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南海聞見錄(남해문견록> 다시 읽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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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南海聞見錄(남해문견록> 다시 읽기-②

-보수주인(保授主人), 금산 사슴 양면보기: 남해인(南海人)의 자립성과 자존감

2021년 03월 19일(금) 11:04
정 문 열 (인문학당문항 운영자)
▲유의양 선생의 <남해문견록> 중 보수주인과 관련한 부분


▲금산(錦山) 유산(遊山) 기록 중 금산 사슴과 관련한 부분


조선 초기 중앙정부의 서남해 도서에 대한 방침은 공도(空島,섬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켜 섬을 비움)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침입해 오는 외세에 대한 국가의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남해 내륙 연안 지역 주민들은 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섬과 바다가 제공해 주는 해산물과 소금, 그리고 개간으로 조성된 토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17~18세기 서남해 도서지역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중앙정부의 도서(島嶼)정책이 수정되었습니다.

즉 국내적으로는 서남해 도서에 대한 행정편제를 단행하였고, 국외적으로는 외세에 대한 해방(海防,수군으로 해상을 방어함)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유의양 선생이 남해로 유배 온 1771년 전후 남해는 유입 인구의 증가로 전체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유배객과 함께 솔가(率家)해 온 유배가족도 일부 있었지만, 인구 증가의 가장 큰 요인으로 조선 후기 들어 도서(島嶼) 지역에 개간이 가능한 무주 공한지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연구자의 주장에 따르면, 1720년대 남해 고현면, 서면, 이동면 전답에서 개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2%, 34%, 23%였다고 합니다. 많은 인구가 유입됨으로써 심한 농지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그 결과 부지런히 새로운 농경지를 일구었던 것입니다. 남해의 어디에나 많은 다랭이논(계단식 논)들은 이 시기에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빈한한 유입 농민들이 해안이나 산의 경사진 곳에 개간지를 만들어 자기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내륙지역에서는 양반들이 개간사업에 개입했고, 대부분 양반 소유의 토지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에 비해 남해에는 상민과 노비의 개간지 소유 비율이 양반보다 훨씬 높다는 점입니다.

개간지의 소유 현황을 보면, 양반이 1인당 약 6부 정도였음에 비해, 상민 9부, 노비는 6부 정도였습니다(조선의 결, 부, 속 등의 넓이가 상중하 급지에 따라 달라서 일률적으로 지금의 평수(坪數)로 말하기 어려움). 이로 미루어 보면 상민과 노비의 경제적 형편도 상당히 나아졌을 것입니다.

내륙지역의 소작인들은 농지는 물론 자질구레한 것까지 눈치 볼 것이 많아서 모든 생활이 예속돼 자립성이 약했던 데 반해, 남해의 상민노비 계층은 내륙지역과는 달리 경제적 자립도가 높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농업환경과 경제적 상황은 남해인(南海人)의 사고와 풍속문화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어떤 이는 개간지를 통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생존 자체가 누군가에게 예속된 삶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수주인(保授主人) 이야기

18세기 남해의 경제사회적 여건을 고려하면서 『남해문견록』에서 유의양 선생이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정하는 과정을 읽어보겠습니다.

보수주인(保授主人)이란 숙식을 해결할 거처를 마련해 주고 유배죄인을 감시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유의양 선생의 일행이 1771년 2월 26일(양력 4월 10일) 노량 나루에 도착해서 배편으로 선소까지 온 후 읍내에 들어서는 대목입니다.

<읍내에 들어오니 작은 성이 있는지라, 북문으로 들어가 관문을 지나 성 남문으로 나가니, 관가의 하인 하나가 와서 주인을 잡았으니 가자 하고 가르키거늘 말을 몰아 바삐 가니, 주인의 자식 아이놈이 마주 나와 폭려한(暴戾, 사람의 도리에 어그러지게 모질고 사나움) 소리를 하고 집을 막기를 심히 하니, 해도(海島, 남해) 인심이 극악한 줄 들었던 것이어니와 소견에 극히 해연하고(駭然, 이상스러워 놀랍다), 우겨서 들어가려 하면 괴이한 행동거지가 있을 듯싶기에 그 아이를 꾸짖지도 아니하고 내 종을 신칙하여(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여), '아이 말 들은 체 말라' 하고 말머리를 돌이켜 남문 밖으로 도로 와 길가에 앉고, '내 귀양으로 이리 왔더니 보수주인(保授主人)을 관가에서 정하여 맡기는 것이 규구(規矩, 지켜야 할 법도)이니 주인을 정하여 달라' 하니, 남문 밖 김시위란 백성의 집으로 정하여 주거늘, 그리 가니 김시위는 잡소리를 아니하고 좋게 대접하더라.>

보수주인으로 정한 주인의 아들이 문 앞에서 사납게 막아섭니다. 유배죄인을 들이지 못하겠다는 격렬한 몸짓입니다. 남해현감보다 지위가 높을 뿐만 아니라, 궁궐에서 경연을 담당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고,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는 일을 수행하는 홍문관 수찬(修撰)을 지낸 양반에게 과연 '폭려(暴戾)한 짓'이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약간 뒤 시기인 정조(正朝) 연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박지원의 <양반전>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궁한 양반이 되어 시골에 묻혀 있어도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있으니, 이웃집 소가 있으면 내 논밭을 먼저 갈게 하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내 밭 김을 먼저 매게 하는데, 어느 놈이든지 감히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코에 잿물을 먹이고 상투를 붙들어 매고 수염을 자르는 등 갖은 형벌을 해도 감히 원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의 통치구조는 신분제 위에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상하 예의 질서의 엄정함이 조선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었습니다. <양반전>에 보이는 양반의 행태가 조금 과장되기는 했어도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남해에는 유배객들이 너무 많았고, 그로 말미암아 보수주인(保授主人)의 고충도 심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감히 양반에게 이렇게 '폭려(暴戾)한 짓'을 일삼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용납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해인(南海人)에게는 가능했습니다. 남해인들에게 양반사회의 질서는 내륙처럼 상하질서가 엄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농민의 목숨줄이 토지인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남해인은 토지 예속성이 다른 내륙지역에 비해 느슨했기 때문입니다.

▷남해의 진상품(進上品) 이야기

다음은 금산(錦山) 유산(遊山) 기록 중 일부입니다. 여기에도 남해인(南海人)의 양반사회에 대한 의식의 일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금산에)사슴이 많다 하니 사슴이란 짐승이 뫼에서도 새끼 치거니와 바다고기가 화하여 사슴이 되기에 특히 많다 이르니, 북도도 바닷가이요 전라도 변산도 바닷가이기에 다 사슴들이 많으니 그 말이 옳은가 싶고, (……) 금산에 사슴이 많기 때문에 이전에 이 고을의 녹용과 사슴 머리통의 진상이 있어 매양 사냥할 적에 민폐가 자심하더니, 칠팔년 전에 어사 이휘중이 서계하여 녹용 잡는 폐단을 자세히 아뢰니 임금께서 녹용을 공물로 바치게 하고 남해 진상을 말게 하시니.>

위의 기록을 남해 금산 인근 포민(浦民,갯가에 사는 백성)의 입장에서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금산에 사슴이 많았습니다. 왕실에 녹용을 진상하기 위한 사냥에 인근 지역 포민(浦民)들이 징발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로, 잡은 생선지속을 읍내까지 이고지고 수십 리 길을 걸어서 장날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냥몰이에 불려 다니느라 어업활동을 못하게 되어 생활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민폐가 심해지고 원성이 높아지자, 남해에 파견된 어사가 그간 사정을 조정에 서계(書啓)하여 왕명으로 남해금산 녹용진상을 없애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근 포민들에게 민폐는 여전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사슴사냥 징발 대신 최고의 상품(上品) 물고기를 공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생계에 위협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인근 포민들은 금산의 사슴은 곧 자신들이 잡은 최상의 물고기와 같은 것이라는 원성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250년 전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물고기가 변해서 사슴이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의양 선생은 유배죄인의 신분으로 남해 금산 인근의 포민들의 불만을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조정에 대한 불만으로 오해받아 자칫 더 무거운 형벌로 일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포민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해현감 정택수 사건 처리를 위해 어사 이휘중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파견 목적은 환곡 관련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록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조 40년 12월 13일 기사입니다.

<'남해현감 정택수가 환곡의 징수를 독촉하느라 납부를 거부한 어떤 선비를 잡아왔는데, 그 고을 포교가 구타하여 죽였습니다. 그러자 물에 시체를 던져 자취를 없앴다 하니, 조사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매우 놀라고 측은히 여겨 교리 이휘중을 어사로 삼아 가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유의양 선생이 남해에 유배 오기 7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사 이휘중은 남해현감 사건을 처리한 후, 금산 녹용진상 민원도 조정에 보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의 문견(聞見) 기록은 매우 정확합니다.

『남해문견록』 양면보기를 통해 보수주인 정하는 이야기와 금산 사슴사냥 민원 이야기를 남해인의 입장에서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두 이야기의 바탕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땅을 일구고 바다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왔던 남해 조상들의 당당함이 엿보입니다. 비록 풍요롭지는 않았겠지만 자신과 가족의 생계가 지주의 손에 달려 있지는 않았기에, 내륙의 소작인들이 지주를 대하듯이 완곡하고도 순종적인 언행을 구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성품은 활달 진솔하고 말은 직설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지인을 배척하는 마음도 조금 강합니다. 어쨌든 남해인은 매사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유의양 선생은 '해도(海島) 인심이 극악하다'고 했습니다만 그건 저쪽의 시각이고, 이쪽의 입장으로는 속된 말로 '깡다구'가 좀 세다고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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