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남해현읍지』 곡수(穀數)에 기록된 남해의 병참과 민초의 삶
1832 「남해현읍지」 곡수(穀數) 항목은 홉과 작 단위까지 명시된 정밀한 기록으로,
조선 후기 군사 행정이 낙후되었다는 통념을 깨고 체계적인 병참 시스템이 작동했음을 증명한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8월 14일(금)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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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상남도 남해(南海)는 수려한 한려해상의 풍광을 품은 평화로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의 남해 바다는 외국 선박인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서구 열강(列强)의 통상 압박 속에서 국방의 최전선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이러한 시대적 긴장과 지방 행정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가 바로 1832년(순조 32)에 편찬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의 「곡수(穀數, 곡식의 수량)」 항목이다.
이 읍지는 단순한 곡물 재고 기록을 넘어,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남해현이 봉수대와 수군, 육상 방어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축한 정교한 병참(兵站, Logistics) 시스템을 보여주는 핵심 사료이다.
조선 후기 지방재정과 군수(軍需) 행정이 낙후되었다는 기존 인식과 달리, 합(合)과 작(勺)까지 기록한 정밀한 회계 장부는 조선 관료제의 체계성과 행정 역량을 보여준다.
본 글에서는 1832년 『경상도읍지』 「남해현읍지」 곡수(穀數) 항목에 담긴 다양한 재원과 회계 체계를 통해 19세기 조선의 지방재정과 군사 병참의 실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읍지에 기록된 원회(元會), 순영별회(巡營別會), 우병영군향(右兵營軍餉), 통영회부(統營會付) 등 여러 계정은 중앙과 지방, 육군과 수군을 잇는 물자 순환 체계를 보여준다.
강한 군대는 무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안정적인 식량과 보급, 정비 체계가 뒷받침될 때 지속적인 전투력이 완성된다.
조선의 관료들은 이러한 병참(兵站)의 원리를 행정 시스템 속에 구현했다.
곡수(穀數) 조항 첫머리에 "穀數 元會: 米二十三石九斗五升六合二勺, 租八十二石三斗三升四合一勺" (곡수 원회: 쌀 23석 9두 5승 6합 2작, 조 82석 3두 3승 4합 1작)은 남해현 기본 회계인 원회(元會), 즉 원장부상의 기준 수량을 보여준다.
곡물을 합(合: 종이컵 한 컵 정도)과 작(勺: 소주잔 한 잔 보다 적은 양) 단위까지 세밀하게 기록한 내용은 조선 후기 지방 행정의 높은 회계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이 장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린 힘이 소수의 장수나 정치가에게만 있지 않음을 증언한다.
장부를 기록하고 군량을 다스리며 지역을 지켜낸, 이름 없는 남해현 관리와 장졸들의 묵묵한 성실함이야말로 역사를 바꾼 진짜 주역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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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 수량으로 확인하는 남해현의 군사적 위상
기록에서 독자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경상감영(慶尙監營)의 별도 회계를 의미하는 '순영별회(巡營別會: 감영에서 별도로 운용하는 특별 회계)' 계정에 편성된 곡식의 규모이다.
여기에는 쌀 85석이 넘는 물량과 조 1,500석에 이르는 곡식이 배정되어 있는데, 이는 남해현 자체의 일반 행정 수요를 넘어서는 군사 목적의 비축분이었다.
당시 경상감영은 경상도 전역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최고 지방 통치 기구였으며, 순영별회(巡營別會)를 통해 남해에 이러한 곡식을 배정한 것은 남해현이 단순한 지방 고을이 아니라 대마도와 왜적, 나아가 서구 이양선의 접근을 방어하는 남해안 방어선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전시에 군대가 상륙하거나 집결할 경우, 이들에게 필요한 군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후방 병참 기지가 남해읍성과 그 창고였음을 이 기록은 잘 보여준다.
실제 읍지에 기록된 "巡營別會: 米 八十五石二斗九升三夕, 租 一千五百七十一石十四斗一升三合三夕" (순영별회: 쌀 85석 2두 9승 3석, 조 1,571석 14두 1승 3합 3석)이라는 대목은 경상감영 관할의 특별 군사 재원 현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쌀 85여 석과 조 1,500여 석이 남해현에 편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영남 방어체계에서 차지한 전략적 위치를 수치로 확인하게 한다.
국가적 위기가 높아질수록 조선 조정과 경상감영은 전방 군현의 군량 확보와 관리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 과정에는 곡식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출납 내역을 기록했던 서리와 군졸들의 지속적인 관리가 있었다.
결국 순영별회 기록은 조선의 국방 체계가 제도와 명령만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정밀한 재정 관리와 물류 체계를 통해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남해현읍지」가 보여주는 육군(우병영)과 수군(통제영)의 병참망
조선 후기 남해안의 방어체계는 바다를 담당한 통제영(統制營: 통영)과 육상을 방어한 우병영(右兵營: 진주)의 양축 구조로 운영되었으며, 남해현은 두 군사 조직을 연결하는 병참 거점이었다.
읍지에 기록된 '우병영군향(右兵營軍餉)'과 '통영회부(統營會付)' 항목은 진주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과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에 필요한 군량이 남해현에 비축되고 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통영회부의 쌀 502석과 우병영군향의 조 757석 등은 남해가 육군과 수군의 작전을 뒷받침하는 후방 보급지로 기능했음을 확인하게 한다.
기록에 나타난 군향 배정(軍餉配定)은 전쟁 수행의 핵심이 병력과 무기뿐 아니라 안정적인 보급망 유지에 있음을 조선 정부가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右兵營軍餉: 米四石六斗四合九夕, 租七百五十七石六斗七升六合四夕, 太二百三十四石七斗九升三合一夕"(우병영군향: 쌀 4석 6두 4합 9석, 조 757석 6두 7승 6합 4작, 콩 234석 7두 9승 3합 1석)이라는 상세한 기록은 군영의 운영 목적에 따라 곡물을 세분하여 배정했음을 보여준다.
군량의 주곡인 조(租), 장기 보관과 군마 사료로 활용된 콩(太)을 구분해 비축한 것은 조선 후기 군수 행정의 치밀함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바다를 지키는 통제영 수군과 육지를 방어하는 우병영 병력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물자 공급이 필요했으며, 남해현은 바로 이러한 국가 방어망의 중간 거점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남해현읍지」의 이 기록은 조선 후기 국방 체계가 군사력 자체만이 아니라 정교한 병참 운영을 기반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군선 유지비로 읽는 조선 후기 수군 운영 체계
아무리 강력한 조총과 화포를 장착한 전투함이라도 선체가 부식되고 돛대와 노(櫓)가 손상되면 바다 위에서는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남해현읍지」 곡수(穀數) 항목의 중요한 가치는 군선을 건조하고 관리하는 비용인 '전선가(戰船價)', '병선가(兵船價)', '환퇴선가(還退船價)'를 별도의 곡식 계정으로 구분하여 군선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기록에는 전선가 항목으로 쌀 120석이 추가 배정[加下]되어 있고, 병선가로 13석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함선을 보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비와 수리에 필요한 비용까지 체계적으로 마련했음을 보여준다.
"戰船價: 米加下一百二十石八升九合. 兵船價: 米十三石五斗七升六合三夕"(전선가: 쌀 가하 120석 8승 9합, 병선가: 쌀 13석 5두 7승 6합 3석)이라는 기록은 군선의 운용과 정비를 위해 별도로 책정한 예산 체계를 확인하게 한다.
특히 '가하(加下)'라는 추가 배정 항목은 기존 재원만으로 충당하기 어려운 군선 유지 비용을 별도로 마련했음을 보여준다. 바닷물과 파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군선은 정기적인 수리와 부품 교체가 필수였으며, 남해현은 전선가와 병선가를 통해 이러한 관리 비용을 뒷받침했다.
또한 환퇴선가와 같이 군선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산 항목까지 별도로 기록한 점은 조선 후기 수군 행정이 단순한 군선 보유를 넘어, 지속적인 운용과 재정 관리를 고려한 체계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간지(干支) 기록에 담긴 남해현 군수(軍需) 재정의 운영 방식
조선 후기 남해현의 곡식 장부가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정규 회계 외에도 국방 수요와 재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별도의 재정 항목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임획(壬劃)', '을획(乙劃)', '병별(丙別)' 등의 계정은 임년(壬年), 을년(乙年), 병년(丙年) 등 특정 간지해(干支年)에 조정이나 상급 군영에서 배정한 곡물을 별도로 구분하여 관리한 특별 회계였다.
특히 임획에는 콩[太] 315석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특정 시기의 군수(軍需)에 필요한 물자를 별도로 확보하고, 장부를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기록의 "壬劃: 米二十九石五斗六升六合九夕, 租七十二石九斗五升六合八夕, 太三百十五石八斗八升九合四夕"(임획: 쌀 29석 5두 6승 6합 9석, 조 72석 9두 5승 6합 8석, 콩 315석 8두 8승 9합 4석)이라는 기록은 특정 시기에 편성된 국방 재원의 구체적 현황을 보여준다.
다른 항목보다 콩의 비중이 큰 것은 군마 사료 확보나 비상 물자 마련 등 당시 군사적 필요에 따라 곡물의 용도를 구분하여 운용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목적별 회계 운영과 이월 방식은 조선시대 지방 행정이 고정된 예산에만 의존하지 않고, 상황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재정 운용 방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용도가 정해진 항목을 별도로 기록함으로써 물자의 사용 목적을 명확히 하고, 필요한 시기에 군사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200여 년 전 남해현의 창고 관리인과 관청 서리들은 해마다 장부의 증감을 확인하며 특별 회계 항목을 갱신하고, 이러한 지속적인 관리가 지역 방어와 재정 운영의 안정성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남해현읍지』 곡수, 조선 병참 행정의 숨은 기록
1832년 『경상도읍지』 「남해현읍지」의 곡수(穀數) 항목을 정독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무기 수량이나 곡물 재고를 확인하는 통계 작업이 아니다.
석(石), 두(斗), 승(升), 합(合), 석(夕)으로 이어지는 정밀한 기록의 행간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긴장 속에서 군선을 정비하던 수군 장졸들, 산 정상에서 봉수를 지키던 봉수군, 그리고 군량을 나르고 장부의 수치를 맞추던 이름 없는 남해 사람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이 군수 장부는 조선 후기 국방 체계가 단순히 낡고 무력한 구조에 머물렀다는 기존 인식과 달리, 세밀한 기록과 관리 속에서 운영된 행정 시스템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읍지 마지막에 기록된 "軍粮: 米七十石. 蘇米: 十石. 米食: 三石."(군량: 쌀 70석. 소미: 10석. 미식: 쌀 3석.)이라는 짧은 문장은 현장 군사들에게 필요한 최종 보급 물자의 규모를 보여준다.
국가 차원의 회계 항목부터 병사들이 먹는 한 끼의 식량까지 아우른 이 기록은 조선의 병참 행정이 현장의 필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늘날 남해는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관광지로 기억되지만, 200여 년 전 남해의 바다는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국방의 최전선이었다. 따라서 기록 속 쌀 한 홉과 조 한 작의 기록을 다시 살피고 연구하는 일은 선조들이 남긴 국방 행정의 유산을 이해하고 미래 세대에 전하는 중요한 문화적 작업이다.
남해현읍지의 곡수 항목은 역사를 움직인 힘이 이름난 영웅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숫자 하나하나를 기록한 관리들의 성실함에서도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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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4(금) 18: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