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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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1786년 『남해현읍지』, 軍兵의 섬 남해현(南海縣)
1786년 『남해현읍지』에 기록된 군병(軍兵) 현황은 조선 후기 남해가 단순한
고을이 아니라 해양 방위와 중앙 군사 체계를 떠받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남해 군병기록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역과 군포(軍布)를 감당한 지역민들의
희생과 책임을 통해 형성된 군사도시 남해의 역사와 정체성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7월 24일(금) 19:17
▲ 미조항진성 모습(규장각 소장)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화려한 르네상스와 함께 가혹한 수탈과 군역의 모순이 소용돌이친 격변기였다. 정조 10년(1786)에 편찬된 《남해현읍지》는 단순한 지방 행정 통계서를 넘어 변방(邊方) 섬 주민들이 온몸으로 감당했던 국가적 부담의 실상을 생생히 전하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 당시 읍지에 기록된 남해현의 군병(軍兵) 총수는 무려 3,084명에 달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1786년 남해현읍지 표지 & 군병(軍兵) 기록




당시 남해현의 전체 인구 규모와 도서 지역의 경제력을 고려하면 매우 큰 규모였다.
군역(軍役)은 조선의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국가적 의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 재정을 보완하기 위한 군포(軍布)와 각종 부담이 더해져 백성들의 삶을 옥죄는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본 읍지 기록은 단순히 군사의 숫자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한양의 중앙 군영부터 경상감영(慶尙監營, 대구), 우병영(右兵營, 진주),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통영), 그리고 지방 관청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군사 운영 체계가 변방의 작은 섬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 백성들은 직접 군역을 수행하는 정군(正軍)과 군역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으로 편성되어 국가의 군사 체계를 떠받쳤다.
이 3,084명이라는 숫자는 남해가 국가 해양 방위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역사회가 감당해야 했던 군역(軍役)과 재정(財政) 부담의 규모를 말해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본 글은 《남해현읍지》에 수록된 군병(軍兵) 기록을 통해 정조(正祖) 시대 남해의 군사적 위상과 국가를 지탱했던 섬 주민들의 삶과 역할을 고찰하고자 한다.



1) 중앙과 지방 군영을 함께 떠받친 남해의 군역 구조


조선 후기 군사제도의 가장 큰 특징이자 모순은 한 고을이 감당해야 하는 군역의 계통이 지나치게 다원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남해현의 군병 현황을 살펴보면, 이 작은 섬 고을이 왕실을 보위하는 한양의 중앙 군영인 삼군문(三軍門)의 비용까지 분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수도 방위의 핵심으로 자리한 훈련도감(訓鍊都監) 포수(砲手)의 보인(保人)이 30명, 국왕의 친위부대인 어영청(御營廳)의 정군(正軍)과 그 비용을 부담하는 자보(資保)가 각각 4명씩 배정되어 있었다.
궁궐 수비를 맡은 금위영(禁衛營)에도 정군 8명과 자보 8명이 편성되었으며, 국왕의 행차를 호위하는 호련대(扈輦隊)의 보인 2명과 대궐 호위병인 금군(禁軍)의 보인 26명까지 남해현의 호적에서 차출되었다.
이는 남해가 지역 방어를 넘어 수도 방위 체계까지 뒷받침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남해 백성들은 경상감영인 순영(巡營)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인 우병영(右兵營),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으로부터 동시에 군역과 물자 조달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순영의 물선군(物膳軍) 9명은 감영에서 사용하는 식자재와 각종 물품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았고, 우병영 별대(別隊)의 마군(馬軍)과 보인은 물론 우병영 직속 군사인 아병(牙兵)과 그 보인들까지 남해의 몫이었다.
여기에 남해안 해방(海防)의 중심인 통영의 친병(親兵) 18명, 통제사의 직속 군사인 표하졸(標下卒) 3명, 통영의 아병 19명까지 더해지면서 남해현은 중앙 정부와 감영, 병영, 수영을 동시에 떠받치는 군사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군현이 여러 군사기관의 인력과 재정을 함께 부담한 구조는 조선 후기 군역 운영의 복합적인 성격과 함께, 남해가 국가 방위 체계에서 차지한 전략적 비중을 잘 보여준다.



2) 분방수군(分防水軍)과 능로군(能櫓軍), 남해 해양 방위의 핵심 전력


남해현에 이처럼 많은 군역이 편성된 가장 큰 이유는 지리적 특수성에 따른 수군(水軍) 관련 직역의 높은 비중에 있었다.
전체 군병 3,084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각 포구와 진보(鎭堡)에 분산 배치되어 해안을 경계하던 분방수군(分防水軍)으로, 그 수가 1,380명에 달하였다.
이는 전체 군병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로, 남해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남해안 방어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사부(射夫), 포수(砲手), 능로군(能櫓軍) 등 전투와 군선 운용에 필요한 병력이 함께 편성되면서 남해는 해안 감시와 전투, 선박 운용을 아우르는 상설 해양 방위 기지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병종(兵種)의 구성은 조선 후기 남해가 국가 해양 방위 체계에서 차지한 전략적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위상은 지역민의 부담과 희생 위에서 유지되었다.
특히 능로군은 군선의 노(櫓)를 저어 함선의 기동을 담당하는 전문 수군으로, 조류가 빠르고 해협이 많은 남해 해역에서는 필수적인 인력이었다.
『남해현읍지』에는 능로군 145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평산포진(平山浦鎭)에 배치된 인원만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조항진(彌助項鎭)에는 153명의 능로군이 별도로 편성되어 있어, 읍지의 군병 수가 남해현 전체 수군 병력을 모두 반영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제 남해현이 부담한 군병 규모는 기록된 3,084명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851년 김정호(金正浩)와 최성환(崔成煥)이 함께 편찬한 『여도비지(輿圖備志)』에서도 확인된다.
원문에는 "彌助項鎭 水軍僉節制使一員, 軍摠一千七百六十名. 平山浦鎭 水軍萬戶一員, 軍摠一千六百七十三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미조항진(彌助項鎭)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1인과 군사 1,760명, 평산포진(平山浦鎭)에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과 군사 1,673명이 배치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진의 주둔 병력만 모두 3,433명에 달해 남해가 여러 수군 거점과 진보(鎭堡)를 운영한 남해안 해방(海防)의 핵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능로군(能櫓軍)을 비롯한 수군 병력은 평상시 군선 운용과 훈련, 해안 순찰을 담당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의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농업과 어업을 기반으로 생활하던 주민들은 생업과 군역을 함께 감당해야 했다.

▲ 1872년 평산진지도 모습(규장각 소장)


3) 소황군과 관납보,『남해현읍지』가 전하는 군역의 실상


《남해현읍지》는 특수 군역과 군사 기술 인력을 구체적인 명칭까지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대표적인 사례가 화약 제조에 필요한 유황을 채취·정제하던 기술 인력인 유황군(硫黃軍) 14명이다.
화약은 조선 후기 화포와 조총(鳥銃) 운용의 핵심 재료였으므로 안정적인 원료 확보는 국가 방위와 직결되는 과제였다.
이에 유황군은 일반 병사와 달리 군사 기술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으로 편성되었으며, 남해에도 배치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단순한 해안 방어 거점을 넘어 군수 지원 기능까지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지방 관청에 군포(軍布)를 직접 납부하던 관납보(官納保) 152명이 기록된 점도 조선 후기 군역 운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유황군(硫黃軍)은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유황의 채굴·정련·관리를 담당한 특수 기술 인력이었으며, 이러한 편성은 남해현의 전략적 중요성과 군역 체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관납보는 특정 군영에 소속되어 정군(正軍)을 지원하는 일반 보인(保人)과 달리, 지방 관청의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군포를 납부한 군역 대상이었다.
이는 군역이 국방뿐 아니라 지방 행정과 재정 운영까지 함께 뒷받침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관청 소속 노비인 사노(寺奴) 92명과 노비의 군역을 대신하도록 편성된 양인 군사인 노대량군(奴代良軍) 150명이 기록되어 있다.
노대량군은 노비의 감소와 신분 변동으로 생긴 군역의 공백을 일반 양인이 대신 부담한 사례로,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화와 군역 운영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특수 군역은 남해가 단순히 병력을 공급하는 지역이 아니라 군수 생산과 행정 재정까지 함께 떠받친 복합적인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4) 속오군(束伍軍)과 봉수군(烽燧軍)으로 본 남해의 향토방위 체계
 

 남해현의 군역 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다른 고을에서 이관된 군사들의 군적(軍籍)까지 함께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해현읍지』에는 1778년(무술년)에 지례현(知禮縣)에서 옮겨온 양여군(良余軍) 2명과 합천군(陜川郡)에서 이관된 보병(步兵) 15명 및 그들의 보인(保人) 15명이 기록되어 있다. 양여군은 군액(軍額)의 조정을 위해 다른 지역에서 이속된 군역 대상자를 말한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 후기 인구 이동과 군역 운영 과정에서 군적이 지역 간에 함께 이동하였음을 보여주며, 남해가 자체 군역뿐 아니라 다른 군현의 군액까지 일정 부분 부담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남해가 국가 군사 행정 체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평상시에는 생업(生業)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소집되던 지방 예비군인 속오군(束伍軍)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읍지에는 '속오보병일백사십오명, 보일백사십오명(束伍保兵一百四十五名, 保一百四十五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속오보병 145명과 그 보인 145명이 편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속오군은 임진왜란 이후 향토방위를 위해 조직된 군대로, 초기에는 양인과 천민이 함께 편성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일반 군역과 마찬가지로 군포를 부담하는 체계로 운영되었다.
 이와 함께 봉수대에서 군사 정보를 전달하던 봉수군(烽燧軍) 75명에게는 보인 225명이 배속되어 모두 300명이 봉수 체계에 편성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남해가 해안 방어와 군사 통신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역민들이 다양한 형태의 군역과 재정 부담을 함께 감당하였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5) 군병(軍兵) 3,084명으로 본 조선 후기 남해의 군정(軍政)과 지역사회
 

 1786년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에 기록된 군병(軍兵) 3,084명은 조선 후기 군정(軍政)의 운영 실태와 지역사회의 부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남해섬이라는 제한된 인구와 공간 속에서 중앙과 지방, 육군과 수군, 전투 병종과 군수·행정 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역이 편성되면서 지역민들은 국가 방위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인력과 재정을 함께 부담하였다.
 정군(正軍)은 직접 군사 임무를 수행하였고, 보인(保人)과 자보(資保)는 군포와 군사 운영 비용을 부담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생업과 군역이 긴밀하게 연결된 당시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며, 주민들의 경제생활과 지역사회의 운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군역의 확대는 일부 지역에서 유망(流亡)을 증가시키고 군역 운영의 어려움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군역 운영 과정에서 족징(族徵, 친족에게 부담)과 인징(隣徵, 이웃에게 부담), 백골징포(白骨徵布, 죽은 사람에게 군포 부과), 황구첨정(黃口簽丁, 어린아이를 군역 대상에 편입)과 같은 폐단이 사회 문제로 지적되었으며, 이는 군정 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남해현읍지』의 군병 기록은 이러한 시대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남해의 3,084명이라는 군병 규모는 국가 해양 방위 체계에서 차지한 전략적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역사회가 감당했던 책임과 부담을 함께 말해준다.
 따라서 이 기록은 단순한 병력 통계가 아니라 조선 후기 군사제도와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 운영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해가 국가 해양 방위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국방과 민생의 균형이 국가 운영에서 얼마나 중요한 과제였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6) 『남해현읍지』 군병 기록에 담긴 남해의 국방적 위상과 역사적 가치
 

 남해는 한려수도의 중심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임진왜란 이후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중심으로 구축된 남해안 방어망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분방수군(分防水軍)을 비롯해 능로군(能櫓軍), 포수(砲手), 봉수군(烽燧軍), 속오군(束伍軍) 등 다양한 군사 조직이 편성되었으며, 한양의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과 경상감영(慶尙監營), 우병영(右兵營), 삼도수군통제영까지 남해의 군역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지방 고을을 넘어 국가 해양 방위 체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군사 기반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위상은 지역민의 희생과 부담 위에서 유지되었다.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에 기록된 군병 3,084명은 단순한 병력 통계가 아니라 조선 후기 남해의 전략적 가치와 지역민들이 감당한 역할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이 기록은 남해가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섬을 넘어, 오랜 세월 나라의 바다를 지켜온 해양 방위의 거점이었음을 증언한다. 또한 국가의 군사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중앙의 정책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참여와 부담이 필수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오늘날 『남해현읍지』의 군병 기록은 남해의 역사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지역이 국가 발전 과정에서 담당했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 1786년 남해현읍지 군병 기록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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