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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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제작된 서울대 규장각 소장,
남해평산진지도(南海平山鎭地圖)에 담긴 남해 역사·문화 이야기
군영(軍營) 건물 배치와 해안 방어체계와 주변지형· 생활공간까지
평산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적 공간으로 새롭게 가치 조명돼야…
"진영(鎭營) 안에는 지휘관인 만호(萬戶, 종4품 무관)와 군관 2명,
행정 실무를 담당한 진리(鎭吏) 24명,군사·행정 정보 전달과 수송을 맡은 지인(知印) 14명,

남해미래신문
2025년 09월 05일(금) 10:11
▲ 1872년 제작된남해평산진지도(南海平山鎭地圖)

조선의 바다는 단순한 어업의 터전이 아니라, 외적을 막아내고 백성을 지켜내는 최전선(最前線)이었다. 경남 남해군 남면 평산리에 있었던 평산진(平山鎭)은 그러한 바다의 전초 기지였다.
지금은 성곽의 흔적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1872년에 제작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남해평산진지도(南海平山鎭地圖)」는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지도를 살펴보면, 군영(軍營) 건물의 배치와 해안 방어 체계는 물론, 주변 지형과 생활 공간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그 속에는 단순한 군사 요새를 넘어, 지역 사회 전체를 품었던 평산진의 다층적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비록 지금은 성곽조차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남해평산진지도」 속 한 글자, 한 지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우리는 이 지도를 세 가지 관점에서 읽어낼 수 있다.
첫째, 군영과 관아의 공간 구조, 둘째, 해상 방어와 바닷길 지명, 셋째, 생활과 신앙이 공존한 지역 사회가 그것이다.
이 세 갈래 풍경 속에서 평산진은 단순한 옛 성터를 넘어, 오늘날에도 되새겨야 할 살아 있는 역사적 자산으로 다가온다.



▲ 1872년 제작된 남해평산진지도 (南海平山鎭地圖)


지금의 평산진은 성곽의 흔적조차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1872년에 제작된 「남해평산진지도(南海平山鎭地圖)」는 마치 살아 숨 쉬듯 당시의 풍경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성문을 나서 바다로 향하던 병사들의 발걸음, 섬을 오가던 어민들의 작은 배, 금산(錦山)에 모여 기도하던 이들의 마음이 지도 한 장 속에 함께 새겨져 있는 셈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이 지도를 바탕으로 평산진을 다시 조명하는 일은 단순한 학술 연구를 넘어선다.
남해군이 이를 활용해 성곽과 건물, 병력 배치를 시각화하고 역사교육과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킨다면, 평산진은 '사라진 성곽'이 아니라 '되살아난 역사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지도 속 글자 하나, 지명 하나가 증언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은 곧 우리가 잊었던 시간을 회복하는 작업이다.
평산진은 단순히 옛터가 아니라, 바다를 지켜낸 선조들의 용맹과 지혜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살아 있는 역사다.
사라진 성곽 너머, 우리는 여전히 용맹했던 수군(水軍)의 긴장과 용기를 되새기며, 지도 속 풍경과 함께 그 정신을 오늘날까지 이어갈 수 있다.



▲ 군영(軍營)과 관아(官衙)의 공간 구조, 바다를 지키던 평산진의 행정과 군사 조명


『영남읍지(嶺南邑誌, 1871년)』에 따르면 평산진의 성곽(城郭)은 둘레 1,558척(약 472m, 1척=30.03cm), 높이 11척(약 3.3m)으로, 당시 남해 읍성(약 850m)에 비해 작은 규모였다.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해안 방위와 수군 기동 지원에는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성문(城門)은 남문(南門)과 북문(北門) 두 곳이었으며, 일부 구간에는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해자(垓子)도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날 성곽은 사라지고 없지만, 지도와 문헌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진영(鎭營) 안에는 지휘관인 만호(萬戶, 종4품 무관)와 군관 2명, 행정 실무를 담당한 진리(鎭吏) 24명, 군사·행정 정보 전달과 수송을 맡은 지인(知印) 14명, 심부름과 연락을 담당한 사령(使令) 8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주요 관청으로는 만호가 집무하고 행정을 총괄한 아사(衙舍), 외부 관리·사신을 접대하던 객사(客舍), 무기와 군수품을 보관한 군기고(軍器庫) 그리고 집물고(什物庫)가 있다. 다만 지도상에 표기된 ‘汁物庫(즙물고)’는 일반적인 사용례가 없으며, 오기 또는 잘못된 표기로 보인다. 또 화약 저장소인 화약고(火藥庫), 포(砲) 운용을 담당한 포청(砲廳), 간부 회의 장소인 교청(校廳)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활을 다루던 사부청(射夫廳), 행정을 처리한 이청(吏廳),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이 정박하던 선소(船所)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는 평산진이 단순한 방어 거점을 넘어 실질적인 해상 작전을 수행한 종합 군영이었음을 보여준다.
 병력(兵力) 구성도 체계적이었다.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정찰용 사후선(伺候船) 2척이 배치되었으며, 병력은 노를 젓는 능노군(能櫓軍) 145명, 활을 다루는 사부 28명, 화포수(火砲手) 10명, 포수(砲手) 34명으로 이루어졌다.
 능노군이 가장 많았던 것은 전선(戰船)의 기동력이 해전(海戰)에서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며, 활과 화포 인력이 함께 편성된 점은 조선 수군이 기동성과 화력을 동시에 중시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지도에 나타난 평산진의 중심에는 아사가 자리하였다. 만호가 집무하며 남해 연안을 지휘한 전략의 핵심 공간으로, 그 옆에는 객사가 위치하여 평산진이 단순한 섬 거점이 아니라 광범위한 행정 및 군사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이청, 사령청, 교청 등이 함께 배치되어 군사와 행정 기능이 유기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적 기능 역시 분명하다. 군기고·화약고·집물고는 상시 출격 태세를 상징했고, 사부청과 포청은 조선 수군의 전술적 지향점을 보여주었다.
 성문은 남문을 통해 내륙 마을과 북문을 통해 바다와 곧바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를 통해 평산진이 성곽에 갇힌 폐쇄적 진영이 아니라 육지와 해상을 동시에 아우르는 개방적 군사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군사적 요충지, 해상 방어와 바닷길 지명


 「남해평산진지도」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주변 섬과 해상의 지명이 꼼꼼히 기록된 점이다.
 평산진 앞에는 관선도(觀仙島)가 자리하고, 평산진 인근 덕월마을 앞에는 마도(磨島)와 소마도(小磨島), 구미마을 앞에는 목도(木島), 유구마을 앞에는 죽도(竹島)와 소죽도(小竹島)가 나타난다.
 각각의 섬 이름은 나무섬, 대섬처럼 지역민의 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지도에는 남해읍까지 30리, 통영까지 220리, 남쪽 미조항까지 60리라는 구체적인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흥미로운 기록은 "미조항육십리사창장시무(彌助項六十里社倉場市無)"라는 문구다.
 이는 "미조항은 평산진에서 60리 떨어져 있고, 이 지역에는 사창(社倉)이나 장시(場市)가 없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미조항은 군사·행정적 기능은 있었으나 상업활동은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일부 항구가 군사적 목적 위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해상 방어망의 또 다른 핵심은 봉수(烽燧) 체계였다. 지도 속 '요망(瞭望)'이라는 표기는 설흘산 봉수대와 연결된 감시 체계를 의미한다.
 적의 동향을 신속히 파악해 중앙 정부까지 알리던 봉수망은 남해안 방어의 중추였다. 평산진은 단순히 병사와 배를 둔 진영(鎭營)이 아니라, 바다 위 정보망과 연결된 군사 네트워크의 한 지점이었던 셈이다.
 


▲생활과 신앙이 공존한 지역 사회

 
 군사 지도(軍事地圖)임에도 「남해평산진지도」에는 생활과 신앙의 흔적도 함께 담겨 있다.
 내륙에는 오늘날 보리암(菩提庵)으로 유명한 금산(錦山)이 기록되어 있다. 금산 보리암은 예로부터 기도의 명소로 손꼽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도 속 금산은 단순한 지형 표시가 아니라, 지역민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또한 이동면 용소마을에 자리한 용문사(龍門寺)도 지도에 등장한다.
 군영의 긴장된 분위기와 달리, 고요한 산사(山寺)의 존재는 군사와 신앙, 긴장과 평온이 공존했던 지역 사회의 이중적 풍경을 보여준다. 섬 이름 또한 단순한 지형 정보가 아니라 생활과 직결된 흔적이다. 목도(木島)는 나무가 무성했던 섬, 죽도(竹島)는 대나무가 풍부했던 섬으로 불리며 주민들의 생업과 밀접히 연결되었다. 병사들이 오가던 선소(船所)는 단순한 정박지가 아니라 배를 수리하고 보급하던 생활의 터전이었다. 이처럼 평산진은 군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일상과 기도가 이어진 생활의 무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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