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계 정익환(丁益煥) 선생, 그가 꿈꾼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
정익환 선생은 무인의 기질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시대의 불의에 맞서 공동체를 이끌며 민중의 삶을 지켜낸 참된 지도자
정익환 선생은 도세(賭稅) 저항과 의병활동으로 불의에 맞서 민중과 함께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가며 끝까지 신념을 지키고 투쟁한 거인이었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5월 22일(금)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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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 남해 창선도는 단순히 수려한 경관을 가진 섬이 아니다. 이곳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외세의 수탈과 불의에 맞서 온몸을 던진 민중 지도자 녹계(鹿溪) 정익환(丁益煥, 1848.5.11.~1919.3.12.) 선생의 기개가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그동안 정익환 선생의 활동은 지역적인 도세 저항이나 단순한 민원으로 치부되어 국가적 서사에서 소외됐다. 그러나 최근 제적등본과 일제의 기밀 수사 기록, 그리고 그가 남긴 가사 문학인 「심심가(尋心歌)」에 대한 학술적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선생의 삶은 항일(抗日) 독립운동의 찬란한 한 페이지로 다시 쓰이고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정익환 선생의 재조명은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기록되지 않았던 민초(民草)들의 항쟁사(抗爭史)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과거에는 그저 세금 문제로 인한 집단행동으로 착각되기도 했으나, 남해문화원과 진주문화원의 헌신적인 고증을 통해 이것이 일제의 경제적(經濟的) 침탈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항일 투쟁이었음이 명백히 밝혀졌다.
이제 우리는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 했던 한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온전하게 복원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마주하고 있다.
선생의 생애를 추적하는 과정은 곧 우리나라가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어떻게 자신을 스스로 지켜냈는지 확인하는 여정이다.
△ 출생과 성장: 강직한 천성과 무인으로서의 기상
정익환(丁益煥) 선생은 1848년 5월 11일,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식포마을) 606번지에서 나주 정씨 덕성군의 40세손으로 태어났다.
부친 정진교(丁眞敎)와 모친 장흥랑 사이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氣骨)이 장대하고 민첩하며 담력이 남달랐다.
특히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대중을 하나로 묶는 통솔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했다.
이러한 무인 기질은 그를 무과 급제로 이끌었고, 사천 선진리성 파견 대장격으로 보궐 근무하며 지역민들에게 '정대장(丁代將)'이라는 존경 어린 별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무예(武藝)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不義)를 보면 조금도 굽히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사천과 남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군사 경험을 쌓았으며, 장수를 대신(代身)해 군을 지휘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아 얻은 '대장(代將)'이라는 칭호는, 훗날 그가 위기의 순간에 민중을 이끄는 실질적인 사령관이자, 정신적 지주로 거듭나는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선생은 자신의 기골과 재능을 개인의 영달이 아닌 고향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썼다.
기골이 장대한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창선 면민들에게는 커다란 바위와 같은 안식처였으며, 침략자들에게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다.
무과 급제자로서의 정통성과 파견 대장으로서의 실무 능력은 훗날 그가 전개한 조직적인 저항 운동의 전술적 밑바탕이 되었으며, 그의 성품은 추상(秋霜)같이 엄격했으나 백성을 향한 마음만은 누구보다 깊고 따뜻했다.
△ 동학 의거와 구국 전선을 통한 외세 타도의 첫걸음
정익환 선생의 투쟁은 단순히 눈앞의 세금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대외적 투쟁은 시대의 아픔을 관통했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가담이었다.
선생은 '인내천(人乃天)'의 평등사상(平等思想)과 외세 배척의 기치에 깊이 공감하여 접주(接主)로서 활동하며 민중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는 일제를 타도하고 부패한 권력을 척결하는 것만이 조선의 독립과 백성의 평안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었다.
5만 년 선경(仙境) 세상을 꿈꾸며 생사를 걸고 투쟁에 뛰어든 그의 행보는, 그가 단순한 지역 유지(有志)에 머물지 않고 국가적 명운 앞에 분연히 일어선 선각자였음을 증명했다.
동학(東學)의 조직력과 항쟁 정신은 이후 전개될 도세(賭稅) 저항 운동과 의병(義兵) 활동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항일 의지는 이 시기에 이미 확고한 신념으로 뿌리내렸다.
그는 동학 활동을 통해 민중이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결집해야 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몸소 체험했다.
이는 훗날 창선도(昌善島) 전체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 구국을 위한 실천적 방편으로서 동학을 수용했던 선생의 결단은, 그가 지닌 시대적 통찰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이미 민족 자결(民族自決)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선구적인 태도는 그를 단순한 무인(武人)이 아닌 사상적 기반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시켰다.
△ 「심심가(尋心歌)」와 도세 저항 운동: 붓과 행동으로 맞선 수탈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면세지였던 창선목장 부지가 관유지(官有地)로 강제 편입되고 가혹한 도세(賭稅)가 부과되자, 창선 면민들은 전 재산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을 위기에 처했다.
이에 정익환 선생은 1898년,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495구의 장편 가사 「심심가」를 지어 배포했다.
"사는 자는 관속이요, 죽는 자는 백성이라"며 통곡하는 그의 목소리는 민초들의 가슴에 저항의 불을 지폈다.
이 노래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조차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공유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심심가」는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 전환기 갑오개혁의 실상을 담아낸 유일무이한 다큐멘터리 가사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선생은 붓을 들어 부당한 권력의 민낯을 기록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 나서야 함을 역설했다.
이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민중을 조직하고 투쟁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강력한 정치적 선언문이자 민족적 호소문이었다.
가사의 행간마다 서려 있는 분노와 슬픔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을 넘어 당대 호남과 영남 남해안 일대 민중들이 겪었던 공통의 고통을 대변했다.
선생은 「심심가」를 통해 당시의 도세(賭稅) 징수 과정이 얼마나 불합리했는지 구체적으로 폭로했으며, 이는 훗날 관찰사(觀察使)와 당국을 상대로 한 법정 투쟁에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붓으로 쓴 노래가 칼보다 날카로운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선생은 몸소 보여주었다.
△ 정익환 선생, 창선면민과 함께 권리를 되찾다
정익환 선생은 물리적 항거에만 머물지 않고 행정적·법적 투쟁을 끈질기게 병행했다.
1906년부터 천 리 길 경성(京城)을 수차례 오가며 중앙 정부와 담판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6차례나 구금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논리 정연한 변설(辯說)로 당국자들을 압도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가산(家産)을 탕진하면서도 오직 창선 면민들의 토지 환수를 위해 헌신했다.
선생의 진정성에 감복한 창선 면민들은 '등장간다'는 노래를 부르며 진주 감영까지 100리 길을 교대로 왕복하며 연좌시위를 전개했다.
특히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3년간 도청 앞을 지키며 벌인 석방 운동은, 지도자와 민중이 혼연일체가 된 한국 근대 민중운동(民衆(運動)의 보기 드문 사례이다.
당시 창선면 부녀자들은 매일 10여 명씩 조를 짜서 진주까지 걸어가 '정대장'의 무죄 방면을 호소했다.
이러한 헌신은 단순히 감상적인 지지를 넘어, 정익환이라는 인물이 지역사회에서 얻었던 신망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부 관리들조차 이들의 끈질긴 시위에 혀를 내둘렀으며, 결국 선생의, 불굴의 투지와 면민들의 헌신적인 뒷받침 덕분에 강제 수용된 토지는 환원되었고 조세가 감면되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단순한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민중이 힘을 합치면 부당한 공권력(公權力)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민주적 의식의 승리였다. 한 지식인의 희생과 민중의 결합이 일구어낸 위대한 실천의 기록이다.
△ 의병 활동과 일제의 탄압: "신(神)과 같이 존경받는 수괴"
1909년,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전의 하나로 지리산과 남해안 일대의 의병 세력을 소탕하며 정익환(丁益煥) 선생을 최우선 제거 대상으로 지목했다.당시 경남도 경찰부장의 비밀 보고서에는 선생을 '폭도 수괴'라 지칭하면서도 "현재 창선에서 신(神)과 같이 존경받는다"라는 경외 섞인 기록을 남겼다.
8월 16일, 일제 헌병대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수백 명의 주민이 맨몸으로 저항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 격전 중 의병(義兵) 2명이 순국하고 2명이 중상을 입는 참변이 발생했다.
▲ 정익환 선생의 행적을 보고한 일본 경찰 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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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도주하던 중 생포되어 진주재판소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그의 투옥은 오히려 창선면민들의 항일 정신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그가 단순히 세금 문제로 저항하는 인물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는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핵심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그를 '신(神)'처럼 여겼다는 일본 측 기록은, 그가 창선도라는 작은 섬 안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정신적 권위를 가졌음을 뜻한다.
이는 일제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실제로 선생은 의병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군수 물자를 지원하는 등 실질적인 독립 전쟁의 배후 역할을 다했다.
일제조차 두려워했던 그의 영향력은 도세 저항이 단순한 경제 운동을 넘어 일제의 지배 자체를 거부하는 강력한 독립운동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 영원한 대장, 녹계(鹿溪)의 정신을 계승하며
정익환 선생은 1919년 3·1운동의 함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인 2월 11일, 향년 72세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生)을 마감했다.
비록 조국의 광복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낸 창선의 토지와 정신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일제 치하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1940년 면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창선목도세견면정씨익환사적비'는 선생을 향한 변치 않는 존경의 증표이자,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비석은 창선 상신리에 세워져 그의 공적을 기리며 보는 이에게 깊은 숙연함을 안겨준다.
이제 지역문화원의 노력으로 선생의 공적이 항일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온전히 재정립된 것은,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운 일이다.
그의 가계(家系)인 나주 정씨 후손들과 창선면민들은 오늘날에도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사적비를 관리하고 공적을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자신의 안위와 가산을 모두 내던지고 오직 공동체의 의로움을 위해 살았던 '녹계 정익환' 선생의 이름은, 이제 남해 섬마을을 넘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거성(巨星)으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그의 고결한 희생정신은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과 지도자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금 무겁게 일깨워 주고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꿈꾸었던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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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선목도세견면정씨익환사적비 번역문
창선(昌善)은 옛 흥선현(興善縣)이다. 조선 중엽, 현(縣)을 폐하고 면(面)으로 만들어 진주(晉州)로 이관하면서 목장을 설치하였다.
백성의 토지를 떼어 내어 도세(賭稅)를 정해 말 기르는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으나, 본래의 밭은 그대로 백성의 소유로 두어 300여 년을 내려오며 고치거나 옮김이 없었으므로 대대로 전해져 백성들이 각자 그 생업에 안주하였다.
고종 갑오경장(1894) 때에 이르러 목장이 마침내 폐지되었으나, 결세(結稅)를 다시 올리면서 국유지로 인정해 버렸다.
이른바 도세를 예전처럼 거두며 징수를 독촉하는 채찍질이 극에 달하니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이러한 고통이 쌓인 지 12년이 되니 백성들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고, 온 면의 49개 마을 만여 생령(生靈)이 장차 거꾸러지고 유랑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정익환이 개연히 스스로 희생하여 민중을 구하겠노라 맹세하고, 목장 들판 밖에 막사를 치고 단을 쌓아 하늘에 기도하며 혹시라도 황상께서 들으시기를 바랐다. 이어 을사년(1905) 12월 23일에 크게 민회(民會)를 열어 단련되고 인내심 있는 사람 한 명을 대표로 선발하여 소원과 교섭 등 모든 사무를 전담케 하였다.
정익환 공의 종제(從弟) 정무근(丁務根)이 그 선발에 당첨되었는데,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이듬해 병오년(1906) 정월 6일에 경성(서울)으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천 리 길을 발로 건너 사방으로 분주하니, 혹은 서울 감옥에 구금되기도 하고 혹은 부·군 및 감독국에 불려 가서 문초를 받았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직진하며 굽히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여섯 차례의 큰 담판을 거쳤는데, 말씨가 간절하고 명민하여 총명한 자 중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무신년(1908) 8월 4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백성의 소유로 확정되어 마침내 바른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 정공 종형제는 모두 자선의 마음을 가졌고 뜻을 세움이 굳건하였다. 한 분은 몸을 던져 앞장서 일을 시작하였고, 한 분은 일을 맡아 능숙하게 처리하여 쌓인 원한을 풀게 하고 거대한 고질적 병폐가 사라지고 스스로 살아나니, 창선의 사람들이 죽을 고비에서 다시 살아났으니, 먼저는 울부짖었으나 나중에 웃게 된 이 공과 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사건의 대략을 간략히 기록하여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 금릉 김영두 짓고, 전주 이기숙 쓰다. 1940년 4월 10일. 나주 정씨 문중 청년회 등 세움.

2026.05.22(금) 14: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