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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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임진왜란과 명군 전승 기념비의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 재조명
장량상 동정마애비는 임란 속 명군의 원정과 황제권위를
시각적·문학적으로 기념한 정치·문화적 산물
이 비는 단순 전투 기록을 넘어 전쟁·권력·기억·기념이 교차하는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3월 06일(금) 15:05
▲ 장량상 동정마애비(張良相 東征磨崖碑) 모습

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명(明)나라가 깊이 개입한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 전쟁의 정치적·문화적 의미를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건립된 장량상 동정마애비(張良相 東征磨崖碑, 경남 유형문화유산 제27호)는 단순한 전투 기록을 넘어 명군(明軍)의 조선 원정과 황제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기념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바닷가에 위치한 이 비석은 이여송(李如松)과 진린(陳璘) 장수의 공적을 찬미하며, 전쟁 승리와 제국적(帝國的) 권위를 동시에 시각화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고(本庫)는 장량상 동정마애비의 비문을 번역하고, 마애비의 조형적 특징과 문학성, 전쟁 서사, 역사적 사실성과 상징적 의미, 현대적 가치 등 여섯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 이를 통해 전쟁과 권력, 기억과 기념이 교차하며 형성하는 복합적인 문화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연구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글의 말미에 글의 원문을 수록했다.



1) 장량상 동정마애비 (張良相 東征磨崖碑) 비문 번역



[동정시를 짓게 된 배경]

명나라 만력(萬曆) 26년(1598) 늦가을, 나라에 다시 동이(東夷), 곧 조선에서의 일이 보고되었다.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받아 환난을 겪은 지 이미 6~7년이 지났으나, 우리 군대가 구원에 나섰음에도 오랫동안 뚜렷한 승전보를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천자 만력제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중승 만공(萬公, 만세덕)에게 명을 내려 군무를 시찰하고 전황을 경영하게 하셨다.
또한 총독 대사마 형공(邢公, 형개)과 도독 진공(陳公, 진린)을 비롯한 문무 장신 10여 명에게 명하여 군대를 조선으로 집결시킨 뒤, 압록강을 건너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진격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장공(張公, 장량상)은 웅대한 기상이 매처럼 드높고, 날카로운 풍모가 호랑이처럼 준엄하였다.
그는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충성스러운 계책을 다하였다. 마침내 낙랑(평양)을 제압하고 계림(경주)을 넘어 부산에 이르러 군위(軍威)를 떨쳤으며, 왜적을 소탕한 뒤에야 개선하게 되었다.
태사씨 구대상은 이렇게 평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이 군대를 일으켜 장수에게 명을 내릴 때는 반드시 시문을 지어 군사의 용기를 북돋우고 국위를 선양하였으며, 원수에 대한 공의(公義)를 밝히고 정벌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하물며 이번처럼 천자의 군대가 오랑캐를 정벌하여 폭란(暴亂)을 제거하고, 만전의 계책으로 반드시 승리를 거둔 일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 위엄과 기율의 엄정함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성대하였다. 마땅히 먼 나라의 귀복(歸服)을 밝히고, 이 공훈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에 시 두 편을 지어 밝은 위엄을 노래하니, 비록 공석(孔碩)의 우아한 필치(筆致)에는 미치지 못하나, 성상의 빛나는 무공을 드높이고자 함일 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정시(東征詩), 전승의 찬가]

제1장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오랑캐의 난을 평정하시니, 장사들은 분발하여 잔치 즐길 겨를조차 없었네. 긴 창을 비껴들고 굳센 화살을 화살통에 채우니, 끈으로 엮은 갑옷이 별빛처럼 찬란히 빛나도다.
바다(발해)를 걷어차니 파도가 고요해지고, 긴 칼에 기대어 서니 해 뜨는 곳(일본)의 해안이로다.세상의 끝(四極)이 평온해지고 지탱하는 거북의 발이 끊겼으니(천하의 질서가 잡혔으니), 천하가 비로소 평안을 되찾았도다.



제2장

황제(皇帝)의 영험한 기운이 바다 밖 끝까지 떨치니, 조공하지 않는 자 정벌하여 이민족을 평정하였네. 군사들이 기뻐하며 장공(張公)을 따라 진군하고, 왜적을 소탕하여 비늘 돋은 무리(왜군)를 거두었도다. 해 뜨는 곳에서 땅끝까지 위엄이 더해지니, 거대한 비석을 세워 거친 변방에 새겨두노라. 이역만리 사람들이 찾아오니 황제의 모임(王會)이 아름답구나.



[건립 기록]

대명(大明) 만력 27년(1599년) 시월 상순 길일에 세우다. 공사를 감독한 왜적 정벌 유격장군(游擊將軍) 장량상(張良相)이 감독하였다.



2) 임진왜란과 명군의 조선 원정의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은 조선과 일본의 양자 전쟁을 넘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깊은 파장을 남긴 사건이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대륙 진출 구상 속에서 시작된 일본군의 침략은 조선을 급속히 위기로 몰아넣었고, 한양 함락 이후 전세는 극도로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은 조선을 책봉 체제의 일원으로 인식하여 군사적 개입에 나섰다. 이는 단순한 동맹 지원이 아니라 책봉·조공 질서의 유지를 위한 제국적 행동이었다.
명군(明軍)은 평양성 수복과 남진 작전을 통해 전세를 반전시켰고, 이후 수군과 연합하여 왜군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군사 행동은 황제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였다.동정마애비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성되었다.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는 명 수군이 활동하던 해역과 인접해 있으며, 전쟁 이후 명(明) 장수들의 위훈을 기념하기에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 비석은 단순히 전투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명 제국이 수행한 역할과 그 정당성을 돌에 새긴 역사적 증표라 할 수 있다.



3) 장량상 동정마애비의 조형적 특징과 문학성

 
 이 비석은 높이 253cm, 너비 131cm, 깊이 5cm의 거대한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비이다.
 단단한 자연석 위에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된 테두리와 정제된 필체는 위엄과 섬세함을 동시에 보여주며, '동정시(東征詩)'라는 제목은 비(碑)의 핵심 주제를 드러낸다.
 비문의 글씨는 자연석의 질감과 조화를 이루어, 인공적으로 다듬은 조각비와는 다른 장중하고도 생동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표면을 완전히 평탄하게 다듬지 않고 암면(巖面)의 굴곡을 일정 부분 살려 조각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공존하는 독특한 미감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 비석은 보기 드문 마애비 형식으로 제작되어 명나라 장수의 전승을 기념하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 전쟁 인식을 보여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비문의 문학적 구성 또한 주목할 만하다. 구대상(區大相)이 남긴 동정시(東征詩)는 전투의 사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황제의 권위와 장수들의 공적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다. 예컨대 "황제가 크게 노하시어 왜적의 난을 평정하였다", "장수들이 분투하니 쉴 틈조차 없었다"와 같은 구절은 전장의 긴박함을 묘사하면서도, 승리의 원천을 천자(天子)의 위엄과 충성된 신하의 헌신에 귀속시킨다.
 이는 명 제국 중심의 세계관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비석은 시각적 기념물인 동시에 문학적 기록물로서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며, 정치적 선전과 역사적 기억이 결합된 복합적 기념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4) 전쟁 서사와 기념의 정치학,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

 
 모든 역사적 기념물은 선택과 집중의 산물이다. 장량상 동정마애비 역시 임진왜란이라는 방대한 서사 중 특정 인물과 특정 세력의 공적만을 부각한다. 비문은 만력(萬曆) 26년(1598년) 늦가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명군은 정유재란의 혼란 속에서 일본군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군사적 성과는 황제의 덕으로 귀결되어야 했다.
 비문에서 장량상(張良相)을 비롯한 명군 장수들이 낙랑(평양)에서 출발하여 계림(경주)을 지나 부산과 남해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기록은, 명군이 조선 전역을 아우르며 주도적으로 전쟁을 이끌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조선 수군과 의병의 독자적인 활약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명군의 지휘 아래 있는 보조적 존재로 설정하려는 제국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결과이다.
 기념의 정치학 관점에서 볼 때, 이 마애비는 조선인들에게는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며, 패퇴하는 일본군에게는 중화 제국의 강력한 힘을 경고하는 상징적 징표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석을 대할 때 '무엇이 기록되었는가' 못지않게 '무엇이 생략되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조선 민중의 고통이나 조선 장수들의 창의적인 전략은 비문의 행간 뒤로 숨어버리고, 오직 황제의 위엄과 그 명령을 수행하는 장수들의 역동적인 모습만이 바다를 향해 선포되고 있다.
 이러한 서사의 구조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가 어떻게 문자와 바위를 통해 고착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는 과거의 기록이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질서를 규정하려는 권력의 의지임을 시사한다.


 
5) 역사적 사실성과 상징적 의미의 괴리, 진실과 과장 사이

 
 동정마애비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조선 원정을 기록한 유일한 마애비로 알려져 있으나, 그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과 관련해 학계의 논의가 존재한다.
 남해 선소리 일대에서는 대규모 전투의 물적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으며, 인근 왜성(倭城) 관련 문헌 기록과도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비문이 전쟁의 실제 양상을 충실히 재현했다기보다는, 승전을 기념하고 명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 서사를 구성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가 곧 사료적 가치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징적 과장과 문학적 재구성은 제국이 전쟁을 기억하고 표상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비문을 찬술한 구대상의 문장은 전승의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그 공훈의 귀결점을 황제에게로 수렴시켜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히 한다.
 이는 전장의 공로를 제국 질서 안으로 재편하는 담론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은 '전쟁의 사실'을 전달하는 연대기적 기록이라기보다, '승리의 의미'를 창출하고 확산하는 기념적 텍스트였다.
 동시에 조선과 명, 왜가 맞물린 동
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명의 군사 개입이 갖는 정당성을 상징적으로 선포한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사료적 기록과 기념적 서사라는 이중의 층위에서 입체적으로 읽어야 하며, 그 문학적 수사와 정치적 의도, 그리고 공간적 맥락을 함께 분석할 때 비로소 동정마애비의 역사적 위상과 사상적 함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장량상 동정마애비 정면 모습

▲ 장량상 동정마애비 측면 모습

6) 현대적 의미와 학술적 가치,동아시아 공유 자산으로서의 마애비

 
 장량상 동정마애비는 조선 내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중국식 마애비(磨崖碑)라는 점에서 희귀하며, 외국 군대의 활동을 기록한 사례로서 독보적이다.
 이 비석은 명나라 군사 활동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군사력이 정치적 상징으로 활용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오늘날 학술적 연구는 단순히 명군(明軍)의 업적비로 한정하지 않고, 조선·명·일본이 얽힌 국제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비석을 분석한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구조 속에서, 조선의 군사적 대응과 명나라의 파병 정책, 그리고 일본의 침략 전략이 교차한 지점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현장 조사와 문헌 연구를 결합하면, 조형성과 문학성을 아우르는 통합적 해석이 가능하다.
 비석은 전쟁과 권력, 기억과 기념의 관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동아시아 전쟁사와 문화유산 연구 모두에 학술적 가치를 제공한다. 나아가 비문의 어휘 선택과 서체, 각자(刻字) 방식까지 분석하면 당대의 정치적 의도와 상징체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최근에는 비문의 역사적 진실성·명나라 장수의 활동·조선과 일본의 관계, 지역사회의 수용 양상 등 다양한 논점에서 연구가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동정마애비를 단순한 전승(戰勝) 기념물에서 동아시아 교류와 문화 기억의 실천 공간으로 재해석할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장량상 동정마애비는 임진왜란 속 명군의 조선 원정과 황제 권위를 기념한 정치적·문학적 산물로, 단순한 전투 기록물이 아니라 권력과 기억을 새긴 문화유산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 장수의 공적을 넘어서 국가 간 연대와 긴장을 동시에 표상한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 비석은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외교, 문화적 상징의 복합적 맥락을 이해하는 핵심 자료로서 현대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역사적·예술적 가치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현장성과 문학성을 함께 간직한 이 비석은, 남해라는 지리적 경계에서 동아시아 역사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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