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東學革命 전투지 壬辰城(起王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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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東學革命 전투지 壬辰城(起王山)
2018년 08월 10일(금) 16:01
정의연 본지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조선후기를 접어들면서 국가 관료들의 횡포와 문란 등으로 백성들은 옳은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림을 받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19세기부터 항쟁이 시작되었는데, 남해군은 1862년에 전국 최초 진주농민항쟁의 여파가 차츰 남해까지 파급되어 12월에 남해에서도 대규모의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농민항쟁의 불씨가 동학혁명으로 이어졌고, 이어 3·1운동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남해 동학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던 것이다. 남해 동학농민군은 기왕산(起王山)을 일본군과의 전투지로 정하고 임진성(壬辰城)을 점령하여 주둔하면서 일본군에 대응하자 일본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반면에 대응하는 동학농민군은 구식무기와 농기구, 대창 등이었다.

동학혁명 전투지로 불리는 임진성(도기념물 제20호)은 남면 상가리 291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임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민·관·군이 축성하였다 하여 일명 민보산성(民保山城)이라고도 부르지만 발굴결과 라말려초에 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성의 둘레는 286.3m이고, 높이는 2~6m, 성내 면적은 약 16,460㎡로서 동서 두 곳에 성문지가 있다. 북쪽에 송등산(松嶝山)을 등지고, 서쪽에 귀비산(貴妃山)과 천황산(天皇山)이, 동쪽으로는 금산(錦山), 남쪽으로는 대한해협과 직결되며 한려수도를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와 여수시가 인접하고 있다.

1893년 보은집회에 하동·진주·성주·선산·인동 지역동학군이 참여하였으며, 1894년 9월~10월에는 하동과 진주 일대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토벌군 사이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이는 진주와 하동이 남해지역과 인접하고 있어 남해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남해동학혁명은 주동자 양익주의 후손(양윤두)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남해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양윤두의 증언이 뒷받침하고 있다. "양익주는 내가 클 때 그 분이 화가 나고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막 고함을 지르고 호령을 했는데, 동학에 입도하여 바로 동네 앞 기림산(기왕산)성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 전투에서 당할 수가 없어 도망하다가 일본 군인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당하고 남면 평산리 주재소로 끌려가 발목에 족쇄를 차고 감옥생활을 하였다. 이후 양익주는 족쇄를 풀고 굴뚝으로 나와 도망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도망하여 고동산에서 2개월 정도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볼 때, 남해 지역도 농민군에 가담한 자가 많았고 기림산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문헌에 의하면, 1894년 10월 11일 호남 동학농민군 19명이 남해로 들어와 현감을 위협해 죄수 16명을 석방한 뒤, 남해 농민군 2백여 명과 함께 16일 진주로 되돌아간 일이 있었다고 하니 10윌 중순 이전에 이미 남해도 농민군이 자체 봉기하여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며, 기림산 전투가 있었다면 그 시기가 10월 중순 이후로 보아진다.

동학혁명은 사회개혁운동이다. 이제 동학혁명의 중요성을 정부에서는 인식하고 2018년 4월에 우리나라의 중심가인 종로에 전봉준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제 남해도 동학혁명이 있었다는 근거에 따라 남해동학혁명 기림산전투 내용이 담긴 조형물을 설치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우리의 역사가 위대하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인 홍보나 걸 맞는 주변정비 역시 관심 있게 추진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탓하지 못하는 실정이지만 행정이나 뜻있는 자가 스스로 추진한다면 많은 호응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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