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미래신문 해설 -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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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미래신문 해설 -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역사의 저울 위에 선 남해의 인물, 故 박진경 대령
민간 피해 최소화 위한 '고도의 분리 작전'인가 '학살'인가
남로당 '투쟁보고서'와 군(軍) 작전일지가 말하는 43일의 진실

홍성진 선임기자
2025년 12월 19일(금) 09:31
▲ 故 박진경 대령 (박 대령은 향년 29세로 생을 마감했다./AI로 복원된 사진.)

2025년 대한민국은 여전히 '역사 전쟁' 중이다. 그 최전선에 부하의 암살로 29세로 생을 마감한 남해 출신 故 박진경 대령(1918~1948)이 서 있다. 지난 10월 국가보훈부가 그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자, 12월 14일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지정 취소 검토'를 지시하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이에 지역 진보 단체인 남해촛불행동은 즉각 반발하며 지난 17일 고(故) 박진경 대령의 유공자 인증 취소와 무공훈장 취소, 박진경 동상 철거 등을 외치는 기자회견을 앵강공원에서 열었다. "학살자의 동상을 남해에 둘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역사는 어느 한쪽의 목소리만으로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특정 인물에 대한 '단죄'는 감정적인 구호가 아니라, 차가운 이성과 객관적인 증거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지는 현재의 논란이 '학살자 프레임'이라는 일방적인 여론 몰이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다. 이에 그동안 진보 진영의 목소리에 묻혀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군(軍)의 공식 작전 기록, 남로당 내부 문건, 그리고 유가족의 증언을 통해 1948년의 그날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이는 박진경을 무조건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울어진 역사의 저울을 수평으로 맞추기 위한 언론의 책무다. 참고한 문서와 인물은 전국구국동지연합회/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나종삼, 박철균 공저)/대한민국 정체성 확립과 진실 규명을 위한 제주4·3사건 포럼/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 문상길·손선호 사형(제주경제일보)/'불멸의 공훈'인가 '불멸의 악행'인가(제주투데이), 그리고 유가족 등이다 <편집자 주>



△ 남면 홍현 출신 고(故) 박진경 대령은 누구인가

전국구국동지연합회가 공개한 약력 보고서에 따르면, 故 박진경 대령은 1918년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보를 거쳐 1944년 오사카외사전문학교 영어학과를 졸업하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 이력은 훗날 '친일파' 공격의 빌미가 된다. 하지만 해방 후 그의 행보는 권력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6년 1월, 그는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에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자진 입대했다.
주변에서 만류하자 그는 "나라가 해방되어 독립군이 되는 마당에, 계급장이 무슨 상관이냐"고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미 군정의 권유로 현지 임관한 그는 탁월한 영어 실력과 일본군 시절 습득한 전술 지식을 활용해 국방경비대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특히 미군과의 협상을 통해 노후화된 일본군 소총을 미군 최신 M-1 소총으로 교체하는 등 건군 초기 전력 증강에 노력했다.
이후 1946년 12월 중위, 47년 3월 대위, 47년 6월 소령으로 진급, 국방경비대총사령관 부관, 47년 9월 중령으로 진급, 국방경비대총사령부 초대 인사국장을 거쳐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제주 주둔 제9연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불과 43일 뒤인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새벽 부하들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향년 29세였다.



△ 쟁점 1. '무차별 학살'인가 '고도의 분리 작전'인가


진보 진영과 일부 4·3 단체들은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한 43일 동안 약 6,000명의 도민을 무차별 체포했다며 그를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실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손선호 하사의 법정 증언은 박 대령을 소년살해, 안내자 처벌, 도피자 사살 등 '살인마'로 묘사한다.
하지만 '6,000명 체포'라는 숫자 이면의 '목적'을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박진경의 작전 개념은 '토벌(사살)'이 아니라 '선무(분리)'였다.
게릴라들이 민가에 숨어 주민을 방패막이로 삼는 상황에서, 군의 최우선 과제는 주민과 무장대를 물리적으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당시 박진경 제11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채명신 장군(훗날 주월한국군사령관)을 비롯한 군 원로들은 주민들을 산에서 내려오게 하는 선무 공작을 통해 주민과 무장대를 분리해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 각급 지휘관에게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보수 진영과 군사 전문가들은 "만약 30만 도민 학살이 목표였다면, 굳이 6,000명을 생포해 식량을 주고 심문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이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당시 체포된 이들은 군·경 합동 심문조의 조사를 거쳐, 무장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단순 동조자나 입산자는 대부분 훈방되거나 가벼운 처분을 받았다.
박진경 대령이 제주도 재임기간(1948. 5.6 ~ 6.18)은 43일에 불과하다. 실제 부대를 장악하고 작전을 지휘한 기간은 이보다 더 짧다.
기록에 따르면 박진경 재임 기간 군경에 의한 사살자 수는 교전 중 사망한 무장대원 등 약 25명 내외다.
수천, 수만 명의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한 소위 '초토화 작전'은 그가 암살당한 후인 1948년 10월, 후임 송요찬 연대장 시절부터 시작됐다.
시기적으로 명백히 다른 두 사건을 뒤섞어, 앞선 지휘관에게 뒤이어 벌어진 비극의 책임까지 덮어씌우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는 설명이다.



△ 쟁점 2. 남로당 문건이 폭로한 '암살의 배후'


1948년 6월 18일, 29세의 박진경 대령은 부하 문상길 중위(남로당 프락치)의 지시를 받은 손선호 하사 등에게 암살당했다.
암살범들은 법정에서 이를 '동족상잔을 막기 위한 의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국군이 노획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이 사건의 본질이 '정치 테러'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남로당 군사총책 김달삼은 "국방경비대가 인민해방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반동의 거두 박진경을 제거하라"는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다.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 직후 무너진 군기를 잡고, 부대 내 침투한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낀 남로당 조직이 선제적으로 지휘관을 암살한 것으로 설명된다.
남로당이 작성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박진경의 죽음은 단순한 지휘관의 사망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박 대령의 암살은 군 지휘 체계의 붕괴를 가져왔고, "군 내부에도 적이 있다"는 극도의 불신감을 심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화적인 분리 작전을 폈던 박진경을 제거한 남로당의 선택은 이후 군 수뇌부를 자극하여 더욱 가혹한 '초토화 작전'을 불러오는 방아쇠가 되었다늘 설명이다.
1948년 8월 11일자 국제신문, 현대일보, 남조선민보, 한성일보, 대한일보, 새한신보, 특히 전라도 광주 호남신문 등에서도 박진경 대령 암살은 김달삼의 지령이라고 검찰관 기소문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 쟁점 3. "30만 희생" 발언, 조작된 신화인가?


박진경을 비판하는 측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말이 있다. 바로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발언이다.
이 내용은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에 실리며 정설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이 발언의 출처는 단 두 곳이다.
 박진경과 지휘권을 두고 다투다 해임된 전임 연대장 김익렬의 유고, 그리고 박진경을 살해한 암살범들의 법정 진술이다.
 자신의 해임을 정당화해야 했던 라이벌과, 사형을 면하기 위해 죽은 상관을 악마로 만들어야 했던 살인범들의 증언. 과연 이를 객관적 팩트로 신뢰할 수 있을까?
 당시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과의 평화 협상을 시도하는 등 온건책을 폈으나, 협상이 결렬되고 미 군정과의 마찰 끝에 5월 6일 전격 해임되었다.
 미 군정은 무너진 군기를 확립하고 사태를 해결할 인물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1948년 5월 6일, 박진경 중령이 제9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제주 인구는 약 30만 명이었다. "30만을 희생시킨다"는 말은 제주도민 전원을 죽이겠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미 군정의 철저한 통제를 받던 일개 대령이 전 도민 몰살 계획을 공언했다는 것은 군사적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보수 진영의 주장대로, "폭동 진압을 위해 어떤 대가(군인의 희생이나 작전의 난관)를 치르더라도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군인으로서의 비장한 결의가, 적대 세력에 의해 "도민을 다 죽여서라도"라는 자극적인 선동 구호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 주어진 글이나 구호에 부화뇌동 말고 스스로 객관적 자료를 찾길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1948년 6월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하지 않고 그의 계획대로 '선무 공작'이 지속되었다면 제주의 비극은 최소화되었을지도 모른다.
 2025년의 남해에서 벌어지는 동상 철거 논란은, 우리가 여전히 77년 전의 비극을 정치적 도구로 소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은 아닐지 우려된다.
 박진경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 극심한 혼란 속에서 군의 기강을 세우고 나라를 지키려다 내부의 적에게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군인인가 아니면 진보단체의 주장처럼 양민을 학살한 학살자인가 여부는 시대상황, 재임기간, 관련 문서, 수많은 기록들을 토대로 판단되어야 한다.
 혼란한 역사 속 파란만장한 삶은 살다간 29세의 남해의 인물을 재단하거나 단죄할 때는 특정 세력이나 일방의 주장만으로 단정되어서는 안된다.
 그의 43일 재임 기간을 후임자의 군사작전과 동일시하여 단죄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2025년 현재 심화된 이념적 대립 속에 역사의 저울 위에 선 남해의 인물, 故 박진경 대령이 대한민국 지킨 지휘관인지 학살의 주범인지를 알고 싶다면 주입식 구호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스스로 객관적 자료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적어도 그런 노력을 통해 남해 출신 박진경 대령의 진실과 마주했을 때 칭송이든 단죄든 해야 한다.
고(故) 박진경 대령의 유족 집회에 항의하고 있다.
남해촛불행동은 지난 17일 고(故) 박진경 대령의 유공자 인증 취소와 무공훈장 취소, 박진경 동상 철거 등을 외치는 기자회견을 앵강공원에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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