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미다례는 가야 포상팔국 중 남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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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미다례는 가야 포상팔국 중 남해인가?
김인규 kig2486@nhmirae.com
2018년 09월 07일(금) 15:34
가야 지명 중에 침미다례가 나오는데 침미다례는 어느 곳이며, 어떤 국가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기록을 한번보자, 신라 내물왕 14년(고구려 고국원왕39, 백제 근초고왕24, 369) 가라제국기(加羅諸國期)에 남해와 관련되는 기록이 있다. 일본기록이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신공(神功) 47년(367)에 전년(前年) 탁순(卓淳)에 왔던 3인을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백제 사자(百濟使者)가 가지고 온 헌물(獻物)이 신라 사자(新羅使者)의 것보다 몹시 초라했다. 그 연유를 물으니 도중에서 신라 사자가 강박(强迫)하여서 헌물을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 신공왕후는 49년(369) 봄 3월에 백제 명장 모쿠라곤시(목라근자[木羅斤資])와 일본에서 온 아라다와께(황전별[荒田別]) 등을 보내 탁순국(卓淳國)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이 때 비자벌(比自伐 昌寧), 남가라(南加羅 金海), 훼국(喙國 大邱), 안라(安羅 咸安), 다라(多羅 陜川), 탁순(卓淳 柒原), 가라(加羅 高靈)를 평정하고 서(西)로 고해진(古奚津 康津)과 침미다례를 쳐서 이곳을 백제(근초고왕과 근구수태자)에 주었다. 그리하여 일본 장군과 백제왕은 벽지산과 고사산(古沙山 古阜)에서 맹약(盟約)하고 양국 간에 친교가 성립되었는데 일본 신공황후는 백제와 왕래하는 길로 다사성(多沙城 河東)을 주게 되었다."라는 기록이다.

그리고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침범하여 패망시키고 백제와 침미다례를 압박했으며, 근초고왕은 목라근자 사사노궤 등이 끌고 온 왜군과 함께 침미다례를 병합하였고 신라를 치고 가야 7국을 쳤다. 결국 골포국(마산), 고사포국(고성), 사물국(사천)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연맹에 대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공왕후 49년(369)에 나타나는 침미다례는 어디에 소속된 부족집단인지 의견들이 분분하다. 제주도 설, 해남 설, 남해 설 등 3가지 설이 있는데, 제주도가 침미다례라고 주장하는 설은 백제 온조왕 27년(AD9)에 마한이 멸망하여 금강유역에 살던 마한의 왕족과 귀족들이 제주도로 가서 세운나라이기 때문이고, 전남 해남설은 마한의 54국과는 다른 마한제국의 하나인 신미국(新彌國)을 침미다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서로 주장이 엇갈리는데, 호남에서는 침미다례가 해남이라 비정(批正)하고, 영남에서는 남해라 비정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침미다례 지역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침미다례가 남해라는 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첫째, 침미다례가 일본이 백제를 제외하고 가야와 신라를 침공한 사건으로 그때 남해는 가야에 속해 있었다. 둘째, 해남은 이미 마한으로 백제의 관할이 되어 있어 일본의 침탈지역이 아니었으며, 셋째, 남해와 인접한 하동 섬진강을 일본이 취하여 백제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960년에 발간한 경상남도지 상권에서 주장하는 침미다례를 남해라고 비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3일 칼럼에서 남해는 태조 10년(927)에서 경순왕 9년(935)까지 약 8년간 후백제에 소속된 것으로 주장한바, 결국은 남해가 백제(369)와 후백제(927) 때 백제 소속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간혹 남해에 백제 풍습이 흐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으로 확인되며, 침미다례는 가야소속이라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에도 남해가 포함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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