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유존혁(劉存奕) 승선의 주둔지 남해 서호 장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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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유존혁(劉存奕) 승선의 주둔지 남해 서호 장군터
김인규 kig2486@nhmirae.com
2018년 06월 04일(월) 11:26
정의연 본지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삼별초(三別抄)란 무엇인가? 고려시대 최우(崔瑀) 집권 시 나라 안에 도적들이 많아 이를 잡기 위해 조직된 야별초(夜別抄)인데, 차츰 규모가 커짐에 따라 좌·우별초(左右別抄)로 나누어졌다. 또 몽고군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자들로 신의군(神義軍)이 만들어졌는데, 결국은 좌·우별초와 신의군이 통합되어 삼별초라 했다. 그래서 삼별초는 국가에서 조직된 공적인 군대가 아니라 최우가 만든 사사로운 군대라 할 수 있다. 국가에는 2군6위(二軍六衛)가 설치되어 있지만, 쇠퇴함에 따라 집권자의 사조직인 삼별초가 안보와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더욱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어 경찰, 경비, 친위, 특공과 국가수호를 위한 군사적인 활약을 하면서 나라 안팎의 모든 일에 간섭하는 권력기구로 변신하였던 것이다.

때는 고종 18년(1231). 몽고군이 남하하여 고려군을 격퇴하고 개경을 포위한 후 고려에 항복을 강요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금품과 예물을 바치면서 물러갈 것을 청했으나 몽고군은 서경(西京)이하 북계(北界) 14군데 성(城)에 달로화적(達魯花赤:몽고지방장관)을 두고 요동으로 퇴거했다. 그렇지만, 몽고가 고려에 항복을 계속 강요함에 따라 고종 19년(1232)에 형식적으로 항복하였다. 그런데 몽고는 고려에 동남동녀의 공납과 조공 등 강압적인 요구가 날로 심해지니 이를 견디지 못한 고려는 결국 원종 10년(1269)에 정부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단행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반기를 들고 항몽(抗蒙)을 재개하는데 장군 배중손(裵仲孫)은 새로운 고려정부를 세우기 위해 고려 원종 6촌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삼고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이신손(李信孫)을 승선(承宣)으로 삼아 왕의 좌우에 있게 하였다. 이런 행위는 고려정부로 인정치 않았지만 고려인의 자존심과 구국정신과 항몽사상 없이는 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원종 11년(1270)에 삼별초군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몽고에 저항하다 전선 천여척으로 재화와 백성, 노비까지 모두 싣고 남하하였다.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성(龍欌城 사적126호)을 쌓고 궁전을 세워 남해, 창선, 거제, 제주 등 30여 섬을 장악하니 해상왕국이 건설되었다. 이때, 왕을 보좌하던 승선 유존혁은 남해에 주둔하면서 조공선을 탈취하고 진도 배중손과 같이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다. 어떻게 보면 남해는 동·남해안의 해상 길목이며, 여러 섬과 경상도 남변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진도보다 중요한 요충지로 보았다.

남해에 삼별초가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바로 서면 서호리 대장군터(재앙굿터)이다. 대장군터 입구 쪽에는 홀포가 있으며, 둔전과 염전도 있었다. 대장군터에서 흐르는 계곡천은 서상항으로 흘러 한려수도에 합하고 배후에는 망운산 줄기가 자연성곽을 이룬다. 이곳 에 4단석축이 잔존하고 있는데, 진도 용장성 축성과 비슷하며 채집되는 유물도 당시 와편이나 자기편들이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힘 쌘 장군(유존혁)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살았는데 앞 바다를 지나는 세곡선(조공선)을 부채로 부쳐 들여 약탈하므로 나라에서 군사를 풀어 그를 잡고 보니 큰 지네가 되어 주춧돌 밑에 숨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고려대장경남해판각(1236), 고려항복(1236), 고려정부개경환도(1269), 창선소장 國史 진도 移藏(1269), 삼별초 용장성 이동(1270), 유존혁 남해 주둔(1270)과 같은 시기이다. 남해에도 고려 격동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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