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속 남해현의 관방과 봉수 이야기
남해미래신문
2025년 11월 21일(금)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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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25년(1530)에 문신 이행·윤은보 등에 의해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각 지역의 역사·지리·군사·교통·풍속 등을 망라한 종합 지리서이자 국가 방어 전략의 근거 자료였다. 그중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은 남해 도서와 해안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왜구의 빈번한 침입과 해상 방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관방(關防)과 봉수(烽燧) 시설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남해현의 군사시설의 배치와 운영은 조선 전기 국가 안보 체계의 일단을 보여 주며, 특히 돌로 축조된 성곽과 봉화망(烽火網)은 중앙군과의 유기적 연계를 가능하게 했다. 이하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경상도 남해현」의 기록을 바탕으로 남해현의 관방과 봉수 시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편집자 주>
△ 남해현의 관방(關防) 시설
조선 세종 연간을 전후 대부분의 산성(山城)이 폐쇄되고, 대신 평지의 군사적 요충지에는 영(營)·진(鎭)·보(堡)와 같은 군사시설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설을 일반적으로 '관방(關防)' 또는 '관방성(關防城)'이라 부른다. 관방성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읍성(邑城)과 달리, 바다와 육지의 국경지대나 관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전임 무관(武官)이 배치되어 군사 업무를 수행했다. 삼국시대 이래 남해현에는 노량진성(露梁津城), 성담을등산성(관당성·官堂城), 호포진성(湖浦津城), 고현성(古縣城), 대국산성(大局山城), 임진성(壬辰城), 비자당산성(난포현 치소), 적량진성(赤梁鎭城), 구도성(龜島城), 지족해변성(只族海邊城) 등 다수의 관방성이 존재하였다. 다만, 이 글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남해현 관방 시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평산포성(平山浦城)
평산포성은 남해 수군의 핵심 영아(營牙, 지휘 본부)로 기능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는 석축으로 된 성곽이 있었으며, 성의 둘레는 1,558척(有石城. 周一千五百五十八尺.)에 달해 병력 지휘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수군만호 1인(水軍萬戶一人, 만호는 종4품 무관)이 배치되어 수군을 직접 통솔하였다. 즉, 평산포성은 남해현내(南海縣內) 해안 수비의 총괄 거점이자, 지휘 본부라 할 수 있다. 남해군 남면 평산리에 위치했던 이 성(城)의 축조 연대가 문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244권, 성종 21년(1490) 9월 30일자 기록에는 "이달에 경상도 평산포성을 쌓으니, 높이는 9척이고 둘레는 1,558척이었다(「是月, 築慶尙道平山浦城, 高九尺, 周一千五百五十八尺」)"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평산포성이 1490년에 축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평산포성은 해안 방어와 수군 운영의 핵심 거점으로 조성된 포곡식(包谷式) 평면 타원형 석성이다. 현재 성곽의 본래 형태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마을 곳곳의 돌담과 밭의 경계석에서 성곽의 흔적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평산포성의 축조 방식은 지대석 위에 기단석을 놓고 허튼층쌓기 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조선 전기 석성 건축의 전형적 특징을 잘 보여 준다.
△ 성고개보(城古介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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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현 남쪽 22리에 위치(이동 성현마을 부근 구릉)한 석성으로, 성의 둘레는 760척(在縣南二十二里. 有石城. 周七百六十尺.)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경계 지역의 돌출부에 방어진을 형성하여 전략적 의미를 지녔다. 이곳에는 권관(權管, 종9품 무관)을 배치(設權管戍之)해 수비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이는 지역 방어망에서 중요한 보장(堡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명(明) 가정(嘉靖, 1522~1566) 연간의 군사 재편 과정에서 폐지되고, 방어 기능은 인근 상주포보로 이전되었다. 확인 결과, 성고개보는 산정식(山頂式) 석축성으로 평면은 타원형이며, 허튼층쌓기 수법으로 축조되었다. 현재 남·북쪽 체성(體城) 기단부 일부만 남아있고, 내부는 경작지와 민묘(民墓)로 인해 크게 훼손된 상태이다. 성내에서는 조선 이전의 토기편이 발견되었고, 남쪽 체성에서는 토축 흔적도 확인된다. 조선시대 관방성으로 보(堡)가 설치된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는 이미 그 이전부터 성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 우고개보(牛古介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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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남쪽 25리에 설치된 이 성은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성곽 둘레는 913척에 달했다(在縣南二十五里. 有石城. 周九百十 三尺). 비교적 견고한 방어 능력을 갖추었고, 권관(權管)을 두어(設權管戍之) 수비하였음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후일 가정(嘉靖) 임오년(1522년)에 곡포보로 통합·이전되면서 폐지되었는데, 이는 군사 체계 재편과 요충지 집중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우고개보는 오랫동안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워 미상유적으로 남아있었지만, 문헌사료 검토와 현지 조사를 종합한 결과, 남면 두곡마을에 있는 '고진성(古鎭城)' 유적이 우고개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 신증미조항진(新增彌助項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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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항에 설치된 군사는 남해 지역에서 가장 주목되는 방어 거점 중 하나였다. 현의 동쪽 87리에 위치하였으며, 성화(成化) 병오년(1486년)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왜적에게 함락되어 폐지되었고, 이후 가정(嘉靖) 임오년(1522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돌로 축조된 성은 둘레 2,146척, 높이 11척(在縣東八十七里. 成化丙午置鎭, 後爲倭賊所陷革之, 嘉靖壬午復設. 石築. 周二千一百四十六尺, 高十一尺.)으로, 남해에서 가장 크고 견고한 방어 성곽 중 하나였다. 수군첨절제사 1명(水軍僉節制使一人, 첨사는 종3품 무관)이 배치되어 대규모 병력 지휘와 해상 방어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미조항은 왜구 침략 경로에 위치해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다. 현존 성벽은 미조면 미조초등학교 서쪽 담장에 남아있는 길이 약 150m, 높이 1~2m의 개축 구간이다. 이 성곽은 지대석과 기단석을 갖춘 석축으로, 평면이 배 모양을 이루는 협축식 체성이라는 점에서 조선 전기 연해 읍성이나 관방성과 유사한 축조 기법을 드러낸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 제작된 『1872년 지방도』를 통해 당시 성곽의 구조와 형태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 곡포보(曲浦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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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현 남쪽 30리에 설치된 곡포보는 성의 둘레가 960척, 높이 11척으로 기록되어 있다(在縣南三十里. 石築. 周九百六十尺, 高十一尺.). 가정(嘉靖) 임오년에 우고개보를 폐지하고 이를 곡포보로 이전한 것으로, 군사상 효율성을 고려하여 해안 방어선을 재배치한 결과였다(嘉靖壬午, 革牛古介堡, 移置于此). 곡포보는 해상 방어의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권관(權管)을 두어(設權管戍之) 방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위치는 이동면 화계마을 옛 성남초등학교 일대이다. 성곽은 방형에 가까운 평면을 이루며, 지대석과 기단석을 갖추고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조선 전기 연해 읍성이나 관방성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 준다. 현재 옛 성남초등학교 건물로 인해 성곽은 크게 훼손되어 기단부만 일부 남아있으며, 내부 시설 또한 교사 신축 과정에서 사라져 확인이 어렵다.
△ 상주포보(尙州浦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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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현 남쪽 60리에 위치한 상주포보(尙州浦堡)는 성의 둘레가 985척이다(在縣南六十里. 石築.周九百八十五尺.). 가정(嘉靖) 임오년에 성고개보가 폐지되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상주포보는 석축 성곽으로 해안을 방어하였으며(嘉靖壬午, 革城古介堡, 移置于此), 권관(權管)을 두어(設權管戍之) 수비를 담당하였다. 해안 남쪽 끝단에 자리해 남해 해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를 차단하고 감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위치는 상주면 상주초 교정 주변 소구릉 남사면이며, 평면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해안 매립지에 조성된 평지는 초등학교 건립 과정에서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구릉 사면에는 일부 성벽이 남아있다. 지대석과 기단석을 갖추고 조선 전기 허튼층쌓기 기법으로 축조된 협축식 석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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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현 봉수(烽燧) 시설
남해현에는 금산봉수, 소흘산봉수, 원산봉수 등 3개의 봉수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은 외적의 침입이나 변란 발생 시 신속한 정보 전달망을 형성하였다. 봉수는 단순한 연락 수단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며 군사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핵심 통신 체계였다.
△ 금산봉수(錦山烽燧)
금산봉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진주의 대방산 봉수와 서쪽으로는 소흘산과 원산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 역할을 했다(北應晉州臺方山, 西應所訖山及猿山).
이는 남해 해역에서 발생한 비상 상황을 내륙으로 신속히 전달하는 연계망으로, 바다를 감시하는 외곽 봉수이자 중앙 체계와 연결되는 핵심 통신 요지였다. 남해금산봉수대(南海錦山烽燧臺)는 남해 군 상주면에 있는 고려시대 유적지로, 1987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었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달하던 통신 시설이다. 역사적 의의로 볼 때, 금산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인근 대방산 봉수대 등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연결망의 최남단 봉수로 기능했다. 구조는 높이 4.5m, 둘레 26m의 방대형으로, 오장(伍長) 2명과 봉졸(奉卒) 10명이 배치되어 운영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금산 봉수대가 단순한 통신 시설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군사 정보 전달망의 핵심임을 보여 준다.
△ 소흘산봉수(所訖山烽燧, 설흘산)
소흘산봉수는 동쪽으로 금산봉수, 북쪽으로 원산봉수와 연결되었다(東應錦山, 北應猿山). 경로상 내륙으로 향하는 신호망에 포함되어 다층적 봉수 체계를 이루었으며, 남쪽 해안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북상시키는 중간 중계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흘산봉수는 남면 다랭이마을 위 설흘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명칭 소흘산(所訖山)을 따른 것이다. 금산봉수와 연결되어 내륙의 망운산이나 순천 돌산도 봉수와 신호를 주고받으며, 조선시대 서울로 이어지는 제2거선 제9간선의 중요한 통신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 봉수대는 석축으로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설흘산 정상부에서는 한려수도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조선시대 군사 통신 체계의 일단을 보여 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 원산봉수(猿山烽燧, 납산 또는 호구산)
원산봉수는 동쪽으로 금산봉수, 남쪽으로 소흘산봉수와 연결되어 삼각망 구조를 이루었다(東應錦山, 南應所訖山). 이는 상호 보완적 신호 체계로, 적의 침입이나 긴급 상황에서도 지연 없는 보고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원산봉수는 남해 해상 방어와 봉화 통신망을 연결하는 말단이자 핵심 고리였다. 원산봉수는 이동면 호구산(虎丘山)에 위치한다. 이 산은 정상부 암봉이 원숭이 형상을 닮아 원산이라 불리며, 산 능선이 엎드린 호랑이 모습을 닮아 호구산으로도 불렸다. 또한 납산(蠟山)이라는 이름으로도 전해진다. 위치와 특징을 보면, 원산봉수는 이동면 용문사 인근에 자리하며, 1983년 11월 12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해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봉수대로 기능하였다.
△ 관방과 봉수의 종합적 고찰
남해현의 군사 방어망은 관방(關防) 시설과 봉수(烽燧) 시설이 긴밀히 연계되어 운영되었다. 관방이 실제 물리적 방어 거점이라면 봉수는 신속한 군사 정보 전달을 책임졌다. 특히 평산포영과 미조항진은 규모와 배치 인력 면에서 남해 방어의 중추 기관이었고, 곡포보·상주포보는 군사 체계 재편 이후 강화된 새로운 전초 기지였다. 또한 봉수 체계는 내륙 진주와 연결되며 남해와 내륙 방어망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방어망은 당시 빈번히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인 체계였으며, 조선 전기 국방 정책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 준다.
결국 남해현의 관방과 봉수는 단순한 성곽과 통신 시설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질서 속에서 국가의 존립과 직결되는 안보 최전선이었다. 이는 조선의 해상 방어 전략이 왜구 대응과 함께 내륙 방위까지 포괄적으로 연계된 복합 방어 시스템임을 말해준다. 지역 지형에 적합한 성곽 축조와 전략적 봉수망 운영은 곧 국가의 안보 체계를 유지하는 핵심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남해현의 관방(關防)과 봉수(烽燧) 시설은 16세기 조선 해방(海防) 방어 체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 남해현 방어체계 관방과 봉수의 역사적 의미
이상과 같이 남해현의 관방과 봉수시설 기록은 조선시대 국가 방위 체계의 축소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한 지역 방어 시설을 넘어, 조선 전기 국가 안보 전략의 기초를 이루는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남해현의 관방과 봉수는 왜구로 대표되는 외적의 위협 속에서 조선의 군사적 대응과 전략적 장치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점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조선 방어사 연구뿐만 아니라 오늘날 해양 방위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남해현의 관방과 봉수는 단순한 군사 유적이 아니라, 조선 전기 국가 안보를 지탱한 핵심 장치로서 군사사(軍事史)와 지역사(地域史)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남해현의 방어체계는 조선의 안보 전략과 국가 방위 의지를 구체적으로 구현한 실천적 모형으로, 단순한 과거 유적이 아니라, 조선 전기 국방의 실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관방과 봉수의 존재는 지방행정과 군사 조직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형성된 조선의 통합적 방위 체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2025.11.21(금) 10: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