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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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남해현의 관방체계와 역사적 의미
조선전기 남해현(南海縣)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성곽(城郭)과 보(堡)·진(鎭)·
봉수망(烽燧網)을 중심으로 치밀한 군사 방어 체계를 갖춘 국가 안보의 요충지

발행연월일 : 2026년 03월 20일(금) 12:12

조선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지방의 지리와 풍속, 군사와 교통, 역사와 인물을 망라한 조선 최대의 지리지(地理志)이다. 그 가운데 남해현(南海縣)에 관한 기록은 단순히 지방 군현(郡縣) 단위의 현황을 서술한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 전기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과 그에 대응하기 위해 구축된 국가 방어 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史料)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과 해상 방어의 최전선이라는 전략적 요건이 맞물리면서, 남해현은 일찍이 국가 안보 전략의 핵심적인 공간으로 주목받아 왔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 글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해현 기록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건치연혁(建置沿革)과 그에 따른 행정적 변천 과정, 둘째, 지역 방어의 기반이 된 군사적 시설과 관방 체계, 셋째, 해상 방어와 밀접히 연관된 봉수망(烽燧網)과 더불어 교통·통신망의 운영 양상, 넷째, 지역의 풍속과 경제 활동과 특산물에 관한 기록, 다섯째,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남해현의 국가 안보적 의의와 지역사적 가치를 고찰하고, 마지막으로 글의 전문을 수록한다.





△ 건치연혁(建置沿革)과 행정 변천


남해현(南海縣)은 본래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섬으로,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전야산군(轉也山郡, 690년)으로 설치되었으며, 경덕왕(景德王) 시기에 이르러 남해(南海, 757년)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는 신라 후기 지방제도 정비 과정에서 나타난 지명으로,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고려 현종(顯宗) 대에는 현령(縣令)이 파견되어 군현의 성격을 갖추었으나, 공민왕(恭愍王) 시기에는 왜구의 침탈로 토지를 잃고 주민들이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으로 피난하는 참화를 겪기도 했다.
조선에 들어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에는 하동(河東)과 합쳐 하남현(河南縣)으로 불렸고, 이후 해양현(海陽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명칭인 남해현으로 환원되었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는 곤명현(昆明縣)과 합병되었다가 곧 다시 분리되었으며,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는 현인(縣人)들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행정 체제가 격하되어 현령(縣令) 대신 현감(縣監)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중종 2년(1507)에는 다시 현령제가 부활했다.
이와 같은 빈번한 행정 변동은 남해현이 단순한 지방 거점이 아니라, 조정의 정치적 통제와 군사적 필요가 긴밀하게 맞물린 지역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남해현은 도서 지역임에도 국가 안보와 직결된 공간으로써 조정의 지속적 관심과 개입을 받은 셈이다.
그당시 남해현(南海縣)의 관원(官員) 조직은 현감(縣監) 1인과 훈도(訓導) 1인이 배치되는 체계로 운영되었다.
남해현은 전야산(轉也山), 해양(海陽), 전산(轉山), 화전(花田), 윤산(輪山)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주요 성씨로는 배(裵)·김(金)·백(白)·진(陳) 씨가 있었으며, 난포(蘭浦) 마을에는 정(鄭)·박(朴)·고(高) 씨가, 평산 마을에는 조(趙)·배(裵)·백(白)·조(曺)·화(和) 씨 등이 정착하여 살았다.
지리적으로 남해현은 진도(珍島)와 거제(巨濟) 사이에 위치한 천남(天南)의 명승지로, 자연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로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 전기,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鄭以吾, 1347~1434)의 기록에 따르면, 남해현은 산천이 험준하고 봉우리와 산세가 수려하여 방어와 군사적 활용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남해현이 단순한 섬이 아니라, 국가 안보를 뒷받침하는 중대한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 군사 방어 시설과 관방 체계


남해현은 왜구의 해상 침탈에 맞서 방어하는 최전선이었다. 이에 따라 읍성(邑城)을 비롯하여 성곽과 보(堡), 진(鎭) 등 다양한 군사시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읍성은 돌로 축조되어 둘레가 2,876척, 높이가 13척에 달했으며, 내부에는 우물 1개와 샘 5개가 조성되어 사계절 내내 마르지 않는 수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섬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 속에서 장기간의 방어와 안정적인 거주를 가능하게 한 필수 조건이었다.
 관방(關防) 시설 가운데 대표적인 곳은 평산포영(平山浦營)으로, 이곳에는 수군만호(萬戶)가 배치되어 있었고, 성(城)은 석축으로 둘레 1,558척에 이르렀다.
 또 성고개보(城古介堡), 우고개보(牛古介堡), 신증미조항진(新增彌助項鎭), 곡포보(曲浦堡), 상주포보(尙州浦堡) 등 여러 보성(堡城)이 해안가 곳곳에 설치되어 각각 관리와 병력을 두었으며, 이들은 왜구의 침투 경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면서 치밀한 해상 방어선을 형성하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미조항진(彌助項鎭)의 사례는 조선의 해방(海防) 체계와 그 대응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진(鎭)은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 17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왜구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이후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 17년)에 다시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새로 구축된 성곽은 둘레 2,146척, 높이 11척으로, 방어력을 강화하려는 조정의 의지가 뚜렷하게 반영되었다.
 이는 왜구의 끈질긴 침탈과 그것에 맞선 조정의 지속적인 방어 노력이 맞물려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남해현 일대에는 크고 작은 성보(城堡)가 해안을 따라 촘촘히 배치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지방 차원의 방어를 넘어, 국가 전체 해상 방위망에서 요충 역할을 수행했다.
 고려 우왕(9년, 1383년) 대에, 수군을 이끌던 정지(鄭地) 장군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한 역사적 승리도 바로 이러한 치밀하게 마련된 군사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더 나아가 읍성(邑城)과 보(堡)·진(鎭)은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중앙 정부가 구상한 군사 전략이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성보(城堡)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제압하고,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을 방어할 수 있다"라는 서술은 남해현 방어망 구축의 철학적 근거를 잘 말해준다.
 즉, 남해현의 관방 체계는 조선의 국방 이념을 실제 지형과 상황에 맞게 구현한 구체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 봉수망(烽燧網)과 교통·통신망
 

 조선 전기의 봉수(烽燧)는 적의 침입을 신속하게 알리는 국가적 통신망이었다.
 남해현에는 금산봉수(錦山烽燧), 소흘산봉수(所訖山烽燧), 원산봉수(猿山烽燧) 등 세 곳의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금산봉수는 북쪽의 진주 대방산(현 창선)과 서쪽의 소흘산, 원산봉수와 연결되었고, 소흘산봉수는 동쪽의 금산봉수와 북쪽의 원산봉수와 통하였으며, 원산봉수는 다시 금산과 소흘산봉수와 연계되어 서로 긴밀한 망을 형성하였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이용해 신호를 전달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신속히 중앙에 보고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도서 지역인 남해가 내륙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교통과 행정 기능을 지원하기 위해 덕신역(德新驛)과 노량원(露梁院) 같은 역원(驛院)도 설치되었다.
 덕신역은 현 북쪽 35리에, 노량원은 북쪽 40리에 위치하여 육지와의 왕래를 비롯해 병력 이동과 물자 수송을 담당하였다.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봉수와 역원의 기능은 필연적으로 긴밀히 결합되어야 했으며, 이러한 체계는 곧 국가 방어망의 심장부로 작동하였다.
 아울러 남해의 주요 항구였던 노량(露梁), 관음포(觀音浦), 상주포(尙州浦), 난포(蘭浦)는 군사 이동과 보급의 거점이자 교역과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운영되었다.
 이들의 전략적 배치는 단순히 남해 지역 내부의 정보와 자원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주를 거쳐 중앙과 연결되는 신속한 통신망 구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왜구의 기습적 해상 침공이 빈번하던 조선 전기에는 봉수가 국가 안보를 지탱하는 핵심 장치로 작동하였으며, 그 긴요함은 당시 방어 체계 전반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 지역의 풍속·경제 및 특산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해 주민들은 대체로 순박하고 근면한 성품을 지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해현은 지리적으로 외진 섬이었으나, 토지와 바다가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였고 그러한 혜택은 주민들의 삶 곳곳에 스며 있었다.
 남해의 풍경과 생업의 모습은 여러 기록에 선명히 담겨 있으며, 특히 정이오(鄭以吾)는 남해의 풍물을 두고 "생물이 크고 풍성하여 국가지자(國家之資)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한 지역을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특산물로는 문어(文魚), 홍어(洪魚), 오징어(烏賊魚), 전복(鰒, abalone), 대구(大口魚) 등 다양한 해산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석류(石榴), 유자(柚子) 같은 과실과 향버섯, 송이버섯) 등 임산물 또한 풍부하게 산출되었다. 추가로 해삼(海參), 농어, 돌돔(石首魚) 등의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남해 바다가 제공하는 수산 자원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남해의 바다는 단순한 생활의 터전을 넘어, 국가의 식량과 재정 기반을 떠받치는 보고(寶庫)였다.
 생업 측면에서 보면 어업(漁業)과 염업(鹽業)이 핵심을 이루었다. 난포(蘭浦), 평산(平山) 등지에는 어량(魚梁)이 설치되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어획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염전포(鹽田浦)를 비롯한 여러 포구에서는 소금 생산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해상 교역의 중요한 품목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어업과 염업의 발달은 남해현이 단순한 군사 요충지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적으로는 향교(鄕校)가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며 학문과 인재 양성의 중심지가 되었고, 금산(錦山)의 보리암(菩提庵)과 도솔암(兜率庵) 등 사찰은 신앙과 수행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또한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성황사(城隍祠) 등은 제례와 신앙의 장으로서 지역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였다. 이러한 교육, 종교, 그리고 제례 시설들은 주민들의 생활 기반을 단단히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며 동시에 국가적 통치 질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남해현이 지니는 국가 안보와 지역사적 가치
 

 남해현은 조선 전기, 국가 안보 체제 속에서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신라 시기 군현(郡縣)의 설치에서 비롯되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이어진 행정적 변천은, 섬이 지닌 전략적 가치를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관방 시설의 촘촘한 배치와 봉수망의 체계적 운영은 중앙과 지방을 긴밀하게 연결했으며, 동시에 왜구의 빈번한 침입에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더불어 어염(漁鹽)과 풍부한 토산물은 단순한 자급자족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경제 전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기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남해현의 모습은 단순한 지방지의 서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곧 국가 생존 전략의 한 축이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문헌으로, 당시의 정치·군사적(軍事的) 의도까지 담아내고 있다. "성보(城堡)의 수호는 약한 자도 강한 자를 제압할 수 있고, 적은 자가 다수를 막을 수 있다"라는 서술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으로서, 남해현의 군사시설이 물리적 방어를 넘어선 국가 시스템의 핵심 장치였음을 웅변한다.
 오늘날 남해현의 옛 성곽과 봉수터, 사찰과 포구는 여전히 당시의 흔적을 전하며, 이를 통해 조선시대 안보 체제와 지방 사회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남해현은 단순히 고립된 섬이 아니라 국가를 지탱하고 보호하는 방파제로 기능하였으며, 군사·경제·문화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입체적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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