)로 옮기고, 그곳에 새로운 읍성을 석축으로 축조하였다.
새 읍성은 둘레 2,876척, 높이 13척, 너비 13척 4촌에 이르는 대규모 석축성으로 조성되었다.
성 안에는 군창(軍倉)과 우물 1곳, 샘 5곳을 두어 겨울과 여름에도 식수 공급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새로 쌓은 죽산리 읍성은 둘레가 2,876척으로 기존 성보다 두 배 가까이 커졌으며, 높이 13척, 너비 13척 4촌으로 성벽의 두께와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했다.
특히 성 내부에는 군량미를 보관할 군창(軍倉)을 짓고, 장기 수성전(守城戰)의 핵심인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겨울과 여름에도 절대 마르지 않는 우물 1개와 샘 5개(井一泉五, 冬夏不渴)를 완비하여 지형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견고한 성곽이 탄생하였다.
이 견고한 성곽을 기점으로 편제된 남해현 자체 방어 인력인 방어정병(防禦正兵)은 총 125명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중 기병(騎兵)이 50명, 보병(步兵)이 75명이었다.
섬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50기나 되는 강력한 기동 타격대인 기병을 운용했다는 것은 상륙한 왜구를 초기 배후에서 압박하고 섬 전역의 전선으로 신속하게 군사를 이동시키기 위한 철저한 전술적 계산의 결과였다.
여기에 남해현 남쪽 평산리에 위치한 수군 기지 '평산포(平山浦)'의 전력은 남해 바다의 제해권(制海權)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관문에서 26리 255보 거리에 위치한 평산포에는 군창과 함께 무려 7척의 대형 전선(兵船)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고, 이 배를 타고 바다를 호령하는 수군(騎船軍)의 수(數)만 해도 698명에 달했으며 비상시용 예비 병선 4척도 별도로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사료는 현 동쪽의 '성고개(城古介)'가 과거 왜구들이 배를 대던 악명 높은 침투로(倭寇到泊海門要害)였음을 지적한다. 세종 19년(1437) 복치 당시에는 이곳에 직접 군사 진(鎭)을 설치하고 밤낮으로 순찰하며 방어(巡警防禦)를 펼쳤으나, 세조 대인 정해년(1467)에 이르러서는 평산포와 죽산리 읍성의 방어체계가 워낙 견고해졌기에 효율성을 위해 진을 혁파하고 읍성 내부로 병력을 통합하는 '입성방어(入城防禦)' 체제로 전환했음을 밝히고 있다.
즉 1469년의 남해현은 육군(기병·보병)과 수군(평산포 전선 및 700여 수군), 그리고 거대한 석성이 삼위일체를 이룬 조선을 대표하는 최전방의 관방 요새였던 셈이다.
3) 영·호남을 잇는 거대한 봉수의 눈과 요동치는 통신망
1469년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가 보여주는 남해현의 군사 통신망은 44년 전인 세종 초기의 체제보다 훨씬 거시적이고 전술적인 안목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바다의 위급 상황을 내륙으로 전달하던 소박한 연결망을 넘어, 이제는 남해안 전체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국방의 촉수로 진화한 것이다. 사료에 명시된 연대봉화(烟臺烽火)의 조응(照應) 관계를 살펴보면 남해의 봉수가 지닌 국가 안보적 위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섬 동쪽의 핵심 눈 역할을 하던 '금산 봉화'는 북쪽으로는 바다 건너 진주(晉州) 흥선도(興善島) 대방산(臺方山) 봉화와 신호를 주고받았고, 서쪽으로는 섬 내부 중앙의 거점인 소흘산(所屹山) 봉화와 연결되었으며, 남쪽으로는 원산(猿山) 봉화와 정밀하게 조응[相准, 상준]하며 촘촘한 감시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섬 중앙의 핵심 거점인 '소흘산 봉화'의 연계·조응 경로에서 확인된다.
사료는 소흘산 봉화가 서쪽으로 거대한 바다를 건너(西越大海) 전라도(全羅道) 순천(順天)의 돌산(突山) 봉화와 직접 신호를 연결하고 있다고 명시하였다.
이는 남해의 봉수망이 단순히 경상도라는 단일 행정구역의 보고 체계에 갇혀 있지 않고, 남방 해안선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영남과 호남을 하나로 묶어주던 국가 규모의 초광역 해상 안보 컨트롤 타워였음을 증명한다.
즉, 남해 앞바다에 출몰한 왜구의 정보가 거대한 해상을 뚫고 전라도 순천과 전라좌수영 방면으로 실시간 전파되는 고도화된 '광역 해상 방어망'이 1469년에 이미 완성되어 가동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해상 방어망의 정비·강화와 맞물려 육지와의 소통을 담당하는 교통·통신망 역시 비약적으로 복원되었다.
과거 왜구의 침탈에 밀려 육지로 피해 있던 덕신역(德新驛)은 마침내 섬 북단 본래의 자리인 역참(驛站)으로 복귀하여 하동의 마전역(馬田驛), 곤양의 양포역(良浦驛)과 유기적으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더불어 섬 북쪽 소천리(所川里)에는 공식 객사인 '낙량원(洛梁院)'이 세워졌고, 가장 핵심적인 국가 요충지(緊關)인 '노량진(露梁津)'에는 항상 군사 전선과 수송 선박들을 상시 배치(常置船隻)하여 내륙과의 보급과 소통을 보장하였다.
이렇게 정비된 교통·통신망을 통해 산출된 남해현에서 도성까지의 이정은 총 '806리 144보'로 기록되었다.
100보 단위까지 정밀하게 산출된 이 수치는 조선왕조의 행정력과 공간 인식이 국토 최남단 섬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경상도속찬지리지』는 도성까지의 거리를 806리 144보(八百六里一百四十四步)로 기록하고 있어, 대부분의 읍지에서 제시한 1,045리와 비교할 때 약 200리 이상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의 구체적인 원인은 명확히 단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록은 남해현이 변방의 고립된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중앙 정부 및 감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4) 군마의 울음소리와 풍요로운 바다: 경제 활동과 특산물
1469년의 남해현(南海縣)은 중요 군사 기지인 동시에, 국가의 전략적 자원을 생산하고 풍요로운 해양 경제를 일구어 가던 역동적인 삶의 터전이었다.
사료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경제 지표와 특산물은 이 섬이 지닌 물적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기록은 현 동쪽 금산곶(錦山串)에 설치된 대규모 국가 목장(牧場)의 존재이다.
사료에 따르면 이 목장의 둘레는 무려 55리 121보 4척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으며, 이 광활한 천연 방목지에 국가의 핵심 군사 자산인 군마 344필(馬三百四十四疋)을 키우고 있었다.
비록 물은 좋으나 풀이 다소 거칠다(水美草惡)는 품평이 적혀 있지만, 사면이 바다로 막힌 남해섬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왜구와 맞설 군마를 대규모로 육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남해현이 가진 독보적인 전략적 가치를 증명하며, 군사 훈련장과 제례용 신물 봉납장인 '강무장(講武場)'과 '천신장(薦新場)'을 금산에 둔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주민들의 삶과 직결된 해양 경제 활동 또한 섬 전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국가의 철저한 관리하에 소금을 굽던 가마인 '감분(監盆)'은 동쪽의 차산포·난보포·두음포를 시작으로 서쪽의 고화리 감전포·소천리 모답포, 남쪽의 평산포·호을포·가을포, 북쪽의 고현리 가을곶포에 이르기까지 섬의 사방 해안선 9개 요충지에 촘촘히 들어섰다.
이는 남해섬이 연안 소금 유통의 거대한 축으로 기능하게 되는 탄탄한 전초가 되었다.
이에 더해 바다의 풍요로움을 수확하는 어업 기지인 '어량(魚梁)'의 발달도 눈부셨는데, 대포(大浦), 파천포(巴川浦), 난보포(蘭甫浦) 등의 포구에는 거대한 나무 말뚝을 박아 고기를 잡는 전통 어구인 방전(防箭, 죽방렴)이 설치되어 사면의 거센 조류를 타고 잡혀 올라온 석수어(石首魚, 조기)와 홍어(洪魚), 문어(文魚) 등을 대량으로 채취하여 내륙 유통 및 왕실 진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지막으로 남해현은 농·수산물과 목축에 그치지 않고, 국가 안보의 핵심 광물인 철까지 생산하여 바치던 독특한 산업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사료는 남해현이 매년 '세공 정철(歲貢正鐵) 290근(174kg)'을 조정에 납부했음을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이 290근의 정철은 군사들의 환도나 화살촉, 혹은 전선의 철물들을 제작하는 데 필수적인 고품질의 재련된 철물 자원이었다.
이처럼 바다 한가운데의 섬에서 소금과 조기를 생산하고, 340마리가 넘는 군마(軍馬)를 키워내며, 매년 수백 근의 고품질 철까지 직접 제련해 내던 1469년의 남해현은 왕조의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지탱하던 훌륭한 '자립형 경제·군사 생태계'의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완벽한 복원과 제해권의 완성: 국가 안보적 의의와 가치
1469년 『경상도속찬지리지』 속 '남해(南海)'조 기록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면, 이 시기는 조선왕조가 변방의 영토 주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해방(海防)의 대업을 완성한 '승리와 복원의 정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과 수십 년 전, 왜구의 칼날 앞에 백성들이 도망치고 단지 토지만 남았다고 탄식하던 황량한 공도(空島)는 사라졌다.
세종 대의 복치(復置) 결단 이후 조정은 백성들을 다시 섬으로 불러들여 700호가 넘는 거대한 공동체를 재건했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세조 대의 축성 기술을 총동원하여 둘레 2,800척이 넘는 철옹성 같은 죽산리 읍성을 쌓았고, 마르지 않는 샘을 파 장기전에 대비했다.
또한 50기의 기병(騎兵)과 7척의 전선(戰船), 700명에 육박하는 평산포(平山浦)의 수군 전력은 남해 연안을 지키며 왜적의 접근을 억제하는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했다.
특히 남해현의 봉수가 바다를 건너 전라도 순천(順天)의 돌산(突山) 봉수와 직접 조응하도록 구축된 광역 봉수망은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가 얼마나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남해현은 경상도의 오른쪽 끝자락에 고립된 섬이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 체계를 하나로 묶어 왜구의 진입을 원천 차단하는 '남해안 해방 전선의 총지휘소'이자 거대한 눈이었다. 여기에 대규모 목장(牧場)을 통한 군마(軍馬) 육성과 섬 전역의 소금 생산, 방전(防箭)을 활용한 어업 활동, 그리고 세공 정철(歲貢正鐵)의 제련까지 아우른 독자적 행정·경제 체제는 이 요새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더 나아가 해상 조운과 연계된 물류 체계는 남해를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국가 해상 교역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게 했다.
결국 1469년의 남해현은 국가 안보와 해양 경제가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룬, 조선 초기 변방 경영의 가장 찬란한 성공 모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섬을 채운 땀방울이 이룩한 위대한 평화
예종(睿宗) 원년(1469)의 기록은 단순한 행정 수치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왜구에게 짓밟혔던 고향 땅으로 돌아와 돌을 나르고 성벽을 쌓았을 백성들의 피땀이며, 매일 밤 금산(錦山)과 망운산(望雲山)의 가파른 바위를 오르내리며 봉화의 불꽃을 지켜냈을 봉수군(烽燧軍)들의 거친 숨소리이다.
덕신역(德新驛)이 섬으로 돌아오고, 9개의 포구마다 소금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금산 자락에 350여 마리의 군마(軍馬)가 힘차게 포효하던 1469년의 풍경은 국가가 영토와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의 남해는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회복과 재건의 의지가 응축된 국가 전략 공간이었다.
이 시기에 완성된 견고한 읍성(邑城)과 평산포(平山浦)의 수군 전력, 그리고 촘촘한 봉수망(烽燧網)이라는 물적·인적 토대가 있었기에,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찾아온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대재앙 속에서도 남해의 백성들은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바다를 지켜내며 노량해전(露梁海戰)의 위대한 승리를 역사의 책무로 완수할 수 있었다.
결국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가 전하는 남해현(南海縣)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국방과 안보는 평화로운 시기일수록 변방의 땅 한 뼘과 백성 한 사람의 삶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지켜내는 치열한 준비와 굳건한 의지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더 나아가 이는 한 지역의 번영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지속적인 제도와 의지의 축적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026.09.11(금) 1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