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기 선생의 교육이야기] 사람을 기르는 길, 회재 이언적이 남긴 교육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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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5.08(금) 13:14
[최성기 선생의 교육이야기] 사람을 기르는 길, 회재 이언적이 남긴 교육의 본질

이언적의 삶은 권력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학문과 도덕적 실천을 끝까지 지켜낸 '실천적 성리학자의 교육 철학'을 보여준다
그의 교육 사상은 지식의 전달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기르고 삶의 방향을 세우는 '인간중심 교육 본질'을 일깨워주고 있다

발행연월일 : 2026년 05월 08일(금) 12:52
조선 중기 사림파(士林派) 도학 전통을 개척하고 성리학 발전을 이끈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은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학문의 본질과 사람됨의 길을 끝까지 지킨 '길 위의 선비'였다. 그의 삶은 단순한 선비의 행적을 넘어, 인간·사회·국가·학문의 균형을 끊임없이 추구한 교육자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호는 회재(晦齋),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이언적은 1491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조부 이수회(李壽會)와 부친 이번(李蕃)으로부터 유학의 기초를 익혔다. 일찍부터 학문적 재능을 드러낸 그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 문신이자 학자로 성장하였다. 경주를 중심으로 학문을 펼치며 후학을 양성한 이언적은, 실천적 도덕성과 내면적 수양을 강조하며 성리학의 인간적 측면을 한층 더 깊게 다듬었다. 또한 도학 정치의 이상을 현실에 접목하고자 노력하며 학문과 정치의 조화를 모색하였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 등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좌찬성(左贊成)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김안로(金安老) 등용에 반대해 관직을 사임했다가, 다시 복직하여 좌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당시 추국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퇴하였다. 이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기고 생을 마쳤다.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의 방향을 확립하며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을 정통으로 계승하였다. 특히 제자 이황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이황의 성리학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시대 조정의 요직을 맡았으며, 인종의 사부로서 도의 정치 실현을 위한 이상적 여건을 다졌다. 인종은 이언적을 깊이 신뢰하고 그의 도학적 견해에 귀 기울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군왕의 덕치 실현을 도모하였다. 이언적은 국왕에게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다"라는 직언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 현실은 언제나 이상과 충돌하였다. 명종(明宗) 즉위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는 훈척 정치의 복귀를 알렸고, 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도학 정치의 중단을 의미했다. 이언적은 정국(政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관직 생활의 피로와 권력 다툼의 허망함을 뒤로한 그는, 고향 경주 양동(良洞)으로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낙향 이후 이언적은 자신의 학문을 더욱 정제하며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인간의 심성과 도덕적 수양을 중심 주제로 삼았으며, 단순한 경전 해석을 넘어, 인간 내면의 이치와 세상의 도리를 연결하는 통합적 사고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제자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낙향 후에도 매일 제자들과 경전(經典)을 읽고 토론하며, 인격 수양과 실천적 삶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그의 후학들은 조선 중·후기 성리학(性理學)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특히 퇴계 이황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점이 주목된다. 이언적의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른다)'의 사상은 퇴계 철학의 근간이 되었고, 이는 사림파 성리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언적은 낙향 후에도 학문과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평안도 강계(江界) 유배지에 머무르며, 향촌 서당에서도 가르침을 이어갔다. 그는 학문을 단순히 벼슬길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과정으로 보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글을 쓰고 제자를 길렀으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지만,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학문의 본령을 지키려는 그의 고집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이언적의 교육관은 오늘날 교육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입시를 위한 교육'과 '사람을 위한 교육'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는 시험과 벼슬, 성과와 경쟁이 아닌 삶의 깊이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교육을 지향했다. 교육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성찰의 과정을 중시했으며, 이는 오늘날 인성 교육과 철학적 사고력 함양, 그리고 교육의 인간화 논의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지혜로운 인간'을 기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이언적의 교육 철학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는 "사람이 도(道)를 잃지 않으면, 그 삶이 어디에 있든 그 길은 헛되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는 교육의 목적이 단지 수단적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도리(道理) 있는 삶'을 실현하는 데 있음을 뜻한다. 오늘날 교단과 가정, 학교 시스템 모두에서 이 같은 신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정한 배움은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며,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후 그는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동방 18현(東方十八賢)' 중 한 사람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그의 학문과 덕망, 교육적 실천이 조화를 이루었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이언적을 통해 '가르침'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삶의 본보기이자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 그의 삶은 오늘날 교사의 본질과 태도에 본보기가 된다. 그는 지식의 전달에만 그치지 않고, 제자들에게 바른길을 제시하며 함께 걸었다. 이언적은 과거의 성현이 아니라, 오늘날 교육이 지향할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다. 오늘날 교육은 본질을 다시 묻는다. 우리는 진정 '사람을 기르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 경쟁과 속도, 기술과 성과에 치우친 교육 환경에서 도(道)를 따르고 사람됨을 가르친 그의 정신이 더욱 절실하다.



이언적의 삶과 사상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역경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하며 제자를 길러낸 그의 모습은, 진정한 교육이 시대를 초월해 인간을 빚어가는 일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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