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南海의 역사를 읽다
조선 초기의 지리지 기록은 전쟁과 왜구의 침입 속에서 재편되어 온
한 지역의 행정·교통·군사적 변천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곤남군은 농업 및 공업 기반과 섬·바다의 해양 산물이 결합된 공간,
봉수와 수군을 통해 국가의 경계를 수호하던 핵심 요충지였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10월 08일(목)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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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년(세종 7) 경상도지리지 완성을 시작으로 조선 초기에는 전국 각지의 지리와 인구, 토산, 군사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국가적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어졌다. 그 성과로 1432년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으며, 이를 수정·보완하여 1454년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 부록에 수록한 것이 바로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 문헌은 고을별로 일정한 체계와 항목에 따라 정리된 전국 지리지로서, 고려보다 한층 강화된 중앙집권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가운데 곤남군(昆南郡)에 속했던 남해현의 연혁, 자연환경, 인구, 성씨, 생산물, 봉화 등 군사시설 등을 종합 수록하고 있어 오늘날 남해 지역을 이해하는 핵심 사료로 꼽힌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래 섬을 터전으로 삼았던 남해현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육지로 거처를 옮긴 뒤 조선 초 여러 차례 행정구역 변천을 겪었다.
따라서 곤남군의 성립과 변화 과정을 규명하는 것은 그에 편입되었던 남해현의 역사와 주민의 삶을 복원하는 중요한 길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을 따라가다 보면 섬과 육지, 농토와 바다, 생산과 방어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던 조선 초기 남해의 역동적인 실상을 포착할 수 있다. 이에 본 글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 '곤남군' 편을 중심으로, 그 안에 담긴 남해현의 기록을 다층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 남해현의 연혁과 행정구역의 변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남해현을 "본래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고 설명한다. 신라 신문왕 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했고, 경덕왕 때 남해군(南海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현종 때에는 현령관(縣令官)을 두면서 지방행정의 한 고을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남해현은 큰 변화를 겪었다. 1358년(공민왕 7), 왜구로 인해 땅을 잃고 진주 임내(任內)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임시로 옮겨 거주했다. 섬에 자리한 고을이 육지로 이동한 것이다.
왜구의 침입은 단순히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고을의 터전과 행정 체계까지 뒤흔들었다. 이후 남해현의 소속과 명칭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하동(河東)과 합쳐 하남현(河南縣)이라 하였고, 이듬해 하동현을 다시 설치하면서 진주 임내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남해에 붙여 해양현(海陽縣)이라 하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금양을 다시 진주에 돌려보내고 남해현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1419년(세종 1), 남해현은 곤명현(昆明縣)에 합쳐져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명만의 변동이 아니었다. 고을의 소속이 달라진다는 것은 행정과 조세, 군역의 체계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활공간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남해현이라는 이름은 여러 차례 행정적 변화를 겪었지만, 그 이름을 지탱해 온 섬과 그곳에서 이어진 삶은 계속되었다. 남해현에 딸린 난포현(蘭浦縣)과 평산현(平山縣)의 사정은 더욱 두드러진다. 난포현은 본래 내포현(內浦縣), 평산현은 본래 서평산(西平山)이었다. 두 곳 모두 섬에 있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어 남해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랐지만, 공민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인물(人物)이 모두 없어지고 다만 토지만 있을 뿐(人物俱已, 但有土地耳. 인물구이, 단유토지이.)"이라고 했다. 고을을 이루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땅만 남았다는 이 짧은 문장은 남해 지역이 겪은 전란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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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다를 건너 이어진 삶과 경계
곤남군의 경계(곤명현 중심)는 동쪽으로 진주까지 17리, 서쪽으로 하동까지 6리, 남쪽으로 하동까지 14리, 북쪽으로 진주까지 9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수치는 당시 행정구역의 범위를 알려주는 동시에 남해가 육지의 여러 고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섬이라고 해서 외부와 단절된 공간은 아니었다. 바닷길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오갔고, 행정과 군사적 관계도 이어졌다.
곤남군의 호수는 271호, 인구는 1,300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1명, 진군(鎭軍) 9명, 선군(船軍) 136명으로 편성되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선군의 규모다. 육지의 고을과 달리 바다를 생활의 한 축으로 삼았던 지역의 특성이 군사 편제에도 나타난다.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면서 경계였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물산을 얻고 섬과 육지를 오갔지만, 한편으로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야 했다.
고려 말 남해현이 섬을 떠나야 했던 경험은 이러한 현실을 잘 말해준다. 바다는 풍요를 가져오는 공간인 동시에 외부의 위협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었다.
성씨에 관한 항목에서는 당시 지역사회의 구성도 엿볼 수 있다. 남해의 촌락성(村落姓)은 제(諸)씨였고, 배(裵)·김(金)·백(白)·진(陳)씨는 망성(亡姓)으로 적혀 있다. 난포에는 정(鄭)·박(朴)이 성으로, 고(高)가 촌락성으로 나타나며, 평산에는 조(趙)·배(裵)·백(白)이 성으로, 조(曺)가 망성(亡姓)으로 나온다.
이미 없어진 다음향(多音鄕)의 속성(續姓)으로 문(文) 씨를 적은 것도 눈길을 끈다.
성씨의 분포와 소멸은 그 자체로 당시 지역사회의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어느 집단이 정착하고 어느 집단이 사라졌는지에 관한 정보는 단순한 성씨 목록을 넘어 고을의 형성과 쇠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3) 자연환경으로 읽는 조선 초기 남해의 삶
곤남군의 자연환경에 대해서는 "그 땅은 비옥하고, 기후는 따뜻하다(厥土肥, 風氣暖. 궐토비, 풍기난.)"고 했다. 개간한 전답은 1,824결이며 논이 조금 더 많았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에도 농업을 위한 토지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의(土宜), 곧 그곳의 토질과 기후에 알맞은 생산물로는 벼(稻), 기장(黍), 콩(菽), 조(粟), 감, 송이버섯(松茸), 목면(木綿), 삼(麻)이 열거되어 있다. 논과 밭에서는 곡식을 거두고, 산과 들에서는 감과 버섯을 얻었으며, 목면과 삼도 재배했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자연환경에 따라 여러 자원을 활용했던 모습이다.
토공(土貢)의 목록은 더욱 다채롭다. 꿀과 황랍(黃蠟), 표고, 문어(文魚), 홍합(紅蛤), 지초(芝草), 칠(漆), 사슴가죽(鹿皮), 삵가죽(狸皮), 노루가죽(獐皮) 등이 적혀 있다.
약재로는 천문동(天門冬)이 있었고, 토산(土産)으로 생포(生鮑, 생전복), 곽(藿, 미역), 은구어(銀口魚), 해삼(海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물산의 목록을 하나씩 따라가면 당시 남해의 생활공간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들에서는 곡식을 재배하고 산에서는 버섯과 약재를 얻으며, 바다에서는 전복과 미역, 물고기와 해삼을 채취했다. 육지와 산, 바다가 각각 다른 생산물을 제공하면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생포와 곽, 은구어, 해삼 등의 해산물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바다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생활의 기반이었다. 농업에 필요한 땅과 수산 자원을 얻을 수 있는 바다가 함께 있었기에 남해의 경제생활은 여러 환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4) 생산 시설로 살펴본 조선 초기 남해 남해의 생산 활동은 농업과 수산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염소(鹽所)는 세 곳이었고 모두 군 남쪽에 있었다. 소금을 저장하는 염창(鹽倉)이 있었으며, 염장관(鹽場官)이 이를 감독하고 지켰다. 바닷물을 이용한 소금 생산과 국가의 관리 체계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소금은 식생활에 필수적인 물품이었기에 생산과 저장에 대한 관리가 중요했다. 남해의 바다는 해산물을 얻는 곳인 동시에 소금을 만들어내는 생산 공간이기도 했다. 자연조건이 지역경제의 여러 분야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소(磁器所)는 두 곳이었다. 하나는 군 남쪽 포곡리(蒲谷里)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군 동쪽 노동(蘆洞)에 있었다.
두 곳의 품질은 모두 중품(中品)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지명으로 남아 있는 포곡리와 노동에서 당시에는 자기를 만드는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설의 존재는 남해의 경제생활이 단순한 농업 중심의 구조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농사를 짓고 바다에서 물산을 얻는 한편, 소금을 생산하고 생활에 필요한 자기(磁器)를 만들었다. 산과 들, 바다뿐 아니라 사람의 기술과 노동도 지역경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지리지에는 생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작업 과정이 상세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개별 노동자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복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염소와 자기소(磁器所)가 별도의 생산 시설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 남해에서 일정한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교통과 방어, 남해의 삶의 터전
남해현(南海縣)의 역사에서 교통과 방어는 서로 떼어놓기 어렵다.
곤남군의 역(驛)은 완사역(浣沙驛) 하나였는데, 본래 남해도(南海島)의 덕신역(德新驛)이었으나 왜구로 인해 육지로 옮겼다. 역참은 사람과 문서, 물자가 오가는 국가의 교통망이었으므로 덕신역의 이전은 왜구의 침입이 전투에만 그치지 않고 행정과 교통시설의 위치까지 바꾸어 놓았음을 보여준다.
평산포는 남해도 남쪽에 있으며 본군에서 90리 떨어진 곳으로, 노량(露梁)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지켰다.
바다는 물산을 얻는 터전인 동시에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야 하는 공간이었으며, 선군(船軍)의 편제와 평산포의 방어체계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봉화는 세 곳으로, 금산(錦山)에서 소흘산(所屹山), 다시 망운산(望雲山)을 거쳐 진주 금양부곡의 양둔(陽芚)까지 신호가 이어졌다. 이는 남해의 봉화망이 섬 안에 머물지 않고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남해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지만, 유사시에는 육지와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응하는 방어체계 속에 놓여 있었다. 한편, 지리지는 남해도에 대해 수로(水路)가 1리 240보이며 "백성들이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는다.(人民入居農作. 인민입거농작)"라고 적었다.
이는 남해도가 군사적 요충지인 동시에 사람들이 정착해 농사를 짓고 생활하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바다를 오가는 교통로와 포구의 수군, 산 위의 봉화, 섬의 농경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당시 남해의 생활과 질서를 이루는 요소였다. 결국 남해의 섬과 바다는 군사와 교통, 생산과 정착이 함께 이루어진 삶의 터전이었다.
6) 지명으로 읽는 남해의 역사
남해현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지리지에 등장하는 여러 지명이 오늘날의 공간과 겹쳐 보인다. 소곡산(所谷山), 금산(錦山), 소흘산(所屹山), 망운산(望雲山), 평산포(平山浦), 포곡리(蒲谷里), 노동(蘆洞) 등이 그러하다. 이들 이름은 단순한 위치 표시가 아니라 과거 사람들이 생활하고 생산하며 이동했던 공간을 가리키는 흔적이다.
특히 난포현과 평산현의 사례는 지명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때 독립된 고을로 존재했던 곳이 왜구의 침입을 거치며 사람을 잃고 행정적 기능도 사라졌다.
지리지에는 그 고을의 이름과 옛 연혁이 남았지만, 실제 생활공간으로서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지명은 행정구역이 바뀌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문서에 남으면서 한 장소의 기억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옛 지명을 살펴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과거의 공간 구조와 생활권을 복원하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남해현의 사례는 더욱 그러하다. 한때 섬의 고을이었던 남해현은 왜구로 인해 육지에 거처를 마련했고, 여러 행정적 변화를 거쳐 곤남군에 편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난포와 평산 같은 고을은 쇠퇴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이름과 위치, 옛 소속과 변화의 과정은 문헌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따라서 오래된 지명을 살피는 일은 과거의 이름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이름이 가리키던 공간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으며, 어떤 이유로 고을의 모습이 달라졌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작업이다. 지명(地名)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작은 역사책이 된다.
7) 옛 기록과 오늘의 공간, 남해를 잇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속 곤남군(昆南郡)을 살펴보면 그 안에 포함된 남해현의 오랜 변천과 섬을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드러난다.
남해현은 신라의 전야산군에서 남해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섬을 떠났다가 조선 초 다시 남해현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1419년에는 곤명현과 합쳐져 곤남군이 되었다.
1,824결의 전답에서 곡식과 목면·삼을 생산하고, 산과 들에서 버섯과 약재를 얻었으며, 바다에서는 전복·미역·은구어·해삼 등을 채취했다.
남쪽에는 세 곳의 염소가 있었고 포곡리와 노동에는 자기소(磁器所)가 자리했으며, 평산포의 수군과 금산·소흘산·망운산의 봉화는 해상 방어체계를 이루었다. 이처럼 남해의 삶은 농업과 수산업, 생산과 교통, 방어가 서로 맞물린 가운데 이어졌다.
오늘날 남해의 산과 바다, 포구와 마을을 바라보며 그 옛 모습을 함께 살펴보면 익숙한 공간에 쌓인 역사의 깊이를 새롭게 느낄 수 있다.
현재의 지명 아래에는 오래전의 행정구역과 생활공간이 겹쳐 있고, 옛길과 포구에는 사람들의 이동과 생산 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이러한 과거를 이해하는 중요한 길잡이다.
곤남군(昆南郡)이라는 행정적 틀 속에서 남해현의 변천을 따라가면 섬과 육지의 관계, 자연환경과 생업, 외침과 방어가 서로 얽혀 있던 조선 초기 남해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오래된 지명과 자료를 오늘의 공간과 연결해 읽는 일은 남해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지역의 정체성을 깊이 이해하는 밑거름이 된다.

2026.10.08(목) 1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