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바다 굽어보는 신라의 요새, 대국산성(大局山城)
신라의 해양 방어전략과 축성기술이 집약된 남해지역의 핵심 군사요새로, 한반도 남해안의 전략적 중요성을 상징한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0월 24일(금)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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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대국산성(大局山城)은 바다와 산이 맞닿은 지점에서 신라의 전략적 시야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와 고현면의 경계, 해발 376m의 대국산 정상부에 자리한 이 산성은 남해 해역을 한눈에 굽어보는 천혜의 요새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상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오늘날 대국산성은 단순한 군사 유적을 넘어, 신라의 해양 방어체계와 남해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대국산성을 조명하는 이 글에서는 대국산성의 입지와 지정 현황, 축성 구조, 역사적 기능, 전설과 문화적 기억, 그리고 현대적 의의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5가지의 주제로 살펴보고자 한다.
▲ 입지와 지정 현황, 해로(海路)의 중심, 군사 전략의 요지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와 고현면의 경계에 위치한 대국산성(大局山城)은 해발 376m의 대국산 정상부를 따라 축조된 테뫼식(帶廬式) 석축 산성이다.
남해의 내해와 외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여, 예로부터 남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교통과 군사 전략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대국산성은 단순한 지역 산성이 아니라, 남해 해역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해양형 요새'로서의 위상을 지녔다.
남해군은 경상남도 남서단의 도서 지역으로, 동쪽으로 통영, 북쪽으로 사천과 하동, 서쪽으로 여수와 광양을 마주한다. 이 지역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해상 교통의 관문이자, 동시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국방의 전초선(前哨線)이었다.
대국산(大局山)은 이러한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남해군 중심부를 감싸고 있으며, 정상에서는 창선도, 지족해협, 노량해협, 사천만, 광양만 일대가 모두 조망된다.
따라서 이곳은 단순히 지역 방어의 거점이 아니라, 삼국시대 신라가 서남해 해역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전략 거점으로 보인다.
1974년 대국산성(大局山城)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1974.12.28.)되었다.
이후 남해군과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의 협력 아래 여러 차례 학술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1995년 지표 조사에서는 성벽, 건물지, 연못(연지), 문지(門址) 등이 확인되었고, 2002~2003년 발굴 조사에서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병존하는 이중성 구조가 밝혀졌다.
내성은 석축, 외성은 토성으로 이루어져 신라 후기 산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현재 대국산성은 성벽의 잔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일부 구간은 복원·정비되어 탐방객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안내판과 탐방로가 조성되어, 학술 연구뿐 아니라 지역의 역사교육 및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 축성 구조와 형식, 신라 산성의 전형과 남해형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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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산성은 해발 376m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이 병렬된 이중성 구조를 지닌다.
전체 둘레는 약 1,260m로 내성 530m, 외성 730m이며, 내성은 석축(石築), 외성은 토성(土城)이다.
내성은 편암계를 다듬어 정연하게 쌓은 협축식(夾築式) 구조로, 내·외벽을 돌로 쌓고 내부를 잡석으로 채워 안정성과 배수성을 높였다.
상단 폭은 2.4m, 높이는 평균 5~6m 정도이며, 성벽 외면은 깬돌을 이중으로 정렬하고 안쪽은 자갈과 황토를 섞어 다졌다.
외성은 기단부에 석축을 쌓고 그 위를 판축(版築) 공법으로 다져 만든 토성으로, 내성보다 규모는 크지만, 방어 기능은 보조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동남문과 북문 두 곳이 확인되며, 특히 동남문은 지면보다 문 바닥이 높게 설치된 '현문(懸門)'식 구조였다. 이 방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출입해야 하는 형태로, 적의 돌입을 어렵게 하는 고도의 방어 전략이다.
또한 성 내부에서는 건물지, 연못(연지), 배수로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 가운데 연지는 직경 약 11.5m, 깊이 2.5m의 원형으로, 바닥에 판석을 깔고 점토를 다져 수밀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기술은 신라의 축성 및 토목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편, 기와조각, 단각고배류(短脚高杯類), 시루편 등이 있으며, 대부분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신라의 전형적인 유물로 분류된다.
이로 미루어 대국산성의 초축 시기는 신라 7세기 전반,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대 전후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가 백제 멸망 이후 서남 해역의 방어망을 강화하던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대국산성(大局山城)의 축성 기법은 경주 명활산성, 김해 분산성, 거제 옥산성 등지의 신라 산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남해 지역의 험준한 지형과 해풍 환경에 맞게 변형된 '남해형 산성 축성 기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 역사적 기능과 군사 전략, 남해 해역의 신라 전진기지
대국산성(大局山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남해군조(南海郡條)」에 '고현산성(古縣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의 북쪽 17리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 1,740척, 높이 10척"이라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대국산성과 일치한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이미 이 성이 남해의 주요 방어 거점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현산성이 대국산성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확정하기는 어렵고, 남해 지역 내 다른 산성과 혼동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나 주로 대국산성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대국산성이 신라의 '전야산군(前夜山郡)'의 치소성(治所城)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전야산군은 690년(신문왕 10)에 설치된 군으로, 757년(경덕왕 16)에 남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곧 대국산성이 단순한 방어 성곽이 아니라, 남해 도서 일대의 행정·군사 중심지로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이 성이 자리한 대국산 정상에서는 남쪽으로 창선도, 북쪽으로 사천만과 하동만, 서쪽으로 광양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위치는 삼국시대 해상 교류와 군사 충돌의 최전선이었다.
신라가 백제 멸망 후 이 일대를 확보한 것은 단순히 영토 확장의 차원을 넘어, 서남 해상로의 군사적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 그리고 조선 초기까지 이 일대는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으며, 대국산성은 그 방어선의 핵심으로 기능했다.
고려 우왕 6년(1380) 정지(鄭地)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시킨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은 남해 해역에서 벌어진 대표적 전투로, 대국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의 실질적 효과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도 대국산성 일대는 군사적 요충으로서의 중요성을 유지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해군의 산성 중 대국산성이 주요 방어시설로 언급되며, 『남해읍지』에도 "고현산성은 전야산성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대국산성은 신라에서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간 지속적으로 활용된 연속성 있는 군사시설이었다.
▲ 전설과 문화적 기억 ― 청이 형제와 천장군의 이야기
대국산성에는 오랜 세월 지역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두 가지 대표적인 축성 설화가 있다.
첫째는 '천장군과 일곱 시녀'의 이야기이다. 조선 경종 때 천(千)씨 성을 가진 장군이 일곱 시녀와 함께 성을 쌓는 내기를 하였는데, 시녀들이 저녁을 짓는 동안 장군은 부채질로 바닷속 돌을 날려 산으로 옮겨 성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벽 돌 사이에 조개껍질이 끼어 있는 점에서 유래한 이야기로 보인다. 이는 인간의 노동이 신화화되어 전승된 사례로, 성의 축조 과정에 신비성과 초자연적 힘을 부여함으로써 지역민의 자부심과 공동체적 상상력을 표현한다.
둘째는 '청이 형제의 사랑 이야기'이다. 한 마을의 형제가 한 처녀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는데, 동생은 산성(山城)을 쌓고 형은 쇠사슬을 차고 읍내를 왕복하기로 했다. 처녀가 옷을 다 짓기 전에 동생이 성을 완성했으나 형은 돌아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동생은 형의 죽음을 슬퍼하며 성을 지키며 왜구와 싸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성의 축조를 인간의 희생과 충절, 형제애(兄弟愛)의 서사(敍事)로 확장시켜, 산성과 지역사회의 도덕적 상징을 결합시킨 전형적인 민속 서사이다.
이 두 전설은 대국산성이 단순히 돌로 쌓은 군사시설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지역민의 삶과 감정이 축적된 기억의 공간임을 말해준다. 현대의 문화유산 보존은 이러한 무형의 전승, 즉 인간이 유적에 부여한 의미까지 함께 계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현대적 의의와 보존 과제, 해양 방어사(防禦史)와 지역 정체성의 재조명
대국산성은 오늘날 남해 해양 방어사 연구의 핵심 유적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축성 기술과 해양 전략, 지역 방어망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남해가 단순한 도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한다.
현재 일부 구간은 복원되어 있으나, 외성의 토축과 내성 일부는 여전히 붕괴 위험에 놓여 있다. 이에 따라 보존·정비와 함께, 주변 산세와 경관을 포함한 통합적 관리가 필요하다. 남해의 다른 산성 '비자당산성, 성산토성, 임진성' 등과 연계한 '남해 방어망 유적군' 연구 역시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대국산성은 지역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교육적 공간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신라의 전략 요새였던 이곳이 고려·조선을 거쳐 민속과 설화의 무대로 변모한 과정은, 전쟁의 기억이 평화의 문화로 전환되는 '역사적 변용의 사례'이기도 하다. 성벽의 돌마다 남은 조개껍질과 풍화된 흔적은 단순한 전설의 증거가 아니라,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자 문화적 DNA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대국산성을 통해 과거의 군사적 긴장과 지역사회의 생존 노력이 어떻게 문화유산으로 변모했는가를 확인한다. 복원은 단지 물리적 재현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역사적 맥락과 인간의 기억을 함께 되살리는 과정이어야 한다.
▲ 바다와 산이 만나는 곳, 그 기억의 성곽
대국산성은 남해 바다를 굽어보는 신라의 요새이자, 수 세기 동안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남해인의 의지의 상징이다. 성벽의 돌마다 남은 조개껍질은 전설이 아니라,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며, 세월 속에서 응결된 지역 정체성의 표상이다.
신라의 전략 요새로 출발한 대국산성은 고려의 왜구 격퇴 기지, 신라의 행정 중심지, 그리고 오늘날의 문화유산으로 이어지며, 시대마다 그 의미를 새롭게 갱신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층위는 단지 돌과 흙의 문제를 넘어, 사람과 기억,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삶을 품은 '살아 있는 유산'의 가치로 확장된다.
오늘의 남해가 과거의 해양 왕국 신라처럼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이때, 대국산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말한다. "산성은 바다를 지키고, 기억은 사람을 지킨다." 그 말처럼, 대국산성은 바다와 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의 성곽, 남해의 역사와 정체성을 증언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2025.10.24(금) 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