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의 남해시론]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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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남해시론]새마을운동
2024년 07월 19일(금) 09:47
'새마을운동'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난중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중요 자료로 인정받아 세계인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1970년에 시작되었으니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60년대 말만 해도 읍내의 보통사람들이 사는 집에는 방이 2개가 넘지 않았다. 한집에는 대여섯 명의 자녀들과 부모님까지 칠팔 명이 살았다. 부모님과 갓 태어난 막내둥이가 한방, 그리고 또 다른 한방에는 형제자매들이 비빌 틈도 없이 서로 부둥켜 잠을 청했다. 조부모가 계신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포대기에 막내를 업고 남산천으로 가서 빨래했다. 겨울이면 꽁꽁 언 손이 터져 피가 나오는 게 일쑤였다. 읍내라 해도 중심도로변에 초가집이 있었고 남산천 변(지금의 공설운동장 앞 복개된 주차장 부근)은 상대적으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은 이웃들이 살았다. 흰쌀밥을 먹는 것은 몇 안 되는 특별한 계층이었고 쌀보다는 보리가 더 많이 섞인 보리밥이 주식이었다. 그나마 하루 한 끼 정도는 개떡(보릿겨로 만든 호떡같이 생긴 떡)이나 빼때기(고구마를 채 썰어 말린 것)를 이용한 죽, 고구마 삶은 것으로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초등학생들은 나라에서 중식을 무상으로 공급받았는데 3학년까지는 미국의 원조로 지원된 고체로 각이 진 우유 조각이나 강냉이죽을, 가지고 간 빈 도시락에 학교의 소사가 큰 가마솥에 끓인 것을 퍼담아 주었다.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빵 공장이 생겨났다. 읍내의 효자문 삼거리 부근에 있었는데 결석을 하지 않고 학교 가는 이유가 빵을 받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을 정도다. 내가 6년간 개근을 했던 것도 내심 그런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남해여객과 남흥여객 2개의 버스회사가 있었으나 버스비를 아끼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어른들은 술과 노름이 만연했다. 동네잔치 때에는 누구네 집 사위가 막걸리 몇 말을 더 많이 희사했느냐가 관심사였다. 농한기가 되면 노름에 미친 어른들은 땅문서를 잡히고, 급전을 내어서라도 도박을 끊지 못하였고 심한 경우엔 가산을 탕진하여 아무도 모르게 야반도주하는 일도 종종 생겼다. 밀주를 담아 팔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외제 담배를 사서 피우다 경찰에 잡혀가고, 노름하다 경찰에 잡혀가는 일도 허다하였다. 미래는 없고 그저 오늘을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그런 일상들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시인 김기림이 그의 작품 속에서 '흰옷과 붉은 산'이란 '조선의 상징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 먹고살기에 급급하여 땔감으로 온통 벌목된 산림과, 육이오 전쟁으로 인한 포화에 희생된 산하를 가진 희망 없는 가난한 백의민족의 삶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민족중흥이라는 기치를 가지고 독일이나 베트남에 인력을 수출하고, 중화학공업에 공을 들이던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해소와 산림녹화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직면하였고 그 해법으로 탄생한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나무 땔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북탄광'까지 정선선 철도를 연장하여 전 국민이 연탄을 사용하여 난방하도록 했다. 남해도 연탄공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읍내 '기아자동차' 맞은 편이다. 산림청을 신설하고 '입산금지(入山禁止)'란 강력한 제동까지 걸었으며, 소관 부처도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바꾸어 산림녹화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대역사(大役事)라 사실상 관 주도 형식의 상명하복(上命下服)으론 짧은 기간에 가난을 벗어나고 황폐한 민둥산을 재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음에도 남녀노소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수해의 복구를 하는 경북 청도면 신도리 사람들의 모습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직접 발의하여 힘을 실었고,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꼼꼼히 챙겼다. 관이 주도하는 형식이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참여하는 형태의 잘살기 운동을 전개했다. 최초 전국의 모든 마을에 시멘트 335포를 무상으로 지급해주고 마을주민들 스스로 토론하고 논의하여 사업을 집행하도록 맡겼다. 결과에 따라 자립, 자조, 기초마을 등으로 등급을 매겼으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천명하며 잘하는 쪽에는 더 지원하도록 하여 경쟁을 유도하였다.

운영 주체는 마을총회, 개발위원회가 전부였다. 정부는 철저히 보조 기능만 수행했다. 새마을지도자라는 리더도 양성했다. 그들은 대가 없이 우리 마을이 잘살면 된다는 일념으로 나의 보수는 마을 사람들이 나를 믿고 따라오는 것이 보수다. 돈으로 보상받기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라는 철저한 봉사 정신으로 무장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솔선수범했다.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장에 참석한 모 장관에 대하여 "당신 오늘 새마을 교육이 있는 날 아니요? 장례는 일정 없는 장관들이 치르면 되니 당장 가서 교육에 전념하시오"라고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매년 국가에서는 전국의 최고 우수 새마을운동 사례에 대하여 표창하여 전 국민을 장려했다. 1975년엔 그 영광을 남해에서 누리게 된 경사가 있었다. 읍(당시는 남해면) 평현리 외금마을 새마을지도자 '여주대'씨가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수상식은 TV로 전국에 방송되었는데 방송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에 그 마을에 술집이 6개나 되었다면서요? 열 집에 한집이 술집 아니요?"하고 물으니 '여주대'씨는 "지금은 아입니다. 부락에서 술집 안 가기로 결의한 뒤로 술집이 없어졌십니다."라고 답변하는 것이 뉴스로 나왔다.

외금마을은 나태와 무기력 속에 술과 도박만을 일삼는 가난한 마을이었으나 주민들이 여주대 지도자의 집요한 설득으로 새마을운동의 선진우수마을 시찰을 했고, 다른 마을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받은 충격으로 크게 분발,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마을의 술집을 모두 없애고 마을 안길 확 포장 등 환경개선사업을 마치고 43ha에 1만2천 그루의 밤나무를 식재 74년도에 30가마를 수확하였으며, 마을 뒷산에 11만5천 본의 마을 묘포장을 조성하고 30평의 새끼제조공장을 갖게 되어 69년에 20만 5천 원에 지나지 않던 호당소득을 74년에는 81만 원으로 증가시켜 도서 새마을의 대표적인 마을로 발전시켰다. 그 성공사례에 대한 상징적인 보도였다.

관이 모든 걸 좌우해야만 된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관이 주도했더라면 오늘날 세계인들이 모방하려 한국을 찾아오는 새마을운동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중간에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만들어 관 주도로 바꾸려 했던 것이 오히려 새마을운동의 흑역사가 되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새마을운동부녀회가 370만 돈(14톤)의 금가락지를 모아 무상기부를 시작함으로써 '전 국민 금모으기운동'의 단초가 되었고 우리가 IMF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이처럼 새마을운동의 정신은, 최소한 기성세대에게는 가치 있는 이념으로 우리를 지배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한국은 산림녹지비율이 전 세계의 4위 수준이다. 경제력은 세계 10위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떻게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하고 세계는 놀란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러 줄을 선다. 이면에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리더가 있었고, 그를 믿고 땀과 눈물과 정성 어린 맨손의 투쟁을 아끼지 않은 국민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하는 고통의 역사였다. 민(民)은 움직이는 근본이다.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고 너무 어려워해서도 안 된다. 그들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부대껴야 해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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